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627] 사청사우 (乍晴乍雨)

[정민의 世說新語] [627] 사청사우 (乍晴乍雨)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조선 초 문인, 학자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초상. 수양대군의 단종 왕위 찬탈에 반발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은둔하다 승려가 되었다. 보물 제1497호. /문화재청 세상일이 참 뜻 같지 않다. 그때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는 피곤하고, 무심한 체 넘기자니 가슴에 남는 것이 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잠깐 갰다 금세 비 오고(乍晴乍雨)’에서 노래한다. “잠깐 갰다 비가 오고 비 오다간 다시 개니, 하늘 도리 이러한데 세상의 인정이랴. 칭찬하다 어느새 도로 나를 비방하고, 이름을 피한다며 외려 명예 구한다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봄과 무슨 상관이며, ..

[정민의 世說新語] [626] 불삼숙상 (不三宿桑)

[정민의 世說新語] [626] 불삼숙상 (不三宿桑)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이상호 시인의 새 시집 ‘국수로 수국 꽃 피우기’를 읽다가 ‘감나무의 물관을 자르시다’에서 마음이 멈췄다. “가을에 감을 따내신 우리 아버지 / 감나무에 더는 물이 오르지 않게/ 밑동에 뱅 둘러 물관을 자르셨다.// 더는 감나무에 오르지 못하겠다고/ 목줄을 끊기로 작정하셨던가 보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집을 지키던 감나무에 생긴/ 톱날 자국에 잘려 나는 아득해졌다.// 아들이 내려와 살지 않으리라 내다보신/ 아버지를 읽고 감나무처럼 숨이 턱 막혔다.” 90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어느 날 문득 감나무에 더는 오르지 못하겠다고 감나무 밑동에 돌려가며 톱질을 했다. ..

[정민의 世說新語] [625] 행불리영 (行不履影)

[정민의 世說新語] [625] 행불리영 (行不履影)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대학 시절 한 동기생의 말투나 기억은 자꾸 희미해지는데, 그가 방정하게 큰절을 올리던 모습은 새록새록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절을 저렇게 반듯하게 잘할까? 고향이 대전인 그 친구의 절로 인해 대전 사람들은 예의가 반듯하다는 인상이 내게 심어졌을 정도다. 그 뒤 어디서건 큰절을 올릴 때마다 그가 절 올리던 모습을 의식했던 것 같다. 최원오 신부가 번역한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334~397)의 ‘성직자의 의무'를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이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동작과 몸짓과 걸음걸이에서도 염치를 차려야 합니다. 정신 상태는 몸의 자세에서 식별됩니다. 몸동작은 영혼의 소리입..

[정민의 世說新語] [624] 빈환주인 (頻喚主人)

[정민의 世說新語] [624] 빈환주인 (頻喚主人)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이종수 교수가 번역해 출간한 월봉(月峯) 책헌(策憲·1623~?) 스님의 ‘월봉집(月峯集)’을 읽는데, 주인공(主人公)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주인공은 원래 불가에서 자신의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내가 내 몸의 주인공이 못 되면, 육체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허깨비 인생이 되고 만다 .사람은 마음 간수를 잘해야 한다. ‘응 판사에게 보임(示膺判事)’은 이렇다. “스님께서 불법에 투철하지 못하다면, 정좌하여 자주자주 주인공을 부르시오. 면목이 분명하여 해와 달과 같아져야, 육문(六門)이 늘 드러나 몸 떠나지 않으리니(尊師若未透玄津, 靜坐頻頻喚主人. 面目分明如日月, 六門常現不離身).” 시의..

[정민의 世說新語] [623] 녹동백이 (綠瞳白耳)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원본은 추사 김정희의‘세한도’를 소장했던 일본 후지즈카 교수가 가지고 있다가 일제 말기 도쿄 공습 때 소실됐고, 사진만 남았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눈동자는 초록빛을 띠었던 모양이다. ‘소전(小傳)’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사람됨은 물소 이마에 칼 눈썹, 초록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 고고한 사람만 가려서 더욱 친하였고, 부귀한 자를 보면 더욱 멀리하였다. 그래서 세상과 합치됨이 적었고 늘 가난하였다.(其爲人也, 犀額刀眉, 綠瞳而白耳. 擇孤高而愈親, 望繁華而愈疎. 故寡合而常貧.)” 넓은 이마에 날카로운 눈썹은 시원스럽되 타협하지 않는 불같은 성정을 보여준다. ..

[정민의 世說新語] [622] 다창파수 (茶槍破愁)

[정민의 世說新語] [622] 다창파수 (茶槍破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지난 주말 ‘한국의 다서’ 작업을 나와 함께 한 유동훈 선생이 연구실에 와서, 갓 나온 하동 첫 우전차(雨前茶)를 우려내 준다. 해차 향에 입안이 온통 환하다. 이 맛은 표현이 참 어렵다. 비릿한 듯 상큼한 생기가 식도를 따라 도미노 넘어가듯 퍼진다. 돌돌 말린 첫 잎은 생김새가 뾰족한 창과 같다 해서 다창(茶槍)이다. 여기에 두 번째 잎이 사르르 풀려 깃발처럼 내걸리면 그것이 일창일기(一槍一旗)다. 그 잎을 채취해 우전차를 만든다. 우전은 이렇게 창 끝에 깃발 하나 또는 둘을 달고 달려온다. 찬 겨울의 눈보라를 견디고, 자옥한 새벽 안개에 잠겨 차곡차곡 한 켜 한 켜 농축한 천지의..

[정민의 世說新語] [621] 마이동풍 (馬耳東風)

[정민의 世說新語] [621] 마이동풍 (馬耳東風)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마이동풍(馬耳東風)은 봄바람이 말의 귀를 스쳐도 반응이 없다는 뜻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 하늘이 높아지면 말이 살찐다고 한 걸 보면, 말은 아무래도 봄보다는 가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백(李白)은 ‘답왕십이(答王十二)’에서 “북창에서 시를 읊고 부(賦)를 지어도, 만 마디 말 물 한 잔의 값도 쳐 주질 않네. 세상 사람 이 말 듣곤 모두 고갤 저으리니, 봄바람이 말의 귀에 부는 것과 같구나(吟詩作賦北窗裏, 萬言不直一杯水. 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라고 자조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화류마는 움츠려서 능히 먹질 못하고, 저는 나귀 뜻을 얻어 봄바람에 우누나(驊騮拳跼不能食,..

[정민의 世說新語] [620] 미음완보 (微吟緩步))

[정민의 世說新語] [620] 미음완보 (微吟緩步))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입력 2021.04.29 03:00 | 수정 2021.04.29 03:00 김나영 시인의 새 시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를 읽다가 시 ‘로마로 가는 길'에 눈이 멎는다. “천천히 제발 좀 처언처어어니 가자고 이 청맹과니야. 너는 속도의 한 가지 사용법밖에는 배우질 못했구나. 여태 속도에 다쳐 봤으면서 속도에 미쳐 봤으면서, 일찍 도착하면 일찍 실망할 뿐….” 정미조씨의 신곡 ‘시시한 이야기'를 다시 포개 읽는다. “앞서 가는 사람들 여러분, 뒤에 오는 사람들 여러분. 어딜 그리 바삐들 가시나요. 이길 끝엔 아무것 없어요, 앞서 가도 별 볼 일 없어요, 뒤에 가도 아무 일 없는 걸..

[정민의 世說新語] [619] 순사고언 (詢事考言)

[정민의 世說新語] [619] 순사고언 (詢事考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입력 2021.04.22 03:00 | 수정 2021.04.22 03:00 1728년 12월 7일, 숭문당(崇文堂)에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등이 영조를 모시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했다. 이날의 주제는 ‘변인재(辨人才)’ 즉 ‘성현이 인재를 살피는 방법(聖賢觀人之法)’에 관한 내용이었다. 본문을 읽은 뒤 시독관(侍讀官) 김상성(金尙星)이 말했다. “요순 시절에는 네, 아니오의 사이에도 절로 옳고 그름의 뜻이 있었습니다. 아랫사람의 말이라도 옳으면 네라고 했고, 윗사람의 말이라도 그르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옳으면 네라 하고 그르면 아니라 하여, 아첨하여 빌붙어 따르는..

[정민의 世說新語] [618] 신진대사(新陳代謝)

[정민의 世說新語] [618] 신진대사(新陳代謝)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입력 2021.04.15 03:00 | 수정 2021.04.15 03:00 신진대사(新陳代謝)의 ‘진(陳)’은 해묵어 진부(陳腐)하다는 뜻이다. 신(新)은 ‘renewal’로, 신진은 진부한 묵은 것을 새것으로 바꾼다는 의미다. 사(謝)는 ‘시들다’ ‘떨어진다’이고, 대(代)는 ‘replace’이니, 대사는 시든 것을 싱싱한 것과 대체한다는 뜻이다. 묵은 것을 새것과 교체하고, 시든 것을 신선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신진대사다. 신체는 신진대사가 원활해야 건강하고, 조직은 신진대사가 순조로워야 잘 돌아간다. 묵은 것이 굳어 피가 도는 길을 막으면 혈전이 된다. 막히다 어느 순간 터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