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조조의 노래[이준식의 한시 한 수]〈28〉

龜雖壽 / 曹操(거북이 장수한대도) 神龜雖壽 신구수수 猶有竟時 유유경시 謄蛇乘霧 등사승무 終爲土灰 종위토회 老驥伏櫪 노기복력 志在千里 지재천리 烈士暮年 열사모년 壯心不已 장심불이 . 盈縮之期 영축지기 不但在天 불단재천 養怡之福 양이지복 可得永年 가득영년 幸甚至哉 행심지재 歌以詠志 가이영지 신령한 거북이 장수한대도 언젠가는 죽을 날 있고 전설의 뱀이 안개 타고 올라도 결국엔 흙먼지 되리 늙은 천리마가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만은 천리를 내달리듯 열사는 말년이 되어도 그 웅지가 사라지지 않는 법 목숨이 길고 짧은 건 하늘에만 달린 게 아닐지니 심신의 평온을 기른다면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리라 아, 너무나 흥겨워 이 마음을 노래하네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섬세한 서정을 담는 여느 한시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낙조의 황홀경[이준식의 한시 한 수]〈27〉

登樂遊原 / 李商隱(낙유원에 올라) 向晩意不適 향만의부적 驅車登古原 구거등고원 夕陽無限好 석양무한호 只是近黃昏 지시근황혼 난해하기는커녕 단숨에 읽히는 경쾌함마저 담겨 있다.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 장안 부근의 옛 동산에 오른 시인, 잠시 낙조의 황홀경에 빠져 본다. 한데 시인의 진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황혼이 가까워지자 석양은 너무나 아름답다”는 찬탄을 발하려 했을까. 아니면 “황혼 때문에 사그라질 아름다운 석양이 안타깝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제4구의 ‘지시(只是)’ 두 글자가 갖는 多義性 때문에 이런 엉뚱한 반전이 생겼다. 그래도 후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국력이 강성했던 盛唐이 지나고 혼란의 中唐을 거쳐 눈앞에 다가온 만당 쇠퇴기, 시인은 스러져 가는 제국의 영화를 황혼에 비유하면서 시대적 상..

도연명의 소요[이준식의 한시 한 수]〈25〉

飮酒 / 陶淵明 結廬在人境 결려재인경 而無車馬喧 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 문군하능이 心遠地自偏 심원지자편 採菊東籬下 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山氣日夕佳 산기일석가 飛鳥相與還 비조상여환 此間有眞意 차간유진의 欲辨已忘言 욕변이망언 오두막집 마을 안에 짓고 살아도 시끄러운 수레 소리 들리지 않네 그대여 어찌하면 그리 돨 수 있소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땅도 절로 외진 법이라오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 따는데 남산이 그윽하게 눈앞에 펼쳐지네 산기운은 석양에 곱기만 하고 나는새 무리 지어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뜻이 들어 있음을 설명하려다 어느 새 말을 잊었네 사람 사는 마을에 수레나 말 따위의 소음이 없을 리 없다. 한데 세상 명리를 잊으니 市井의 거처조차 저절로 외진 세계가 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조차 멀어진..

백낙천의 세월[이준식의 한시 한 수]〈26〉

食後 / 白居易(식사를 마치고) 食罷一覺睡 식파일각수 起來兩甌茶 기래양구다 擧頭看日影 거두간일영 已復西南斜 이부서남사 樂人惜日促 낙인석일촉 憂人厭年賖 우인염년사 無憂無樂者 무우무락자 長短任生涯 장단임생애 식사 마치고 낮잠 한숨 깨어나선 차 두 사발 고개 들어 해를 보니 어느새 서남쪽으로 기울었다 즐겁게 사는 이는 짧은 해가 아쉽고 근심 많은 이는 더딘 세월이 싫겠지만 근심도 즐거움도 없는 나 길든 짧든 삶에 맡겨버리지 一覺睡: 한바탕 잠을 잠, 한숨 잠을 뜻한다. 甌: ‘사발 구’자이다. 已復: 이已는 ‘그칠 이’자로 ‘그치다, 이미, 물리치다, 매우’의 뜻이 있고 ‘회복할 복復’자는 해석하지 않는다. 賖: ‘외상으로 살 사’자로 ‘외상으로 사다, 멀다, 느리다, 사치하다’의 뜻이 있다. 生涯: 살아가는..

위선에 대한 일갈[이준식의 한시 한 수]〈24〉

飜着襪 / 王梵志(버선을 뒤집어 신다) 梵志翻着襪 범지번착말 人皆道是錯 인개도시착 乍可刺你眼 사가자니안 不可隱我脚 불가은아각 나 범지가 버선을 뒤집어 신으니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 말하네. 그대들 눈에는 거슬릴지언정 내 발을 다치게는 할 수 없다네 허울뿐일지라도 관습에 순응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리다. 눈치레하느라 웬만한 불편이나 불합리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미관을 따지고 남의 이목을 생각하다 보면 관습을 일탈하는 건 곧 예의나 상식에 반한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한데 시인은 세상의 논리를 과감히 허물고 버선을 뒤집어 신었다. 버선 안쪽은 실밥 자국 때문에 거칠고 때로 발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실속 없이 번드레한 겉치장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이 선언이 별스럽긴 해도 미욱스러워 보이진 않는..

야속한 달[이준식의 한시 한 수]〈23〉

望月懷遠 / 張九齡(달 보며 그리는 임) 海上生明月 해상생명월 天涯共此時 천애공차시 情人怨遙夜 정인원요야 竟夕起相思 경석기상사 滅燭憐光滿 멸촉련광만 披衣覺露滋 피의각로자 不堪盈手贈 불감영수증 還寢夢佳期 환침몽가기 바다 위에 떠오른 밝은 저 달을 아득히 멀리서도 같이 보리니 내 님도 긴긴 밤을 원망하면서 밤새도록 그리움에 잠 못 이루리 촛불 끄니 그 더욱 눈부신 달빛 어느새 옷에도 촉촉이 젖는 이슬 달빛 두 손 가득 못 드릴 바엔 꿈에서나 만나랴 잠들어 보리 竟夕: 하룻밤 동안 밤새도록. 佳期(가기): (애인을 처음 만나게 되는) 좋은 기회나 시기 하늘 끝 아득히 이별한 사이일지라도 서로 공유할 수 있다는 푸근한 연대감 때문에 달은 멀고도 가깝다. 우리 모두는 한낱 구경꾼의 시선으로 달을 바라보기 일쑤지만..

기와장이의 비애[이준식의 한시 한 수]〈22〉

陶者 / 梅堯臣(기와장이) 陶盡門前土 도진문전토 屋上無片瓦 옥상무편와 十指不沾泥 십지부첨니 鱗鱗居大廈 린린거대하 문 앞의 흙을 다 구웠어도 제 지붕엔 기와 한 조각 못 얹었네 열 손가락 진흙 한 번 묻히지 않고도 빼곡하니 기와 얹은 고대광실에 사는구나 농부, 어부, 織婦, 기녀, 병사 등의 애환이 한시의 모티프가 된 예는 적지 않지만 이 시는 드물게 기와장이를 등장시켰다. 고래등 기와집을 보면서 양손 가득 진흙투성이인 기와장이를 떠올린 발상이 독특하다. 대놓고 쏟아낸 불만이어서 시적 여운이나 풍자시 특유의 은근한 맛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대부의 입장에서 기와장이의 辛苦에 이 정도의 감정이입이 가능했다면 시인의 곰살가운 인간미는 일단 인정할 만하다. “온몸에 비단옷 걸친 자, 하나같이 누에 치는 ..

느긋함의 역설[이준식의 한시 한 수]〈21〉

江村 / 杜甫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自去自來堂上燕 자거자래당상연 相親相近水中鷗 상친상근수중구 老妻畵紙爲碁局 노처화지위기국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但有故人供祿米 단우고인공녹미 徵軀此外更何求 징구차외경하구 맑은 강 한 굽이 마을 끼고 흐르고 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느긋하다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대들보 위의 제비 서로 사이좋은 물 위의 갈매기들 늙은 아내는 종이에다 바둑판 줄을 긋고 어린 자식은 바늘 두들겨 낚싯바늘 만드네 봉급 받아 쌀 대주는 친구 있으면 그만 하찮은 몸이 이것 말고 무얼 더 바라리 만사란 게 대단할 것도 없다. 제비와 갈매기의 정겨운 모습, 아내와 자식의 여유로운 몸짓을 지켜보는 소소함이 전부다. 하지만 이 느긋함조차 양식 대주는 친구 덕분이라는 대목..

한더위보다 버거운 관직 [이준식의 한시 한 수]〈20〉

銷夏詩 / 袁枚(더위를 식히며) 不著衣冠 近半年 불착의관 근반년 水雲深處 抱花眠 수운심처 포화면 平生自想 無冠樂 평생자상 무관락 第一驕人 六月天 제일교인 유월천 의관 안 챙긴 지 근 반년 물과 구름 그윽한 곳에서 꽃을 안고 잠드네 평생 간직했던 벼슬 없는 즐거움 유월 한더위에도 세상없이 통쾌하다 ※이 6월에 나보다 나은 사람 누가 있으랴! 銷 소 ; 사라지다, 녹이다, 쇠하다, 흩어지다, 다하다 袁 원 ; 옷이 긴 모양 枚 매 ; 줄기, 낱개, 채찍 ‘옷을 벗는다’는 건 자유이면서 동시에 엄혹한 현실에의 도전이다. 무모한 객기로 끝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삶의 한 혁명이 되기도 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영욕이 서로 얽히고설키기 마련. 匹夫匹婦가 얼핏얼핏 옷을 벗고 싶은 유혹에 이끌리면서도 선뜻 결행하지 못하..

낙원 향한 절규[이준식의 한시 한 수]〈19〉

碩鼠 / 魏風(큰 쥐) 碩鼠碩鼠 석서석서 無食我黍 무식아서 三歲貫女 삼세관여 莫我肯顧 막아긍고 逝將去女 서장거여 適彼樂土 적피락토 樂土樂土 락토락토 爰得我所 원득아소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 먹지 마라 삼 년 너를 섬겼거늘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내 장차 너를 떠나 저 낙원으로 가리라 낙원이여 낙원이여 내 거기서 편히 쉬리라 동서고금을 통해 도무지 인간과 친해지기 어려운 동물 쥐. 시에는 큰 쥐가 등장했고 화자는 그놈을 3년씩이나 섬겨 왔다고 말한다. 3은 ‘오래’ 혹은 ‘자주’를 뜻한다. ‘ 큰 쥐가 내 기장을 먹는’ 행위는 지배층의 가렴주구를 겨냥한 직설이다. 원시 민요답게 문학적 기교 대신 절박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다. 섬김이 배신당하고 반항이 무기력하다고 느꼈을 때 그 유일한 대안은 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