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처가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처가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처가에서 처가에서 겨울과 여름을 나는데 본가에서는 연락 한 편 오지 않누나. 빈둥거림 길들이자 묘한 맛이 생겨 도를 깨우친다는 헛된 명예가 참 우습다. 지저귀는 새들하고 수작이나 하고 산풍경이나 노상 접하고 있네. 세상사람 어느 누가 이런 복을 누리랴? 부잣집 호의호식도 나만은 못하리라. 甥舘 甥舘淹寒暑(생관엄한서) 家書阻雁魚(가서조안어) 習閒生妙味(습한생묘미) 覺道笑虛譽(각도소허예) 鳥語供酬酌(조어공수작) 山光接起居(산광접기거) 世人誰享此(세인수향차) 鐘鼎不如余(종정불여여) 숙종조의 시인 원옹(園翁) 이의승(李宜繩·1665~1698)이 처가에서 한동안 머물 때 지었다. 처가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간다. 1년이나 길게 떠나..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밭에 쓴 편지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밭에 쓴 편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6.01.23 03:00 눈밭에 쓴 편지 눈빛이 종이보다 새하얗기에 채찍 들어 이름 석 자 써 두고 가니 바람아 부디 눈을 쓸지 말고 주인이 돌아오기 기다려다오. 雪中訪友人不遇 雪色白於紙(설색백어지) 擧鞭書姓字(거편서성자) 莫敎風掃地(막교풍소지) 好待主人至(호대주인지)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1168 ~1241)가 30세 전후하여 지었다. 공직에 진출하지 못해 불안과 불만의 세월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말에 올라타 친구를 찾아갔으나 친구는 외출하여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집 안에 들어가 기다리지도 않았고, 또 그냥 돌아오지도 않았다. 발길을 되돌려 나오다가 집 앞 하얀 눈밭에 제 이름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내 생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내 생애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내 생애 성 밑의 달팽이집은 바로 내가 사는 집 성 모퉁이 박토(薄土)는 다름 아닌 나의 생계. 직함을 예전에 반납해 할 일 없어 홀가분하나 환곡을 열심히 구해도 부족한 건 걱정된다. 물살이 잔잔한 물굽이에는 물고기가 새끼를 낳고 비가 많이 온 앞산에는 고사리 순이 솟아난다. 강호에서 한가로이 사는 정취는 물씬 나기에 만호후(萬戶侯) 정승이 이보다 낫진 않으리라. 偶吟 城下蝸廬是我家(성하와려시아가) 城隅薄土卽生涯(성우박토즉생애) 官銜已納欣無事(관함이납흔무사) 公糴勤求患不多(공적근구환부다) 曲浦波恬魚産子(곡포파념어산자) 前山雨足蕨抽芽(전산우족궐추아) 閑居飽得江湖趣(한거포득강호취) 萬戶三公莫此過(만호삼공막차과) 숙종 때의 문인 백야(白野) 조석주(趙錫..

[가슴으로 읽는 한시] 친구에게

[가슴으로 읽는 한시] 친구에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6.02.06 03:00 친구에게 성격은 괴팍해 늘 조용함을 탐내고 몸은 허약하여 추위를 겁낸다. 솔바람 소리를 문 닫은 채 듣거나 매화에 쌓인 눈 화로를 끼고 본다. 세상맛은 나이 들수록 각별해지고 인생은 끝 무렵이 더 어렵더군. 깨치고서 한바탕 웃고 나니 예전에는 헛된 공명 꿈꾸었구나. 次友人寄詩求和韻 性癖常貪靜(성벽상탐정) 形羸實怕寒(형리실파한) 松風關院聽(송풍관원청) 梅雪擁爐看(매설옹로간) 世味衰年別(세미쇠년별) 人生末路難(인생말로난) 悟來成一笑(오래성일소) 曾是夢槐安(증시몽괴안)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겨울에 시를 써서 친구에게 보냈다. 내가 이런 시를 썼으니 한번 보고 답시를 써서 보여 달라는 요청이다. 현재..

[가슴으로 읽는 한시] 동대문을 나서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동대문을 나서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6.02.13 03:00 동대문을 나서다 잔설이 옷자락에 헤적일 때에 매화 찾아 시골집을 나와 봤더니 땔나무를 소등에 실어 나르고 막걸리에 청어 안주 내어놓았군. 저 멀리 절에서는 연기 오르고 깊은 계곡엔 적설이 남아 있구나. 훗날에 은퇴하면 어떻게 할까? 선친께서 장만해놓은 전답이 있지. 出東郭 殘雪明衣上(잔설명의상) 尋梅到野居(심매도야거) 谷薪輪赤犢(곡신윤적독) 村酒佐靑魚(촌주좌청어) 遠寺孤烟直(원사고연직) 深溪積雪餘(심계적설여) 東岡他日計(동강타일계) 先子有田廬(선자유전려) 19세기 초 한양에서 아전으로 살았던 녹문(鹿門) 김진항(金鎭恒)이 지었다. 겨울 끝이라 날씨도 풀려 매화를 본다는 구실로 시골집을 찾았다. 동대문을..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린 딸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린 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어린 딸 해를 넘겨 남쪽 머물다 말을 타고 돌아오는 길 찌든 가난에 모진 고생을 굳이 물어 무엇 할까? 집사람은 아련하게 달을 보고 있을 테고 어린 딸도 멀뚱멀뚱 난간 잡고 쳐다보겠지. 겨울옷을 기운다며 자를 대고 부산떨거나 두 볼에 분칠하며 화장한다 설칠 텐데. 솜옷 입고 숲속 길을 가는 것과 똑같아서 가시가 옷에 걸려 걸음걸음 힘겨웠지. 幼女 連歲南征信馬還(연세남정신마환) 長貧更不問辛酸(장빈갱불문신산) 家人杳杳應看月(가인묘묘응간월) 幼女憨憨與倚欄(유녀감감여의란) 補綻寒衣空尺寸(보탄한의공척촌) 抹塗雙頰解鉛丹(말도쌍협해연단) 正如絮襖行林裏(정여서오행림리) 梢棘句牽步步難(초극구견보보난) 정조·순조 연간의 시인 박옹(泊翁) 이명오(1750~ 183..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시대를 한탄한다(歎時)

歎時 시대를 한탄한다 形獸心人多古聖 형수심인다고성 形人心獸盡今賢 형인심수진금현 擾擾東華冠帶士 요요동화관대사 暮天風雨奈君恩 모천풍우내군은 形獸心人多古聖 형수심인다고성 생김새는 사람다우나 마음은 짐승인 자는 오늘날 현자가 다 여기에 속한다 서울 길을 왁자하게 헤치고 가는 의관이 화려한 분들이여 비바람 몰아치는 저문 하늘의 임금님 은혜는 어찌 하는가 ―徐起(1523~1591) 조선 선조 때 충청도 공주에 살던 서기(徐起)란 학자가 경구처럼 쓴 시다. 그는 양반집 종이었으나 학문이 뛰어나 존경받던 특이한 사람이다. 그가 서울 거리를 기세 좋게 헤치고 다니는 고관들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나라를 책임진 그들은 생김새도 의관도 화려하여 부러움을 살 만한 외형을 갖추었으나 정작 마음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먼..

[가슴으로 읽는 한시] 무료하여 지어본다

漫爲 剩喜南窓日稍遲 잉희남창일초지 微風舞雪不成吹 미풍무설불성취 禽非易舌無陳語 금비역설무진어 樹欲生花自好枝 수욕생화자호지 春事未應多異巧 춘사미응다이교 客懷聊亦動新詩 객회료역동신시 鏡中白髮三千丈 경중백발삼천장 休道緣愁不入時 휴도연수불입시 무료하여 지어본다 햇볕이 오래 머물러 남쪽 창은 너무 좋은데 산들바람이 눈발을 날리나 그리 세게 불지는 않네 혀를 바꾼 것도 아닌데 새는 진부한 말이 하나 없고 꽃을 피우려는지 나무는 절로 가지가 예뻐지네 봄이 찾아온들 특별히 멋진 일을 하지 못하니 나그네 심회는 시나 새로 지어 풀어볼까 거울 속에 흰 머리가 삼천 길로 늘어났으니 괜한 걱정 하지 않는 나이라고 말하지 마라. 선조 때의 문인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이 1594년 중국으로 가는 숙소에서 지었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내가 봐도 우습다

自戱效放翁 翁年垂八十 옹년수팔십 日與小兒嬉 일여소아희 捕蝶爭相逐 포접쟁상축 黏蟬亦共隨 점선역공수 磵邊抽石蟹 간변추석해 林下拾山梨 임하습산리 白髮終難掩 백발종난엄 時爲人所嗤 시위인소치 내가 봐도 우습다 늙은이 나이가 팔십에 가까운데 날마다 어린애들과 장난을 즐기네 나비 잡을 때 뒤질세라 따라갔다가 매미 잡으러 함께 나가네 개울가에서 가재도 건지고 숲에 가서 돌배도 주워오지 흰머리는 끝내 감추기 어려워 남들이 비웃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네.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 ∼1791)은 18세기의 큰 학자이자 문인이다. 조선 시대 노인의 일상이 경쾌하다. 팔십 노인의 친구는 어린아이들. 아이들에게 뒤질세라 나비도 잡고 매미도 잡으며 어울려 다닌다. 그뿐 아니다. 아이들이 가는 데는 어디고 쫓아다닌다. 개울..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아침에 일어나

朝起戱書窓紙 不悟浮生是夢中 불오부생시몽중 競將謀智賭成翁 경장모지도성옹 夜來自笑千般計 야래자소천반계 每到明朝便一空 매도명조편일공 아침에 일어나 뜬 인생이 꿈과 같은 것 깨닫지 못하고 인생 걸고 지략으로 다투다 늙은이가 되는구나 웃음이 절로 나오니 밤새도록 갖은 궁리 짜내도 언제나 아침 되면 도로 말짱 허사가 되네. 선조 때의 명사 고옥(古玉) 정작(鄭碏·1533~1603)이 아침에 일어나 떠오른 생각을 창호지에 시로 써두었다. 인생은 뜬 구름과 같고, 꿈과도 같다. 그 점을 무시하고 사람들은 온갖 모략과 지식을 동원하여 성공의 꿈을 실현하려 애쓴다. 인생을 걸고 남들과 경쟁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포기할 줄을 모른다. 지난밤에도 잠자리에서 이런저런 거창하고 실현 가능한 인생 계획을 설계하고 흐뭇한 기대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