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박대이에게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박대이에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박대이에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릴 것 있나? 술 즐기면 그게 바로 우리 편이지. 푸른 하늘에 달이 뜨면 언제나 백옥 술병 기울여 함께 마시네. 헛된 이름은 일소에 부쳐버리고 흠뻑 취해야 못난 축에 들지 않으리. 나를 찾는 친구가 나타나거든 도성 서쪽 술집에 가 물어보게나. 贈朴仲說大頤 何知賢不肖(하지현불초) 嗜酒卽吾徒(기주즉오도) 每對靑天月(매대청천월) 同傾白玉壺(동경백옥호) 浮名堪一笑(부명감일소) 熟醉未全愚(숙취미전우) 有客如相訪(유객여상방) 城西問酒壚(성서문주로) 17세기의 명사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1597∼1673)의 시다. 거침없고 호방한 시풍을 자랑하던 동명에게는 허풍이 센 말을 많이 한다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이 시는 그..

[가슴으로 읽는 한시] 그윽한 흥취

[가슴으로 읽는 한시] 그윽한 흥취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그윽한 흥취 집 가까이 울창한 나무 많아서 시원한 그늘 몇 섬이나 쏟아놓았네. 찾는 이 드물기에 방석을 높이 걸어두었고 늙은 뒤로는 집구석 떠날 일이 거의 없네. 한참을 노리자 개를 향해 닭이 덤벼들고 몰래 다가오자 뱀을 향해 참새가 짹짹거리네. 이웃집 꼬마 녀석 할 일 없어 심심한지 찔레꽃 따기 하자며 찾아오누나. 幽興 近宅多幽樹(근택다유수) 淸陰幾斛加(청음기곡가) 客稀高吊榻(객희고적탑) 人老罕離家(인로한리가) 久要鷄爬犬(구요계파견) 潛行雀吠蛇(잠행작폐사) 隣童無箇事(인동무개사) 來鬪蒺藜花(내투질려화) 홍애(洪厓) 이기원(李箕元·1745~?)이 시골 마을의 고요함을 시로 썼다. 집 주위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여러 그루라 짙은 그늘을 볏섬..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화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어화 오늘 밤은 으르렁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잠자는 구름 아래 어등(魚燈)이 빛을 뿜는다. 공활한 하늘이 훤히 펼쳐 있고 다닥다닥 별 떼가 반짝이는데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꺼졌다가 켜지며 반공중에 까닭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잠 못 들고 몇 개 섬을 돌고 났는지 왁자하게 흩어지는 새벽이 됐다. 漁火 今夜鳴濤息(금야명도식) 魚燈照宿雲(어등조숙운) 空靑一天明(공청일천명) 錯落衆星文(착락중성문) 隔葉時明滅(격엽시명멸) 憑虛任聚分(빙허임취분) 不眠環數島(불면환수도) 號噪曙紛紛(호조서분분)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1758~ 1816)이 흑산도에서 썼다. 밤바다 위에 뜬 고기잡이배의 불빛은 육지에서 유배 온 선비의 눈에 얼마나 낯설고도 황홀했을까? 며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이사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이사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이사 5년 동안 세 번이나 집을 옮겼고 올해도 또다시 이사했다. 벌판 넓은 곳에 오막살이 초가집 높은 산에는 고목이 듬성듬성하다. 농부들은 남 질세라 성을 물어도 옛 친구는 편지마저 끊어버렸다. 천지야 능히 나를 받아줄 테지. 표표히 가는 대로 맡겨둬 보자. 移家 五年三卜宅(오년삼복택) 今歲又移居(금세우이거) 野闊團茅小(야활단모소) 山長古木疎(산장고목소) 耕人相問姓(경인상문성) 故友絶來書(고우절래서) 天地能容我(천지능용아) 飄飄任所如(표표임소여) 조선 개국의 공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1382년에 지었다. 원대한 이상을 꿈꾸던 삼봉을 권력 세습하던 이들이 놔두고 보지 않았다. 유배와 핍박이 잇따라, 학도를 가르치던 집이 ..

[가슴으로 읽는 한시] 흥인문에 오르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흥인문에 오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흥인문에 오르다 영제교 다리 끝은 무릎까지 진펄에 빠지고 우쭐 자란 미나리 밭으로 버들은 그늘을 드리웠네. 석양 아래 매어놓은 말 위로 무지개가 뜨고 넓은 대로의 행인들은 개미처럼 걸어가네. 담을 이어 정원이 있는 저택들은 모두가 왕실 인척의 소유이고 왕성 안을 가득 메운 풍악 소리는 태평성대를 노래하네. 자주 왔다 자주 가는 나는 대체 웬 고을의 과객인가? 흥인문 문루의 다섯 번째 기둥에 홀로이 기대 서 있네. 登興仁門樓 永濟橋頭泥沒膝(영제교두이몰슬) 水芹齊葉柳陰晴(수근제엽유음청) 斜陽馬繫虹蜺影(사양마계홍예영) 廣陌人看螻蟻行(광맥인간루의행) 接宅園林皆貴戚(접택원림개귀척) 滿城歌管卽昇平(만성가관즉승평) 頻來頻去何鄕客(빈래빈거하향객) 獨倚..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달밤에 탁족하기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달밤에 탁족하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달밤에 탁족하기 창포만큼 장수에 좋은 것이 탁족이라 들어와서 천천히 걸어 강가로 나가니 달빛마저 서늘하네. 묵은 때를 벗겨 보내려니 고결한 백로한테 부끄럽고 세상먼지에 찌들어서 마름풀 향기에게 미안하네. 발을 담갔다 뺐다 하는 것은 자맥질 잘하는 사다새와 똑같고 하얗게 씻은 살결은 돌을 꾸짖어 양을 만든 것과 같네. 세상의 비단옷 걸친 자들은 늘 이상해 보였지. 황금 대야에 온수를 떠놓고 평상을 떠나지 않는다네. 月夜濯足 曾聞濯足敵昌陽(증문탁족적창양) 緩步汀沙月色凉(완보정사월색량) 膩垢漂流羞鷺潔(이구표류수로결) 軟塵濡染惱蘋香(연진유염뇌빈향) 沈浮政似淘河鳥(침부정사도하조) 皓白眞同叱石羊(호백진동질석양) 常怪世間紈袴子(상괴세간환고자) 金盆溫..

[가슴으로 읽는 한시] 저물 무렵 채소밭을 둘러보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저물 무렵 채소밭을 둘러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저물 무렵 채소밭을 둘러보다 내 인생이 농부의 흉내를 내노라 후미진 마을 달팽이집에 머무네. 산비탈에 기대 돌계단을 쌓고 땅을 빌려 무궁화 울타리를 쳤네. 드문드문 반딧불은 콩잎으로 숨고 늙은 나비는 무꽃만을 찾아드네. 그럭저럭 황혼이 밀려오더니 호젓한 숲은 둥근 달을 뱉어놓네. 薄暮巡園 生涯學老圃(생애학노포) 深巷屋如蝸(심항옥여와) 石砌因山築(석체인산축) 槿籬貰地遮(근리세지차) 踈螢沈荳葉(소형침두엽) 老蝶戀菁花(노접연청화) 冉冉黃昏至(염염황혼지) 幽林吐月華(유림토월화) 정조·순조 연간의 시인 농오(農塢) 정언학(鄭彦學)이 썼다. 서울에서는 유득공이나 김려, 권상신 등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그러나 생계가 늘 ..

[가슴으로 읽는 한시] 폭염에 괴로워하며

[가슴으로 읽는 한시] 폭염에 괴로워하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폭염에 괴로워하며 비 오는 날 구름 걷어낼 묘수가 아예 없듯이 무더운 곳에 바람 부르는 일 당최 불가능하지. 모기장 걷고 모기에게 살을 대주지는 못해도 힘없는 파리 보고 칼을 뽑아서야 되겠는가? 대숲에 이는 산들바람에 적잖이 기뻤건만 창문에 쏟아지는 석양빛은 호되게 괴롭구나. 잘 알겠네. 그대가 와주면 더위가 물러나겠지. 가을 강물 같은 정신에 얼음 같은 눈동자라서. 苦炎熱 雨天披雲曾無奈 (우천피운증무내) 熱處招風亦不能 (열처초풍역불능) 雖未開巾壽進禮蚊 (수미개주진례문) 寧敎拔劒怒微蠅 (영교발검노미승) 灑竹纖凉稍可喜 (쇄죽섬량초가희) 射窓斜陽苦相仍 (사창사양고상잉) 知是君來當辟暑 (지시군래당벽서) 神若秋水眸如氷 (신약추수모여빙) 추사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여름밤 마루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여름밤 마루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여름밤 마루에서 한여름이라 무더위에 시달려도 밤 되면 마루 앞에 멋진 풍경 펼쳐지네. 구슬이 빠졌나 별이 시냇물에 비치고 황금이 새는지 달빛이 안개를 뚫네. 이슬이 무거워 매화나무는 넋마저 촉촉하고 바람이 서늘하여 대나무는 풍류를 흘리네. 오래 앉아도 함께 구경할 벗이 없어 그윽한 흥취를 시에 담아 풀어내네. 夏夜山軒卽事 盛夏苦炎熱(성하고염열) 宵軒美景姱(소헌미경과) 珠涵星照澗(주함성조간) 金漏月穿霞(금루월천하) 露重梅魂濕(노중매혼습) 風凄竹韻多(풍처죽운다) 坐來無共賞(좌래무공상) 幽興屬吟哦(유흥속음아)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1579~ 1651)의 시다. 왕실 후손으로 시골에서 평범하게 생애를 보낸 그다. 그는 한여름 밤 시를 한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돈

[가슴으로 읽는 한시] 돈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돈 해결하기 힘든 세상일을 잘도 해결하고 어리석은 자는 현자로, 지혜로운 자는 걱정꾼으로 만드네. 개원이란 글자가 분간되나 달이 찌그러진 듯하고 제부처럼 둥글어서 물 흐르듯 굴러가네. 온갖 물건을 헐값 만드니 권세 정말 무겁고 일천 집안을 파산시키고도 욕심을 그치지 않네. 이자 놓고 재물 불리느라 거간꾼들 바쁘니 서민도 하루아침에 제왕처럼 변하누나. 詠錢 能平世上難平事(능평세상난평사) 愚者爲賢智者愁(우자위현지자수) 字辨開元疑月缺(자변개원의월결) 形圜齊府象泉流(형환제부상천류) 摧殘百物權何重(최잔백물권하중) 破盡千家意不休(파진천가의불휴) 子貸殖繁勤駔儈(자대식번근장쾌) 飜令編戶等王侯(번령편호등왕후) 헌종 연간의 문신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1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