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깜찍한 낚시꾼[이준식의 한시 한 수]〈159〉

낚시질 배운 더벅머리 아이 삐딱하게 이끼 위에 앉으니 풀이 몸을 가린다 행인이 길 물어도 멀찍이서 손만 내저을 뿐 물고기 놀랠까봐 대꾸조차 않는다 蓬頭稚子學垂綸 側坐매苔草映身 路人借問遙招手 파得魚驚不應人 ― ‘낚시하는 아이(小兒垂釣·소아수조)’ 호령능(胡令能·785∼826) 낚시질에 몰두한 조마조마하고 진지한 동심이 깜찍하다. 이제 막 낚시를 배운 터라 이끼 낀 습지 위에 삐딱하게 앉은 자세부터가 불편하고 불안하다. 낚시에 집중하느라 그런 불편 따위는 깡그리 잊었나 보다. 몸을 가릴 만큼 잡초 덤불이 무성하니 인적 드문 한적한 곳을 제대로 고른 성싶다. 고기도 놀래지 않고 저 자신도 동그마니 떨어져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한데 갑자기 한 행인이 정적을 깨고 아이에게 길을 묻는다...

푸근한 격려[이준식의 한시 한 수]〈158〉

듣자하니 촉(蜀)으로 가는 길 가파르고 험난하여 다니기 어렵다지 얼굴 앞으로 홀연 산이 치솟고 말머리 사이로 구름이 피어난다고 그래도 꽃나무가 잔도를 뒤덮고 봄 강물은 촉의 도성 감돌며 흘러가리 인생 잘되고 못되고는 이미 정해져 있는 법 굳이 점 잘 보는 군평(君平)에게 물을 거 없네 見說蠶叢路 崎嶇不易行 山從人面起 雲傍馬頭生 芳樹籠秦棧 春流요蜀城 昇沈應已定 不必問君平 ―‘촉으로 가는 친구를 전송하며(送友人入蜀/李白·701∼762) 예부터 중국의 서남부 쓰촨(四川)성 일대를 촉, 장안에서 촉으로 통하는 길을 촉도라 불렀다. 촉은 이백의 고향이기도 한데 시 ‘촉도난(蜀道難·촉으로 가는 험로)’에서 그는 촉도를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고’, 온갖 맹수가 득시글거리는 험지라고 소개한 바 있다. 바로 ..

가난의 끝[이준식의 한시 한 수]〈157〉

동문을 나서면서는 돌아오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돌아오니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독 안엔 쌀 한 됫박도 남아 있지 않고, 둘러보니 횃대엔 걸린 옷이 없다. 칼 뽑아 들고 동문을 나서려는데, 집에서 애 엄마가 옷 붙잡고 흐느낀다. “남들은 부귀만을 바라지만 저는 죽을 먹어도 당신과 함께할래요. 위로는 푸른 하늘 때문이요, 아래로는 이 어린 자식 때문이라오. 지금 이러시면 안 돼요.” “안 돼, 가겠어! 내 지금 가도 늦었어. 백발이 된들 지금 같아선 오래 버티기 힘들어.” (出東門, 不顧歸, 來入門, 창欲悲. 앙中無斗米儲, 還視架上無懸衣. 拔劍東門去, 舍中兒母牽衣啼. 他家但願富貴, 賤妾與君共포미. 上用倉浪天故, 下當用此黃口兒. 今非. 돌. 行. 吾去爲遲, 白髮時下難久居.) ―‘동문의 노래(동문행·東門行)’..

가는 봄을 다잡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156〉

삼월, 다 졌나 했던 꽃이 다시 피고 낮은 처마엔 날마다 제비들 날아든다 자규가 야밤에도 피 토하며 우는 건 봄바람을 되부를 수 없다는 걸 믿지 못해서라네 (三月殘花落更開, 小첨日日燕飛來. 子規夜半猶啼血, 不信東風喚不回.) ―‘봄을 보내며(송춘·送春)’ 왕령(王令·1032∼1059) 자연의 봄도 인생의 봄도 ‘청춘’이라는 같은 이름을 쓴다. 청춘은 생기와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에 힘입어 늘 풋풋하고 고귀하다. 가는 봄을 애석해하며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고’(‘봄날은 간다’)라 노래한 심정은 그래서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다 졌나 싶던 꽃잎이 기적처럼 다시 개화한 것인지, 아니면 차마 봄을 못 보내는 시인의 간절함 덕택인지 막바지려니 했던 봄꽃이 다시 피어나고, 멀리 떠났던 제비들이 ..

운명을 바꾼 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155〉

변방 전쟁터로 나간 병사, 추위와 고달픔에 잠인들 잘 이룰까. 내 손수 지은 이 전투복, 그 누구 수중에 떨어질는지. 신경 써서 한 땀 더 바느질하고, 정성 담아 한 겹 더 솜을 댄다. 이번 생애야 도리없이 지나가지만, 다음 생엔 인연이 맺어지기를. 沙場征戍客, 寒苦若爲眠. 戰袍經手作, 知落阿誰邊. 사장정수객, 한고약위면. 전포경수작, 지락아수변. 畜意多添線, 含情更着綿. 今生已過也, 重結後身緣. 축의다첨선, 함정갱착면. 금생이과야, 중결후신연. - ‘전투복에 담은 시(포중시·袍中詩)’ 당대 궁녀 변방을 지키는 어느 병사의 손에 들어온 솜옷, 당 현종(玄宗)이 궁녀들을 시켜 만들어 보낸 위문품이었다. 옷 속에서 정체 모를 글귀를 발견한 병사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특별한 사연을 적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소박한 접대[이준식의 한시 한 수]〈154〉

집 남쪽과 북쪽으로 봄 강물이 넘치고 보이는 것이라곤 날마다 오는 갈매기 떼 꽃길은 손님 없어 비질한 적 없고 사립문은 오늘에야 그댈 위해 열었지요 소반 음식 시장 멀어 맛난 게 없고 항아리 술 가난하여 해묵은 탁주뿐이라오 이웃 노인과도 기꺼이 대작하시겠다면 울 너머로 그분 불러 남은 술 비우시지요 舍南舍北皆春水, 但見群鷗日日來. 花徑不曾緣客掃, 蓬門今始爲君開. 盤v市遠無兼味, 樽酒家貧只舊배. 肯與(린,인)翁相對飮, 隔籬呼取盡餘杯. ―‘손님의 방문(객지·客至)’ 두보(杜甫·712∼770) 적적한 시간을 찾아준 손님을 맞으면서 시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손대지 않던 꽃길도 쓸어보고 모처럼 빗장 걸린 사립문도 활짝 열어젖힌다. 그새 손님 방문은커녕 자신도 바깥나들이를 않았나 보다. 변변찮은 안주와 해묵은 탁주..

상상 속의 은퇴[이준식의 한시 한 수]〈153〉

맛없는 술이라도 끓인 차보다 낫고, 거친 베옷이라도 없는 것보다 나으며, 못생긴 마누라, 못된 첩도 독수공방보단 낫지. 꼭두새벽 입궐 기다리며 신발에 서리 잔뜩 묻히느니, 삼복날 해 높이 솟도록 시원한 북쪽 창 아래 푹 자는 게 낫지. 화려한 의식으로 만인의 호송 받으며 북망산으로 가느니, 남루한 누더기 걸치고 홀로 앉아 아침 햇살 쬐는 게 낫지. 생전엔 부귀 누리고 죽어선 문장 남기려 하지만 백년도 한순간이요, 만년도 바삐 지나는 것을. 충절의 백이숙제(伯夷叔齊)든 대도 도척(盜척)이든 실패한 건 매한가지니, 차라리 지금 술에 취해 시비나 애환 다 잊는 게 낫지. 薄薄酒, 勝茶湯, 麤麤布, 勝無裳, 醜妻惡妾勝空房. 五更待漏靴滿霜, 不如三伏日高睡足北窓凉. 珠襦玉柙萬人相送歸北邙, 不如懸鶉百結獨坐負朝陽. 生..

봄바람의 경이[이준식의 한시 한 수]〈152〉

碧玉妝成一樹高 萬條垂下綠絲條 不知細葉誰裁出 二月春風似剪刀 옥으로 단장한 듯 미끈하게 솟은 나무 수만 가닥 드리운 푸른 비단실 가느다란 저 잎사귀 누가 재단했을까 가위와도 흡사한 2월 봄바람! ―‘버들의 노래(영류·詠柳)’ 하지장(賀知章·659∼744) 훤칠한 미녀의 형상으로 우뚝 선 버드나무. 줄줄이 드리워진 실버들의 야리야리한 가지 사이로 봄바람이 헤집고 들어온다. 바람의 자취 따라 가위로 마름질한 듯 파르라니 버들 이파리가 돋아난다. 자연의 손길에 감탄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버들잎의 파릇파릇한 떨림에 절로 탄성이 우러나는 봄바람의 영묘한 솜씨! 새 생명의 고운 자태를 빚어내는 봄바람의 경이 속에 새봄의 생기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바야흐로 봄꽃보다 한발 앞선 싱그러운 봄의 향연이 막을 올리고 있..

봄꽃을 기다리며[이준식의 한시 한 수]〈151〉

新年都未有芳華 신년도미유방화 二月初驚見草芽 이월초경견초아 白雪却嫌春色晩 백설각혐춘색만 故穿庭樹作飛花 고천정수작비화 새해 들어 여지껏 향긋한 꽃 없었는데 2월 되자 놀랍게도 풀싹이 눈에 든다 백설은 더딘 봄빛이 못마땅했던지 짐짓 꽃잎인 척 정원수 사이로 흩날린다 ―‘봄눈(춘설·春雪)’ 한유(韓愈·768∼824)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설렘을 담은 노래. 입춘 무렵이면 천지에 어름어름 봄기운이 스미지만 꽃향기를 맡기엔 이르다. 2월에 접어들자 여린 풀싹이 반갑게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풀싹이라면 봄의 전령으로 손색없으니 긴 겨울을 버텨온 이들에겐 뜻밖의 기쁨일 수밖에. 한데 봄의 더딘 발걸음이 불만스럽기는 백설도 마찬가지여서, ‘짐짓 꽃잎인 척’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봄을 재..

명필 왕희지[이준식의 한시 한 수]〈150〉

왕우군은 원래 맑고 진솔한 사람, 속세를 벗어난 듯 소탈하고 대범했지. 산음 땅에서 만난 어느 도사가, 거위 좋아하는 이분을 몹시도 반겨주었지. 흰 비단에 일필휘지 ‘도덕경’을 써내려가니, 정교하고 오묘한 그 필체는 입신의 경지. 글씨 써주고 얻은 거위를 조롱에 담아 떠날 때, 주인과는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지. 右軍本淸眞 瀟灑出風塵 山陰遇羽客 愛此好鵝賓 掃素寫道經 筆精妙入神 書罷籠鵝去 何曾別主人 ―‘왕우군(王右軍)’·이백(李白·701∼762) 왕우군은 곧 왕희지(王羲之),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과거시험 치를 때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체를 받아 일필휘지’했다고 묘사한 그 명필이다. 생전의 직함 우군장군(右軍將軍)에서 따온 호칭이다. 그는 거위를 무척 좋아했는데 희고 깨끗한 깃털을 고결한 선비의 표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