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마포에 노닐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마포에 노닐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마포에 노닐다 사람도 물건도 번화하여 곳곳마다 차이가 없고 이 편 저 편 언덕에는 누대가 찬란하구나. 고운 모래밭 펼쳐진 남북 강변으로 구름이 다가와 누가 더 흰가 다투고 꽃담으로 둘러싸인 일천 채 주택엔 햇살이 쪼여 누가 더 붉은지 겨룬다. 대지를 채우며 인파가 몰려 흘린 땀이 비를 뿌릴 지경이고 술기운은 하늘을 데워 그 열기로 무지개가 뜨려 한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높이 올라 바라보니 내 평생 다녀본 중에는 이곳이 가장 으뜸이더라. 游西湖 民物繁華處處同(민물번화처처동) 樓臺照耀水西東(누대조요수서동) 瓊沙兩岸雲爭白(경사양안운쟁백) 繡壁千家日鬪紅(수벽천가일투홍) 拍地人烟烝欲雨(박지인연증욕우) 薰天酒氣暖噓虹(훈천주기난허홍) 今朝始放登高目(금..

[가슴으로 읽는 한시] 제목을 잃어버린 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제목을 잃어버린 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제목을 잃어버린 시 서울에서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 해질 무렵 미친 듯이 노래 부르며 돌아왔네. 봉래산에는 속물이 너무 많기에 유희하며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지. 失題 大醉長安酒(대취장안주) 狂歌日暮還(광가일모환) 蓬壺多俗物(봉호다속물) 遊戱且人間(유희차인간) 김가기(金可基)란 기인이 쓴 시다. 그는 생몰년도 알려지지 않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기행(奇行)을 일삼은 행적이 유명하다. 신선의 행적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서울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날이 저물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자칭타칭 신선이란 자가 뭐가 그리 불만인지 미친 듯이 노래까지 불러댔다. 어디서나 흔하게 눈에 뜨이는 술주정뱅이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객지의 밤 가을의 상념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객지의 밤 가을의 상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객지의 밤 가을의 상념 책을 덮고 앉았더니 풀벌레 우는 소리 가을밤은 한참 전에 자정을 넘겼다. 이 고장 풍경은 가을빛에 물들었고 나그네 심사는 등불빛에 젖어든다. 멀리 떠나 공부하자니 어머니 불쌍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자니 친구 보기 창피하다. 서글픈 마음 누구에게 말을 걸까? 불평이 솟구치는 노래 길어만 간다. 旅夜秋思 廢卷坐蟲聲(폐권좌충성) 秋宵已數更(추소이수경) 節物侵鄕色(절물침향색) 燈光入客情(등광입객정) 遠學悲慈母(원학비자모) 歸耕愧友生(귀경괴우생) 惻惻無誰語(측측무수어) 長歌激不平(장가격불평) 조선 정조·순조 연간의 선비 수산(睡山) 이우신(李友信·1762~1822)이 가을철 여행 중에 썼다. 아마도 집을 떠나 공부하러..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함께 숙직하는 동료에게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함께 숙직하는 동료에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함께 숙직하는 동료에게 가을 깊어가는 북부의 관청은 시 짓기에 그만인데 백악과 숲까지 저녁 빛깔이 아주 곱다. 이 동네를 독차지했어도 제 앞가림 전혀 못하고 관아 문이나 지키면서 작은 자리 그냥 얹혀사네. 날씨가 더 서늘해져 대추 볼은 발갛게 물들었고 가랑비 내린 뒤라 배춧속은 파란빛을 띠네. 새벽 지나 파루종 칠 때라고 그대여 비웃지 말게나. 물이 흐르면 물도랑 이루는 섭리를 왜 그리 의심하는가? 宰監直中奉和何求翁 秋深北署政宜詩(추심북서정의시) 岳色林光晩景奇(악색임광만경기) 專壑未能營兎窟(전학미능영토굴) 抱關聊復借鹪枝(포관료부차초지) 丹浮棗頰新凉後(단부조협신량후) 綠入蔬心細雨時(녹입소심세우시) 漏盡鐘鳴翁莫笑(누진종명옹막소) 渠成..

[가슴으로 읽는 한시] 추석

[가슴으로 읽는 한시] 추석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추석 시장은 들썩들썩 풍년 정취 즐겁고 희희낙락 길손들은 머뭇머뭇 걸음 못 떼네. 주막집에는 음식이 풍성해 눈이 번쩍 뜨여도 어디 가나 다리 부러진 소가 어째 저리 많을까? 농촌에서는 추석이 제일 좋은 명절 웃음이 넘치는 마을마다 술과 음식이 지천이다. 사람들 오가는 바닷가 시장 산촌 장터 길에는 사당패가 북치고 노래하며 신령을 부르네. 秋夕 場市繁華樂歲秋(장시번화낙세추) 凞凞行旅故遲留(희희행려고지류) 欣看野店侈肴饌(흔간야점치효찬) 到處何多蹇脚牛(도처하다건각우) 農家秋夕最良辰(농가추석최양신) 歡笑村村醉飽人(환소촌촌취포인) 海市山場來去路(해시산장래거로) 優婆鼓舞唱回神(우파고무창회신) 조선 순조 연간의 시인 유만공(柳晩恭·1793~?)이 추석 풍속을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신창 가는 길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신창 가는 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신창 가는 길 메밀꽃은 피어 있고 콩잎은 노랗고 건너편 숲 주막에는 저녁 햇살 내려앉고 장승은 그늘에 서서 말을 걸어오고 새는 바람에 날려 도로 솟아오르고 나무 곁의 소는 울며 볏단을 날라 오고 풀밭의 귀뚜라미는 서늘한 바람 당겨온다. 가던 구름 빗줄기 뿌려 한쪽 들판 어둑하고 돌길 걷는 지친 나귀 어둠 깔려 더 바쁘다. 新昌道中 蕎麥花開豆葉黃(교맥화개두엽황) 隔林山店隱西光(격림산점은서광) 堠人瞑立如相語(후인명립여상어) 棲鳥風翻還欲翔(서조풍번환욕상) 樹外牛鳴輸遠稼(수외우명수원가) 草間蛩響引新凉(초간공향인신량) 歸雲漏雨郊陰黑(귀운누우교음흑) 石逕羸驂傍夜忙(석경리참방야망)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죽하(竹下) 김욱(金熤·1723~1790)이 젊..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바위 아래 고요한 서재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바위 아래 고요한 서재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바위 아래 고요한 서재 서리 맞아 짙거나 옅은 나뭇잎 빛깔 모여 비단 나무 만들었구나. 텅 빈 서재에 할 말 잊은 채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노라. 楓巖靜齋秋詞 霜葉自深淺(상엽자심천) 總看成錦樹(총간성금수) 虛齋坐忘言(허재좌망언) 葉上聽疎雨(엽상청소우) 몽예(夢囈) 남극관(南克寬·1689~ 1714)이란 시인이 썼다.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누군들 가을 되어 단풍에 마음 잠시 설레지 않을 수 있으랴? 다리에 병이 있어 시인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다. 단풍철이라 하여 남들처럼 산과 들로 훌쩍 떠나지 못하는 처지다. 그렇다고 해서 계절을 느끼는 감각이 둔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예민하다. 서리가 내린 뒤로 울긋불긋한 잎들은 그의 눈에는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웃음

[가슴으로 읽는 한시] 웃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웃음 가마처럼 작은 판잣집 작은 창 열지 않았더니 섬돌 앞에는 다람쥐가 오락가락 추녀 끝에는 새가 들락날락한다. 메밀을 껍질째 방아에 찧고 이파리가 붙은 무를 통째로 갈아 국을 끓이고 만두를 만들어 먹고 나니 낄낄낄 웃음 나온다. 書笑 板屋如轎小(판옥여교소) 矮窓闔不開(왜창합불개) 階前鼯出沒(계전오출몰) 簷外鳥飛回(첨외조비회) 蕎麥和皮擣(교맥화피도) 葑根帶葉檑(봉근대엽뢰) 和羹作餑飥(화갱작발탁) 喫了笑咍咍(끽료소해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50세를 전후하여 강원도 강릉에 머물 때 지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전국을 방랑하다 잠깐 정착의 시간을 보내던 중이다. 겨우 한 사람 들어가 앉을 만큼 작은 집이다.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실록 편찬을 마치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실록 편찬을 마치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실록 편찬을 마치고 오늘에야 오랜만에 화산을 다시 보고 돌아온 뒤 종일토록 대문을 닫아 두었네. 책 더미 속에서 팔을 베고 누워 뒹굴다가 초목 사이로 뒷짐 지고 천천히 걸어보네. 지나고 나면 알게 되지 모든 게 환영임을 집에 오면 느끼지 집만이 편안하다는 것을. 마을 사는 벗들아 어땠느냐 묻지를 마오. 머리 허연 옛 얼굴 십년 동안 똑같다네. 實錄畢役 還家有賦 久矣今朝見華山 (구의금조견화산) 歸來終日掩荊關 (귀래종일엄형관) 曲肱頹臥琴書內 (곡굉퇴와금서내) 負手徐行草樹間 (부수서행초수간) 過境終知皆幻夢 (과경종지개환몽) 還家始覺有餘閒 (환가시각유여한) 里中父老休相問 (이중부로휴상문) 白首十年依舊顔 (백수십년의구안) 순조 연간의 저명한 ..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술년 가을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술년 가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갑술년 가을 황량한 들녘에는 쭉정이뿐 과부가 나와 줍고 벌레 먹은 복숭아나무 아래 동네 아이들 싸우고 있다. 돌보는 농부 없이 병든 이삭 가득한 논에서는 송아지 딸린 황소만이 마음대로 먹어치운다. 타작할 볏단 한 묶음 마당에 들어오지 않고 참새떼가 해질 무렵 황량한 마을에 시끄럽다. 밑도 끝도 없는 시름 풀풀 나서 책 던지고 누웠더니 때맞춰 숲 바람 불어와 문을 닫아버린다. 甲戌秋 秕稗荒原嫠婦摘(비패황원이부적) 螬桃小樹里童喧(조도소수이동훤) 滿田病穟無人管(만전병수무인관) 將犢黃牛自齕呑(장독황우자흘탄) 場圃竝無禾黍入(장포병무화서입) 日斜群雀噪荒村(일사군작조황촌) 閑愁忽忽抛書臥(한수홀홀포서와) 會事林風爲掩門(회사림풍위엄문) 초원(椒園) 이충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