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636] 심상자분 (心上自分)

[정민의 世說新語] [636] 심상자분 (心上自分)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C%A0%95%EB%AF%BC%EC%9D%98%20%E4%B8%96%E8%AA%AA%E6%96%B0%E8%AA%9E www.chosun.com 입력 2021.08.19 03:00 추사의 ‘정게증초의사'를 검여 유희강이 쓴 '완당정게(阮堂靜偈)', 1965년, 64×43㎝. /성균관대 박물관 몸은 일이 없는데 마음이 자꾸 분답하다. 작은 일에도 생각이 들끓어 쉬 가라앉지 않는다. 벽에 써붙여 둔 주자의 ‘반일정좌(半日靜坐), 반일독서(半日讀書)’의 구절이 부끄럽다. 추사가 벗 초의 스님에게 써준 ‘정게(靜偈)’가 생각나 읽어본다. “네 마음 고요할 땐 저자라..

[정민의 世說新語] [635] 유희임천 (惟喜任天)

[정민의 世說新語] [635] 유희임천 (惟喜任天)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C%A0%95%EB%AF%BC%EC%9D%98%20%E4%B8%96%E8%AA%AA%E6%96%B0%E8%AA%9E www.chosun.com 입력 2021.08.12 03:00 새벽 산책 길에서 신석정 시인의 ‘대바람 소리’를 여러 날 외웠다.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屛風)의 낙지론(樂志論)..

[정민의 世說新語] [634] 당관삼사 (當官三事)

[정민의 世說新語] [634] 당관삼사 (當官三事)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C%A0%95%EB%AF%BC%EC%9D%98%20%E4%B8%96%E8%AA%AA%E6%96%B0%E8%AA%9E www.chosun.com 입력 2021.08.05 03:00 조선 성종(成宗), 성종어필선면첩(成宗御筆扇面帖), 세로 26.3㎝, 가로 17.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국고전번역원의 소식지 ‘고전사계’의 표지를 보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9대 성종 임금께서 부채에 쓴 어필(御筆)이 실려 있다. 7도막의 짤막한 경구를 써 놓았는데, 둘째 구절에 눈길이 갔다. 내용은 이렇다. “벼슬에 임하는 방법은 다만 세 가지 일이 있다. 청렴함과 삼..

[정민의 世說新語] [633] 수처작주 (隨處作主)

1991년 무렵 서옹스님(왼쪽)과 그의 글씨 '수처작주(隨處作主). /조선일보 DB 열흘 전 폭염 속에 초의차(草衣茶)의 자취를 더듬어 남도 답사를 다녀왔다. 초의 스님이 머리를 깎은 나주 운흥사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인적 하나 없는 적막 속이었다. 다시 초의차의 전통으로 떡차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은 불회사(佛會寺)로 갔다. 오랜만에 들른 불회사에서 정연(淨然) 큰스님의 소식을 물으니, 덕룡산 꼭대기 일봉암(日封菴)에서 혼자 지내신다는 말씀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가 10년 만에 인사를 나누고 스님이 끓여주시는 불회사 떡차를 마셨다. 벽에 걸린 서옹(西翁) 스님의 글씨 때문에 어느덧 화제가 옮아가, 서옹 스님이 생전에 즐겨 쓰신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두고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대구가 되는 바깥 짝은..

[정민의 世說新語] [632] 경경위사 (經經緯史)

[정민의 世說新語] [632] 경경위사 (經經緯史)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추사 김정희의 편액 글씨, 경경위사(經經緯史). 간송미술관 소장. 추사 김정희의 글씨 중에 ‘경경위사(經經緯史)’가 있다. 경(經)은 날줄, 위(緯)는 씨줄이니, 날줄을 세로로 걸고 씨줄이 가로로 오가며 한 필의 베를 짠다. 그러니까 경경위사란 말은 경경(經經), 즉 경전(經傳)을 날줄로 걸고, 위사(緯史) 곧 역사책을 씨줄로 매긴다는 뜻이다. 경도와 위도를 알아야 한 지점을 정확히 표시할 수가 있듯, 경전 공부로 중심축을 걸고 나서 여기에 역사 공부를 얹어야 바른 판단을 세워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이 말은 예전에 독서의 차례를 말할 때 늘 하던 말이다. 임헌회(任憲晦, 1811~1876)는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경전을 먼..

[정민의 世說新語] [631] 망서지방 (忘暑之方)

올해는 장마와 폭염이 함께 올 모양이다. 코로나19까지 폭발적 증가세다. 그 와중에 무책임한 행동이 불쾌지수를 높인다. 다산은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20수 연작에서 인생사 답답하고 짜증 나는 장면을 한 방에 날려줄 통쾌한 광경을 나열했다. 그중 무더위에 관한 것만 두 편이다. “한 달 넘게 찌는 장마 퀴퀴한 내 쌓여 있고, 사지에 힘 쪽 빠져서 아침저녁 보낸다네. 새 가을 푸른 하늘 맑고도 드넓은데, 툭 트인 끝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없구나.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跨月蒸淋積穢氛, 四肢無力度朝曛. 新秋碧落澄寥廓, 端軒都無一點雲. 不亦快哉).” 습기 먹은 벽지에 곰팡이가 올라오고, 온몸은 나른해서 꼼짝도 하기 싫다. 입추도 지났겠다. 저 매미 소리가 물러가면 벽공(碧空)의 가을 하늘이 열리겠지. 바..

[정민의 世說新語] [630] 일각장단 (一脚長短)

[정민의 世說新語] [630] 일각장단 (一脚長短)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말에도 품격이 있다. 표현에 따라 같은 말도 달리 들린다. 한 젊은이가 어떤 사람이 다리 하나가 짧다고 말하자, 홍석주(洪奭周)가 나무랐다. “어째서 다리 하나가 더 길다고 말하지 않느냐? 길다고 말하면 짧은 것이 절로 드러나니 실은 같은 말이다. 말을 할 때 긴 것을 들고 짧은 것은 말하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입의 덕[口德]이다. 남을 살피거나 일을 논의할 때는 진실로 길고 짧음을 잘 구분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자기의 장점을 자랑하고 남의 단점을 드러낸다면 군자의 충후한 도리가 아니다.” ‘학강산필(鶴岡散筆)’에 나온다. 박지원이 ‘사소전(士小典)’에서 말했다. “..

[정민의 世說新語] [629] 사유오장(仕有五瘴)

[정민의 世說新語] [629] 사유오장(仕有五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북송 때 매지(梅摯·994~1059)가 소주(韶州) 자사로 있으면서 ‘장설(瘴說)’을 지었다. ‘장(瘴)’은 남방의 풍토병을 일컫는 말이다. 글에서 그는 지방관의 다섯 가지 풍토병(仕有五瘴)에 대해 말했다. 첫째는 조부(租賦) 즉 세금 거두기의 병통이다. 다급하게 재촉하고 사납게 거둬들여, 아랫사람에게서 착취하여 윗사람에게 가져다 바친다(急催暴斂.剝下奉上). 윗사람은 밑에서 바치는 양의 많고 적음에 따라 능력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 잠깐이다. 둘째는 형옥(刑獄)의 병통, 법 집행이 공정치 않아 생기는 문제다. 무슨 말인지 모를 법조문을 멋대로 들이대 선악을..

[정민의 世說新語] [547] 객기사패 (客氣事敗)

[정민의 世說新語] [547] 객기사패 (客氣事敗)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객기(客氣)는 ‘객쩍게 부리는 혈기(血氣)나 용기’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겸양의 뜻으로 쓴다. 객기를 부린다는 말은 헛기운을 부려 고집을 피우는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객기의 반대말은 진기(眞氣)나 정기(正氣)다.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상헌수필(橡軒隨筆)에서 “객기란 것은 진기의 밖에 있는, 일종의 떠다니는 마음이나 습기(習氣)이다 (客氣者, 眞氣之外, 一種浮念及習氣也)”라고 했다. 주자가 “진정한 대영웅은 모두 전전긍긍(戰戰兢兢)에서 만들어진다 (眞正大英雄, 皆從戰兢做出)”고 했는데, 이 또한 객기를 경계한 말이다.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안득장자언(安得長者言)에서 말한다. "의..

[정민의 世說新語] [628] 사사무은 (事師無隱)

[정민의 世說新語] [628] 사사무은 (事師無隱)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퇴계 이래 남인들의 공부법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열린 토론의 자세랄까? 권위를 존중하되 권위에 끌려다니지 않았다. 질문과 비판에 늘 열려 있었다. 성호 학파의 학통에도 이 토론의 정신은 모든 학문 활동의 근저에서 생생하게 작동했다. 남의 얘기를 듣고 풀이하는 데 멈추지 않고, 거기에 내 안목이 실려야 비로소 내 해석이 나온다. 그러자면 자득(自得)이 있어야 하고, 자득은 회의(懷疑)와 의심에서 비롯된다. 정말 그럴까? 이렇게 볼 수는 없나? 회의가 의문을 만들고, 의문이 질문으로 발전해 마침내 깨달음으로 점화되어야 한다. 기성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면 내 뜻이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