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이준식의 한시 한 수]〈8〉비단 다섯묶음 값, 모란

賞牡丹 / 劉禹錫 庭前芍藥妖無格 池上芙蓉淨少情 唯有牡丹眞國色 花開時節動京城 정전작약요무격 지상부용정소정 유유모란진국색 화개시절동경성 뜰 앞 작약은 요염하되 품격이 없고 연못 연꽃은 정갈하되 운치가 모자라지 모란만이 천하에서 가장 빼어난 꽃 꽃 피는 시절이면 온 장안이 시끌벅적 옛사람들은 모란을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여겨 화려하고 풍성한 모란 송이를 곧잘 화폭에 담았다. 한자로는 모단(牡丹)으로 표기한다. 우리에게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김영랑 시인의 시구가 정작 꽃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당나라 때는 모란을 완상(즐겨 구경함)하는 풍조가 널리 유행해서 장안 꽃시장은 당 말엽까지도 큰 호황을 누렸다. 황실에서는 장안 근교의 여산(驪..

[이준식의 한시 한 수]〈7〉대나무의 절개

竹石 / 鄭燮 咬定靑山不放鬆 立根原在破岩中 千磨萬擊還堅勁 任爾東西南北風 교정청산불방송 입근원재파암중 천마만격환견경 임이동서남북풍 청산을 꽉 깨물고 놓아주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그 뿌리가 바위틈에 박혀 있었네 수천만 번 갈고 내리쳐도 여전히 꿋꿋하리니 제아무리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칠지언정 ※ 任爾: 너에게 맡긴다 ※ 放鬆: 느슨함(弛緩) 시인이 자신의 ‘죽석도’에 쓴 題畵詩로 바위틈에 우뚝한 대나무의 고절(孤節·홀로 깨끗하게 지키는 절개)을 묘사했다. 비바람으로부터 시련과 신고(辛苦)를 겪는 것이 어디 대나무뿐이랴. 세상살이 불화와 우격다짐이 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인 것을. 죽석이라는 시제가 아니라면 단순히 대나무와 대자연 간의 치열한 맞섬을 넘어 그것은 비곤(憊困·가쁘고 고단함)한 세월을 살아..

[이준식의 한시 한 수]〈6〉라일락의 가녀린 몸매

丁香 / 陸龜蒙 江上悠悠人不問 강상유유인불문 十年雲外醉中身 십년운외취중신 殷勤解却丁香結 은근해각정향결 縱放繁枝散誕春 종방번지산탄춘 느긋한 강촌 생활 아무도 묻는이 없어 십 년 구름 밖에서 취한 듯 지냈구나 라일락 바지런히 꽃망울을 터뜨리면 가지마다 한바탕 봄기운 번져나리니 유난스레 오진 라일락 꽃송이, 향낭(香囊)처럼 그 향기가 봄 길에 그윽하다. 이름마저 한자로는 정향이다. 한시에서 라일락의 이미지는 주로 여인의 순정 혹은 선비의 고결한 지조로 형상화된다. ‘라일락 가녀린 몸매, 아슬아슬 가지 위에 버티고 있다’거나 ‘매화와 봄을 다투는 법 없이 고즈넉이 봄비를 머금고 있다’가 그런 예다. 시에서 꽃과 시인은 한 몸이다. 강변 한갓진 곳에 자리 잡은 라일락,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으니 유유자적 속세를 벗..

[이준식의 한시 한 수]〈5〉모정, 그 따사로운 봄 햇살

遊子吟 / 孟郊 慈母手中線 자모수중선 遊子身上衣 유자신상의 臨行密密縫 임행밀밀봉 意恐遲遲歸 의공지지귀 誰言寸草心 수언촌초심 報得三春暉 보득삼춘휘 나그네의 노래 / 맹교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에 들린 실 길 떠나는 아들의 몸에 걸칠 옷 떠날 무렵 오밀조밀 박음질하시는 건 행여 더디 올까 걱정하신 때문이려니 누가 말했나, 한 치 풀 같은 마음이 석 달 봄 햇살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遊子: 오랫동안 집을 떠나 먼 곳에서 지내는 이 臨行: 먼 길을 떠나다. 密密: 조밀하다. 촘촘하다. 遲遲: 늦어지다. 寸草心: 아들의 효심이라는 것이 작은 풀처럼 아주 미약한 것을 가리킴. 三春: 음력으로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의 봄 석 달. 아들에게 입힐 옷은 진작 마련됐다. 하지만 행여 늦어질 귀향이 걱정스러운 어미..

[이준식의 한시 한 수]〈4〉절체절명의 연애편지

如意娘 / 武則天 看朱成碧思紛紛 간주성벽사분분 憔悴支離爲憶君 초췌지리위억군 不信比來長下淚 불신차래장하루 開箱驗取石榴裙 개상험취석류군 붉은색이 푸르게 보이는 건 심란한 마음 탓 초췌해진 몰골은 임 생각 때문이지요. 날마다 흘린 눈물이 미덥지 않으시다면 상자 열어 다홍치마에 묻은 눈물 얼룩 보시어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무측천이 비구니로 있을 때 당 고종 이치(李治)에게 바쳤다는 시다. 비구니가 어떻게 황제에게 이런 애틋하고 절절한 시를 바쳤을까. 원래 그는 열넷 나이에 태종 이세민의 재인(여러 비빈 중의 하나) 으로 들어갔다가 태종 사후에는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돼 장안 근교에 있는 感業寺로 보내졌다. 마침 고종이 태종의 기일을 맞아 그곳으로 제사를 드리러 행차했다. 황제가 선황의 기일에 분향 행..

[이준식의 한시 한 수]〈3〉시대의 봄

春望 / 杜甫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누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가져도 산하는 여전하여 성 안에 봄이 들어 초목만 무성하다 시국을 생각하니 꽃을 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는 석 달 내내 사그라지지 않으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의 가치 흰머리 긁적이자 더욱 짧아져 아예 비녀조차 꽂지 못할 듯 안녹산의 반군이 수도 장안 부근까지 쳐들어오자 당 현종은 사천으로 피신했고, 그 와중에 태자(숙종)가 황위를 계승했다. 소식을 접한 두보는 가족을 친척집에 맡겨둔 채 황제를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숙종의 행재소(行在所)로 향했고, 도중에 반군의 포로로 잡혀..

[이준식의 한시 한 수]〈2〉양귀비 찬가

淸平調 / 李白 雲想衣裳花想容 春風拂檻露華濃 若非群玉山頭見 會向瑤臺月下逢 운상의상화상용 춘풍불함노화농 야비군옥산두견 회향요대월하봉 옷을 보니 구름이요 얼굴 보니 꽃이로세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이슬은 더없이 영롱하네 군옥산 산마루에서나 볼 선녀가 아니라면 요대의 달빛 아래서나 만날 선녀임이 분명하네 어느 늦은 봄, 모란이 만개했다는 소식에 황제는 양귀비를 대동하고 황궁의 沈香亭으로 행차했다. 궁중 가무를 담당하는 梨園弟子들의 공연이 막 시작될 즈음, 황제가 당대의 명창 李龜年에게 말했다. 오늘은 귀비와 함께 진귀한 꽃을 감상하는 자리이거늘 어찌 옛 가락만 들을 수 있겠는가? 황제는 이백을 불러들이라고 했다. 이구년은 황급히 장안 곳곳을 누비다 마침 주점에 곯아떨어져 있는 이백을 찾아냈다. 원래 궁궐 안에..

[이준식의 한시 한 수]〈1〉해우물 (淸明 / 杜牧)

淸明 / 杜牧 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청명시절우분분 노상행인욕단혼 차문주가하처유 목동요지행화촌 청명 무렵 어지러이 비 날리는데 길 가는 나그네는 심란하기만 주막이 어디냐고 물으니 목동은 저 멀리 행화촌을 가리킨다 -두목(, 803~852) 청명은 자연의 생명력이 왕성해지기 시작하는 절기, 인간이 대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한 해의 기운을 새롭게 맞아들이는 때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무렵이면 봄 풀밭을 노니는 답청이나 성묘 등으로 가족, 친지들이 한데 어울려 흥겨움을 나누었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 그 대오에서 떨어져 있다. 어지러운 빗속에서 홀로 객지를 떠돌고 있으니 그 심사는 자못 울적하기만 하다. 고달픈 삶에 덜미라도 잡혔다면 그 위안은 이제 解憂物-술에서 찾을 수밖에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