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백거이의 제야(除夜)[이준식의 한시 한 수]〈38〉

除夜 / 白居易(섣달 그믐날 밤에) 歲暮紛多思 세모분다사 天涯渺未歸 천애묘미귀 老添新甲子 노첨신갑자 病減舊容輝 병감구용휘 鄕國仍留念 향국잉류념 功名已息機 공명이식기 明朝四十九 명조사십구 應轉悟前非 응전오전비 연말이라 온갖 상념 몰려드는데 아득히 먼 고향은 돌아갈 수 없네 늘그막에 나이는 또 한 살 늘고 병 때문에 가뭇없이 사라진 옛 모습 언제나 그리운 건 고향 땅 더 이상 헛된 공명은 좇지 않을 터 내일이면 벌써 마흔아홉 지난날의 잘못이나 반성해 보리 除夜 : 섣달 그믐날 밤, 그 해의 마지막 날 밤. 歲暮 : 그해가 저무는 때, 세 밑. 天涯 : 하늘 끝, 먼 邊方, 아득히 떨어진 他鄕. 鄕國 : 고국 또는 故鄕. 明朝 : 내일 아침. 前非 : 지난 잘못. 가면 그것으로 끝인 섣달 그믐날, 오면 언제나..

대자보[이준식의 한시 한 수]〈37〉

自悼 / 薛令之(혼자 슬퍼하다) 朝日上團團 照見先生盤 盤中何所有 苜蓿長欄干 飯澁匙難綰 羹稀箸易寬 只可謀朝夕 何由保歲寒 아침 해 둥글게 떠올라 선비의 밥상을 비춘다 밥상에 무엇이 올랐나 목숙 나물만 가득하구나 밥은 까칠하여 숟가락에 걸리지 않고 국은 희멀거니 젓가락이 놓치기 십상 잠깐이야 이렇게 살 수 있지만 어떻게 추운 연말을 버텨 내리오 밥상에 어른거리는 아침 햇살, 반찬은 온통 목숙 따위의 나물 일색이다. 목숙은 나물로도 먹지만 주로 거름이나 가축 먹이로 썼다. 밥은 거칠고 국은 희멀겋다. 이런 궁핍한 삶을 견디자니 참으로 암담하다. 가난한 선비의 밥상머리 탄식 같지만 당시 시인은 左補闕 겸 侍讀, 태자를 교육하거나 황제와 학문을 논하는 7품 관리였다. 그 정도 관리의 밥상이 이토록 초라할 만큼 국가..

여인의 절개[이준식의 한시 한 수]〈36〉

節婦吟 / 張籍(절부의 노래) 君知妾有夫 군지첩유부 贈妾雙明珠 증첩쌍명주 感君纏綿意 감군전면의 繫在紅羅襦 계재홍라유 妾家高樓連苑起 첩가고루연원기 良人執戟明光裏 양인집극명광리 知君用心如日月 지군용심여일월 事夫誓擬同生死 사부서의동생사 還君明珠雙淚垂 환군명주쌍루수 何不相逢未嫁時 하부상봉미가시 제게 남편이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그댄 고운 구슬 한 쌍을 선물하셨지요 애틋한 그대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걸 붉은 비단 저고리에 달았지요 높다란 저의 집엔 정원이 딸려 있고 남편은 대궐에서 황제를 모신답니다 그대 마음 일월처럼 순수한 줄 알지만 남편과 생사를 함께하자 약속한 터 그대에게 구슬 돌려주며 흘리는 이 눈물 결혼 전에 못 만난 게 한스럽네요 도발적인 여심(女心)이 아슬아슬하다. 절부(節婦·절개가 굳은 여자)라지만 ..

포청천의 유훈[이준식의 한시 한 수]〈35〉

書端州郡齋壁 / 包拯(단주 태수 관아의 벽에 쓰다) 清心爲治本 청심위치본 直道是身謀 직도시신모 秀幹終成棟 수간종성동 精鋼不作鉤 정강불작구 倉充鼠雀喜 창충서작희 草盡兔狐愁 초진토호수 史册有遺訓 사책유유운 毋貽來者羞 무이래자수 청렴은 통치의 기본 정직은 내 삶의 방책 좋은 나무는 결국 동량이 되고 좋은 강철은 굽지 않는 법 창고가 차면 쥐 참새가 기뻐하고 풀이 없어지면 토끼 여우는 수심이 가득 역사책에 남겨진 교훈 후세에 수치를 남기진 말라 드라마 속 판관 包靑天으로 더 유명한 포증은 송대 淸白吏의 표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시는 자기 다짐이자 일장 훈시 같은 메시지를 담았으니 시적 운치에 앞서 근엄한 경고문처럼 읽힌다. 삶의 도리나 지혜를 유독 강조했던 송시 특유의 설교식 논조가 맨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도연명의 자식 유감[이준식의 한시 한 수]〈34〉

責子/ 陶潛(자식 책망) 白髮被兩鬢 백발피량빈 肌膚不復實 기부불부실 雖有五男兒 수유오남아 總不好紙筆 총부호지필 阿舒已二八 아서이이팔 懶惰故無匹 나타고무필 阿宣行志學 아선행지학 而不愛文術 이불애문술 雍端年十三 옹단년십삼 不識六與七 불식육여칠 通子垂九齡 통자수구령 但覓梨與栗 단멱리여율 天運苟如此 천운구여차 且進盃中物 차진배중물 백발은 양쪽 귀밑머리를 덮었고 피부도 이젠 까칠해졌다 아들 다섯을 두었지만 하나같이 종이와 붓을 싫어한다 舒는 벌써 열여섯 게으르기 짝이 없고 宣은 곧 열다섯 도무지 글공부를 싫어하며 雍과 端은 열셋이지만 여섯과 일곱조차 분간 못하고 通은 아홉 살 다 되도록 배와 밤만 찾고 있다 내 운수가 이러할진대 그저 술이나 들이켤밖에 쌀 다섯 말 祿俸 때문에 굽신거리지 않겠다고 진작 관직을 내던..

가을 저녁의 운치[이준식의 한시 한 수]〈33〉

山居秋暝 / 王維(산장의 가을 저녁) 空山新雨後 공산신우후 天氣晩來秋 천기만래추 明月松間照 명월송간조 淸泉石上流 청천석상류 竹喧歸浣女 죽훤귀완녀 蓮動下漁舟 연동하어주 隨意春芳歇 수의춘방헐 王孫自可留 왕손자가류 無欲 혹은 物我一體의 경지에서 혼연히 자연 속에 몰입되었다는 토로일 터다. 자기 존재나 모든 행위마저 자연의 일부로 끌어들였을 때나 가능할 법한 발상이다. 심경이 그러하니 설령 꽃이 다 져버렸다 해도 마냥 산속에 머물 수 있다. 가을 기운이 완연한데 느닷없이 봄꽃 타령이라니, 다소 뜬금없다 싶기도 하지만 시인이 즐기는 자연의 멋이 俗人의 그것과는 결이 다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겠다. 王孫은 귀족 자제 혹은 은둔자라는 의미인데 이 비유 속에는 자신을 자연의 섭리와 空寂에 고스란히 맡겼다는 자긍심 같은..

마흔여섯의 과거 급제[이준식의 한시 한 수]〈32〉

登科後 / 孟郊(급제 후) 昔日齷齪不足諺 석일악착부족언 今朝放蕩思無涯 금조방탕사무애 春風得意馬蹄跌 춘풍득의마제질 一日看盡長安花 일일간진장안화 지난날 아등바등 살았던 걸 자랑할 건 없고 이제야 자유분방한 심사 거칠 게 하나 없네 의기양양 봄바람 속을 말 타고 내달리며 하루 새에 장안의 꽃을 다 돌아본다네 과거 급제 직후 주체할 길 없이 달뜬 환희가 시구 도처에 넘쳐난다. 당시 시인의 나이는 마흔여섯. 결코 이르다고 할 수 없지만 진사과는 쉰 살에 급제해도 젊은 셈이라는 말이 나돌던 시절이니 그 벅찬 감회가 오죽했으랴. 두 차례나 낙방의 고배를 마신 시인이지만 더 이상 지난날의 고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는 않다. 장안의 봄기운을 만끽하며 의기양양 말을 몰아 내달리듯 이젠 거침없이 내 기개를 떨쳐보..

소동파의 아들 교육[이준식의 한시 한 수]〈31〉

洗兒戱作 / 蘇軾(아들 잔칫날에 장난삼아 짓다) 人皆養子望聰明 인개양자망총명 我被聰明誤一生 아피총명오일생 惟願孩兒愚且魯 유원해아우차노 無災無難到公卿 무재무난도공경 남들은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나 자신은 총명한 탓에 일생을 그르쳤나니 아이가 어리석고 아둔하다 해도 그저 탈 없고 걱정 없이 공경대부에 올랐으면 소동파는 재능이 출중했지만 강직한 성품에 소신껏 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바람에 관료 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정쟁의 와중에서 사형의 위기까지 맞았지만 멀리 후베이(湖北)성 황저우(黃州)로 좌천되면서 목숨만은 부지했다. 그곳에서 얻은 아들이 넷째 소둔(蘇遁). 아기 출생 만 한 달이 되는 날, 풍습에 따라 배냇머리를 깎고 목욕시키는 세아회(洗兒會) 잔치 자리에서 이 시를 읊었다. 자식이 총명..

가을 부채[이준식의 한시 한 수]〈30〉

怨歌行 / 班捷妤원망의 노래) 新裂齊紈素 신렬제환소 皎潔如霜雪 교결여상설 裁爲合歡扇 재위합환선 團圓似明月 단원사명월 出入君懷袖 출입군회수 動搖微風發 동요미풍발 常恐秋節至 상공추절지 凉飇奪炎熱 양표탈염열 棄捐篋笥中 기연협사중 恩情中道絶 은정중도절 갓 잘라낸 제(齊) 지방의 흰 비단 눈서리처럼 희고 고왔지요 마름질로 합환 문양 부채를 만드니 둥그러니 명월과 같았지요 그대 품속이나 소매를 들락이면서 살랑살랑 미풍을 일으켰지요 가을 닥쳐와 찬바람이 무더위를 앗아갈까 마냥 불안했는데 상자 속으로 부채가 버려지면서 임의 사랑도 그만 사그라졌지요 부채는 가을 찬바람과 함께 용도 폐기되는 게 필연이자 숙명이다. 제아무리 예뻐도 여름날처럼 매양 품속이나 소매에 감추어 둘 수는 없다. 합환(合歡)은 서로 대칭되는 문양을 ..

신부의 눈썹 색깔[이준식의 한시 한 수]〈29〉

閨意獻張水部 / 朱慶餘(신부의 심정으로 장수부에게 드린다) 洞房昨夜停紅燭 동방작야정홍촉 待曉堂前拜舅姑 대효당전배구고 妝罷低聲問夫婿 장파저성문부서 畫眉深淺入時無 화미심천입시무 신방엔 어젯밤 촛불 붉게 타올랐고 새벽이면 안방으로 시부모께 인사갈 참 화장 마치고 나직이 신랑에게 묻는 말 제가 그린 눈썹 색깔이 유행에 맞을까요 신혼 첫 밤을 꼬박 지새운 신부는 새벽을 기다리며 시부모에게 인사드리러 갈 참이다 눈썹 화장 하나까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은근슬쩍 남편에게 눈썹 색깔의 濃淡을 물어본다 언뜻 보면 이 시는 수줍은 신부의 애교 섞인 사랑 노래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시 속 대화는 신혼부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시인은 당시 과거시험을 앞둔 선비였고 시를 받은 상대는 水部郎中을 지내던 張籍이었으니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