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4> 高祖와 陸賈

- 높을 고(高-0)할아비 조(示-5)뭍 륙(阜-8) 값 가(貝-6) 陸賈(육가)가 漢(한) 高祖(고조) 劉邦(유방) 앞에 나아가 말할 때마다 '詩經(시경)'과 '尙書(상서)'를 들먹이자, 고조가 꾸짖듯이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시경'이나 '상서' 따위를 섬기겠소?" 그러자 육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기는 했으나,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저 商(상) 왕조를 일으킨 湯王(탕왕)과 周(주) 왕조를 일으킨 武王(무왕)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이치를 따라 천하를 지켰습니다. 文武(문무)를 아울러 쓰는 것이 나라를 길이 보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옛날 吳(오)나라 왕 夫差(부차)와 晉(진)나라의 智伯(지백)은 무력만 지나치게 쓰다가 망했..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 修身이 아닌 治國

- 닦을 수(人 - 8)몸 신(身 - 0)다스릴 치(水 - 5)나라 국(口 - 8) 朱熹(주희)는 大學(대학)을 "大人(대인)의 學問(학문)"으로 풀이한다. 대학이 대인의 학문이라면, 小人(소인)의 학문도 있을 법하다. 그게 小學(소학)이다. '소학'이라는 책도 있다. 그런데 '소학'은 '예기'가 편찬될 때 있었던 책이 아니다. 주희가 지시하여 그 제자 劉子澄(유자징)이 편찬한 책이다. '소학'은 유교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도덕규범을 아동에게 가르치기 위해 갖가지 經典(경전)들과 書冊(서책)들에서 긴요한 내용들을 가려 뽑아 완성한 것이다. 흔히 소학의 공부를 간단하게 '灑掃應對(쇄소응대)'라고 하는데, 쇄는 물 뿌리는 일을, 소는 마당 쓰는 일을, 응대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어른이 부를 때 대답하는 것을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 三禮와 '禮記'

- 석 삼(一 - 2)예 례(示 - 13)적을 기(言 - 3) 늘그막에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부몽견주공!) "너무나 내가 약해졌구나! 꿈에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한 게 이리도 오래되었으니!"라는 뜻이다. 공자가 얼마나 周公(주공)을 그리워하며 본받으려 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주공은 商(상) 왕조를 무너뜨리고 周(주, 기원전 1145∼기원전 256) 왕조를 일으킨 武王(무왕)의 아우로서, 바뀐 왕조의 토대가 될 문물과 제도를 정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공자가 강조한 仁(인)과 禮樂(예악)도 주공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공자 스스로 "이어서 전하되 짓지 않았다"는 '述而不作'(술이부작)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공자가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 大學과 四書

- 클 대(大 - 0)배울 학(子 - 13)넉 사(口 - 2)쓸 서(曰 - 6) 고전으로서 '大學(대학)'은 四書(사서)라는 명칭과 관련이 깊다. 사서는 '論語(논어)' '孟子(맹자)' '中庸(중용)' '대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넷은 유학이 사상적으로 한 차례 대대적인 혁신을 꾀하여 이른바 性理學(성리학), 朱子學(주자학), 理學(이학) 따위로 일컬어지는 新儒學(신유학)이 등장하면서 유교의 핵심 경전이 되었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南宋(남송, 1127∼1279) 시대로 볼 수 있다. 주자학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특히 朱熹(주희, 1130∼1200)가 주석을 단 四書集註(사서집주)를 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주희는 '讀大學法(독대학법)'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논어'와 '맹자'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