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43

미국 움직여 1차대전 참전시키고… 이스라엘 세울 땅 80%를 샀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22]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하] 세계가 그들 손에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궁전 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 여름별장 -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의 전쟁통에 한발 앞선 정보력으로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후 유럽 각국의 공채 발행을 맡으면서 국제 채권시장을 창출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영국 버킹엄셔의 워데스던 저택(Waddesdon Manor·사진)은 세계 금융을 호령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지금도 매년 40만명 안팎의 관광객이 ..

정보가 곧 돈... 워털루 승전보 먼저 입수, 주식·채권 20배 차익

[홍익희의 新유대인이야기] [21]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영국 시장을 장악하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아들 5형제 중 가장 두뇌가 비상했던 셋째 네이선은 21세에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가 면직물을 사서 독일 게토의 본가로 보냈다. 당시 영국 직물업은 석 달 외상 거래가 관례였으나 네이선은 현찰로 가장 좋은 물품을 가장 싼 가격에 사 가격과 품질로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네이선은 무역업만으로는 한계를 느끼자 면직물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원단을 구입해 이를 염색업자들에게 보내 예쁘게 물감을 입힌 후 다시 봉제업자들에게 보내 원하는 스타일..

로스차일드, 나폴레옹 경고에도 대출사업 강행... 국제적 금융가 급부상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20]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 국제 자본가의 탄생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근대 이후 세계 역사를 이끌어온 힘은 왕 등 정치 세력이 아닌 상인과 금융 세력으로부터 나왔다. 실제로 세계사의 전환점이라 일컫는 네덜란드의 중상주의 발흥, 영국의 산업혁명과 전파, 신대륙의 눈부신 성장 등은 상인과 금융업자의 역사로, 특히 유대인에 의해 주도된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지역 대부업 수준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금융산업으로 바꿔놓았다. 이들은 정보를 토대로 세계를 하나의 금융권으로 묶었고..

“富를 흐르게 하라”... 구겐하임家, 미술관 짓고 자선사업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19] 도시들 운명 바꾼 구겐하임 미술관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한국이 철강 산업과 조선 산업 강자로 부상하자 몰락하는 도시들이 있었다. 철강업의 쇠퇴와 함께 배 만드는 일감마저 빼앗겨 쇠락의 길을 걷던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가 그런 도시였다. 이러한 빌바오를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시킨 건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빌바오시가 1억유로(약 1380억원)를 들여 ‘도시 재생’ 사업의 하나로 유치한 미술관이다. 1997년 미술관이 공개되자 3년간 관광객이 약 4백만명 방문하면서 5억유로 경제적 효과를 도시에 안겨줬다. 빌바오시는 세금..

멍텅구리 계산기에 ‘뇌’를 접목... ‘논리 기계’로 바꿨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18]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 존 폰 노이만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오늘날의 컴퓨터를 만든 사람은 컴퓨터 공학자가 아니라 수학자인 요한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1903~1957)이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꿈의 연구소이다. 그곳의 첫 종신 교수가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이었다. 둘 다 유대인이다. 아인슈타인이 대중에게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폰 노이만이 우리 실생활에 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폰 노이만은 수학자이자 동시에 화학, 물리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경제학, 통계학..

“타이태닉 침몰” 전한 전보기사… 라디오·TV시대 열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7] 라디오와 TV 선구자 데이비드 사노프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오늘날 방송이 가능한 것은 독일의 개종 유대인 하인리히 헤르츠가 1887년 공기 중에 ‘전파(전자기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이탈리아인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1897년 모스 부호를 이용해 무선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신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1906년 캐나다 출신의 미국 무선공학자 레지널드 페선던이 전파에 음성을 실어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라디오의 기원이었다. 이후 라디오 방송의 상업화를 이끈 사람이 데이비드 사노프였다..

멸시 받던 유대인 소년, 소아마비 무료 백신 천사로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6] 소아마비 공포서 인류 구원, 러시아계 의과학자 소크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소아마비 팬데믹이 정점에 달했던 1952년 한 해 미국에서만 5만8000여 명이 발병해 3145명이 숨지고 2만1269명의 다리가 마비됐다. 33세이던 1947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 국립재단이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맡은 유대인 의학자 조너스 소크는 마침내 1952년 3월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위 시사 만화는 1957년 퓰리처상을 받은 톰 리틀의 ‘왜 우리 부모님은 내게 소크 백신을 맞히지 않았을까?’. /게티이미지코리아 20세기 들어 뇌나 척수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죽거나 하반신이 마비되는 폴리오 바이러스 전염병이 위세를 떨쳤다. 대공황 때 선출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

러시아의 박해에 분노한 유대인, 러일전쟁 때 일본 밀어줬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5] 러일전쟁 승리한 일본… 그뒤엔 유대인의 물밑지원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https://www.chosun.com/nsearch/?query=%ED%99%8D%EC%9D%B5%ED%9D%AC www.chosun.com 만주에 세력을 넓힌 러시아가 압록강 주변에서 벌채 사업을 하다 1903년 4월 압록강 하구 의주 용암포를 기습적으로 불법 점령하자 일본과 러시아는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놓고 수차례 협상을 벌였다. 다급해진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만주는 전적으로 우리 것이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권리는 인정하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권리는 인정..

약속의 땅? 2000년만에 정착한 땅엔 물도 기름도 없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4] 척박한 환경 이겨낸 유대인들의 지혜와 끈기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검색 - 조선일보 www.chosun.com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30년 전부터 유대인들은 슬금슬금 가나안(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었다. 영국이 1차 대전이 끝나면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인 나라를 가나안에 세우도록 지원하겠다는 ‘밸푸어선언'을 1917년에 했기 때문이다. 이때 유대인들은 가장 먼저 그 땅에 대학부터 세웠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러시아 태생 생화학자이자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은 세계를 돌며 자금을 모아 테크니온 공대와 히브리 대학을 설립, 각각 1924년과 1925년에 문을 열었다. 교육이 앞으로 탄생할 이스라엘의 장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