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안쓰러운 인정세태[이준식의 한시 한 수]〈189〉

동아일보|오피니언 안쓰러운 인정세태[이준식의 한시 한 수]〈189〉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02 03:00업데이트 2022-12-02 05:10 내가 돈이 많으면 마누라와 아이는 내게 참 잘하지. 옷 벗으면 날 위해 차곡차곡 개주고, 돈 벌러 나가면 큰길까지 배웅해주지. 돈 벌어 집에 돌아오면 날 보고 함박웃음 지으며, 내 주변을 비둘기처럼 맴돌며 앵무새처럼 조잘대지. 어쩌다 한순간 가난해지면 날 보고는 금방 싫은 내색. 사람은 아주 가난하기도, 또 부유해지기도 하는 법이거늘, 재물만 탐하고 사람은 돌보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수밖에. (吾富有錢時, 婦兒看我好. 我若脫衣裳, 與吾疊袍오. 吾出經求去, 送吾卽上道. 將錢入舍來, 見吾滿面笑. 繞吾白합旋, 恰似鸚鵡鳥. 邂逅暫..

어떤 보은[이준식의 한시 한 수]〈188〉

어떤 보은[이준식의 한시 한 수]〈188〉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1-25 03:00업데이트 2022-11-25 03:19 그리운 그대, 결국 어디에 가 계신지. 슬픔에 젖어 아득한 형주 땅 바라봅니다. 온 세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저를 발탁하신 지난 은혜 평생 간직할 겁니다. 전 이제 곧 농사일에 뛰어들어, 경작하며 전원에서 늙어갈 겁니다. 남으로 나는 기러기 한없이 바라보지만, 무슨 수로 한마디라도 전할 수 있을는지요. 所思竟何在, 창望深荊門. 擧世無相識, 終身思舊恩. 方將與農圃, 藝植老邱園. 目盡南飛鳥, 何由寄一言. ―‘형주의 장 승상께 부치다(기형주장승상·寄荊州張丞相)’ 왕유(王維·701∼761) 자신을 중용한 은혜를 생각하면 시인의 재상 장구령(張九齡)에 대한 공경심은 ..

간관의 불만[이준식의 한시 한 수]〈187〉

간관의 불만[이준식의 한시 한 수]〈187〉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1-18 03:00업데이트 2022-11-18 03:15 발걸음 나란히 붉은 계단을 올라, 황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부서가 갈렸지요. 새벽이면 황실 의장대 따라 들어와, 저녁엔 황궁의 향내를 묻힌 채 돌아왔고요. 백발 되니 낙화에도 서글퍼지고, 푸른 구름 아득히 나는 새가 부럽기만 합니다. 태평한 조정이라 실책이 없어서일까요. 간언 상소가 드물어졌으니 말입니다. 聯步趨丹陛, 分曹限紫微. 曉隨天仗入, 暮惹御香歸. 白髮悲花落, 靑雲羨鳥飛. 聖朝無闕事, 自覺諫書稀. ―‘문하성 좌습유 두보에게(기좌성두습유·寄左省杜拾遺)’ 잠삼(岑參·약 718∼770) 두보와 같은 시기에 간관(諫官)을 지낸 시인. 둘은 나란히 황궁의 붉은 계단..

꽃 그림자의 의미[이준식의 한시 한 수]〈186〉

꽃 그림자의 의미[이준식의 한시 한 수]〈186〉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1-11 03:00업데이트 2022-11-11 04:06 화려한 누각에 첩첩이 어리는 꽃 그림자, 몇 번이나 아이 불러 쓸어도 없앨 수 없네. 태양으로 잠깐 거두어지긴 해도, 밝은 달이 외려 다시 불러오리니. 重重疊疊上瑤臺, 幾度呼童掃不開. 剛被太陽收拾去, 각敎明月送將來. ― ‘꽃 그림자(화영·花影)’ 소식(蘇軾·1037∼1101) 시인은 왜 꽃 그림자를 비질하여 쓸어내려 했을까. 화려한 누각을 뒤덮은 게 향긋한 꽃이 아니라 서늘한 그림자여서인가. 아무리 쓸고 또 쓸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모를 리 없으련만 왜 애먼 아이만 고달프게 했을까. 지는 해와 함께 그림자가 잠시 사라질 순 있지만 밝은 달이 뜨면 이번엔 달그림..

사랑싸움[이준식의 한시 한 수]〈185〉

사랑싸움[이준식의 한시 한 수]〈185〉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1-04 03:00업데이트 2022-11-04 03:12 어젯밤 비에 젖어 처음 핀 해당화, 여린 꽃송이 고운 자태 말이라도 걸어올 듯. 신부가 이른 아침 신방을 나가더니, 꽃 꺾어와 거울 앞에서 제 얼굴과 견준다. 꽃이 이뻐요 제가 이뻐요 낭군에게 묻는데, 꽃만큼 예쁘진 않다는 낭군의 대답. 신부가 이 말 듣고 짐짓 토라진 척, 설마 죽은 꽃이 산 사람보다 나을 리가요? 꽃송이를 비벼서 신랑 앞에 내던지며 낭군님, 오늘밤은 꽃이랑 주무셔요. 昨夜海棠初着雨, 數타輕盈嬌欲語. 佳人曉起出蘭房, 折來對鏡比紅粧. 問郞花好奴顔好, 郞道不如花窈窕. 佳人見語發嬌嗔, 不信死花勝活人. 將花유碎擲郞前, 請郞今夜伴花眠. ―‘염화미소도에 부치는..

알 수 없어요[이준식의 한시 한 수]〈184〉

알 수 없어요[이준식의 한시 한 수]〈184〉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0-28 03:00업데이트 2022-10-28 04:03 꽃인 듯 꽃이 아니요, 안개인 듯 안개도 아닌 것이 한밤중 왔다가 날 밝으면 떠나가네. 춘몽처럼 와서 잠시 머물다, 아침 구름처럼 사라지니 찾을 길 없네. 花非花, 霧非霧, 夜半來, 天明去. 來如春夢幾多時, 去似朝雲無覓處. ​ ―‘꽃인 듯 꽃이 아니요(화비화·花非花)’ 백거이(白居易·772∼846) ​ 백거이는 시 한 수를 완성할 때마다 그걸 집안일 하는 노파에게 먼저 읽어주고 노파가 뜻을 이해하면 그제야 자신의 시로 기록했다고 한다. 그의 시를 ‘산둥(山東) 사는 노인이 농사짓고 누에 치듯 모든 말이 다 사실적이다’라고 평가한 이도 있다. 자신의 박학다식을 활..

영원한 미완성, 편지[이준식의 한시 한 수]〈183〉

영원한 미완성, 편지[이준식의 한시 한 수]〈183〉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0-21 03:00업데이트 2022-10-21 03:14 낙양성 가을바람 바라보다, 집 편지 쓰려니 오만 생각이 다 겹친다. 급한 김에 할 말을 다 못했나 싶어, 가는 인편 떠날 즈음 또다시 열어 본다. (洛陽城裏見秋風, 欲作家書意萬重. 復恐悤悤說不盡, 行人臨發又開封.) ―‘가을 상념(추사·秋思)’ 장적(張籍·약 768∼830) 바람의 이미지가 계절마다 다를 수 있다면 봄바람은 가슴으로 느끼고 여름 바람은 온몸으로 즐기는 것일 테다. 한겨울 북풍한설이 귓전을 때린다면 가을바람은 아마 나뒹구는 낙엽에 담겨 눈앞에 일렁이는 게 아닐까. 시인이 불현듯 고향과 가족을 떠올린 것도 바람 부는 낙양성의 스산한 풍광을 본 ..

시인의 훈계[이준식의 한시 한 수]〈182〉

시인의 훈계[이준식의 한시 한 수]〈182〉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0-14 03:00업데이트 2022-10-14 04:13 해마다 말을 몰아 수도 거리 나다니고, 객사는 집처럼 집은 객사처럼 여긴다. 돈 써서 술 마시며 종일 빈둥대고, 촛불 밝혀 도박하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아내가 수 놓아 보낸 글은 알기 쉬워도, 기녀의 속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법. 대장부로서 서북쪽 중원 땅을 맘속에 둬야지, 수서교에서 눈물 따윈 흘리지 마시라. (年年躍馬長安市, 客舍似家家似寄. 靑錢換酒日無何, 紅燭呼盧宵不寐. 易挑錦婦機中字, 難得玉人心下事. 男兒西北有神州, 莫滴水西橋畔淚.) ―‘목란화(木蘭花)·임추관을 비판하다(희임추·戱林推)’ 유극장(劉克莊·1187∼1269) 시인과 동향(同鄕)인 한 선비가..

형극의 삶[이준식의 한시 한 수]〈181〉

형극의 삶[이준식의 한시 한 수]〈181〉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0-07 03:00업데이트 2022-10-07 03:24 강 위로 날마다 쏟아지는 비, 옛 초나라 땅에 찾아든 소슬한 가을. 거센 바람에 나뭇잎 지는데, 밤늦도록 담비 갖옷을 움켜잡고 있다. 공훈 세울 생각에 자주 거울 들여다보고, 진퇴를 고심하며 홀로 누각에 몸 기댄다. 위태로운 시국이라 임금께 보은하고픈 마음, 쇠약하고 병들어도 그만둘 수 없지. (江上日多雨, 蕭蕭荊楚秋. 高風下木葉, 永夜攬貂구. 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 時危思報主, 衰謝不能休.) ―‘강가에서(강상·江上)’ 두보(杜甫·712∼770) 주룩주룩 가을비 쏟아지는 남쪽 지방 어느 강변의 누각. 추풍에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시인은 밤늦도록 가죽 외투를 쥐고 ..

아내의 마음새[이준식의 한시 한 수]〈180〉

아내의 마음새[이준식의 한시 한 수]〈18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09-30 03:00업데이트 2022-09-30 03:20 붓으로 막 그림을 그리려다, 먼저 차가운 거울을 집어 듭니다 놀랍게도 얼굴은 부석부석하고, 귀밑머리는 점차 성기는 것 같네요 흐르는 눈물이야 그리기 쉽지만, 시름겨운 마음은 표현하기 어렵네요 행여라도 낭군께서 절 깡그리 잊으셨다면, 이따금 이 그림을 펼쳐 보셔요. 欲下丹靑筆 先拈寶鏡寒 已驚顔索寞 漸覺빈凋殘 淚眼描將易 愁腸寫出難 恐君渾忘각 時展(화,획)圖看 ―‘초상화를 그려 남편에게 보내다(寫眞寄外·사진기외)’ 설원(薛媛·당 말엽) 젊은 선비 남초재(南楚材)는 교제와 견문을 넓히겠다는 생각에 아내 설원(薛媛)을 남겨두고 유람에 나선다. 그러다 한 지방의 태수(太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