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604

[고전 속 정치이야기] 사상왜곡(思想歪曲)

[고전 속 정치이야기] 사상왜곡(思想歪曲) 천지일보 승인 2022-09-29 18:13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묵자는 자신의 시대에 홀로 거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진한시대 이후 이상하게도 사상사의 흐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약 2천년 동안 감쪽같이 사라졌던 묵가의 기록은 도가의 전적에 섞여 있었다. 묵가는 황당하게도 세상을 벗어나 소요하는 신선들과 어울렸다. 묵가의 단절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항우가 함양에 불을 질렀을 때, 유가에 반대하다가 한초에 파출됐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장자의 말처럼 보통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주장하다가 대중을 흡인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묵가의 조직은 너무 엄격하고 비밀스러워서 추종자의 수가 늘어나자 오..

[고전 속 정치이야기] 연연전투(燕然戰鬪)

[고전 속 정치이야기] 연연전투(燕然戰鬪) 천지일보 승인 2022-09-22 18:33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무제는 오랫동안 흉노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대규모의 원정을 감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BC97년에 한과 흉노는 여오수의 남쪽에서 대치하다가 접전하지 못하고 각자 후퇴했다. 이후 한은 7년 동안 전력을 비축했다. BC96년, 흉노 차제후선우가 사망하고 호록고가 계위했으나 귀족들이 지지하지 않았다. 호록고는 한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권력을 다지려고 했다. 호록고가 침범하자, 무제도 좌시할 수 없었다. 이사장군 이광리가 주력, 상구성과 망통이 좌익과 우익을 맡았다. 호록고는 치중대와 노약자들을 몽고까지 철수시키고 한군을 기다렸다. 상구성은 ..

[고전 속 정치이야기] 사마상여(司馬相如)

[고전 속 정치이야기] 사마상여(司馬相如) 천지일보 승인 2022-09-15 19:23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천성 성도출신 사마상여는 거부의 아들로 문장과 검술을 함께 익혔다. 전국시대 조(趙)의 인상여(藺相如)를 유난히 좋아해 이름을 상여라고 붙였다. 재물로 관직을 샀지만, 실질을 숭상하던 경제는 화려한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침 양효왕 유무(劉武)가 내조했을 때 추양(鄒陽), 매승(枚乘), 장기(庄忌) 등 유세객들도 따라왔다. 사마상여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양나라로 따라갔다가 중국문학사에 빛나는 자허지부(子虛之賦)를 지었다. 사마상여는 말은 어눌했지만 글을 잘 지었다. 양효왕이 열병으로 죽자 고향으로 돌아와 백수로 지냈다. 임공령(臨邛令) 왕길(王吉)은 사마상여와 친하고 싶었다. 임공..

[고전 속 정치이야기] 선연인생(嬋娟人生)

[고전 속 정치이야기] 선연인생(嬋娟人生) 천지일보 승인 2022-09-08 18:04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소만수(蘇曼殊, 1884~1918)는 근대 중국의 풍류남아이자, 혁명문학단체 ‘남사(南社)’의 일원이었다. 1909년에 소주(蘇州)에서 창립한 남사는 북정(北庭) 즉 북경의 청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부친 소걸생(蘇杰生)은 일본 고베의 찻집 종업원이던 일본여자와의 사이에서 만수를 얻었다. 그러나 생모가 곧바로 사라지자, 아버지의 첩이 길렀다. 그는 자신을 ‘숨겨진 아이’라고 말했다. 고베의 대동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가 혁명활동의 참가자로 수배령이 떨어지자 출가했다. 만수는 법명으로 문수의 음역이다. 자유분방했던 그는 중국, 일본, 인도는 물론 동남아 일대를 떠돌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

[고전 속 정치이야기] 내부충돌(內部衝突)

[고전 속 정치이야기] 내부충돌(內部衝突)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 혁명은 중세 유럽의 봉건주의를 무너뜨렸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진보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는 전쟁이라는 인류의 야만적 현상을 없애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민주제도가 가장 성행했던 시대에 발생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과 민주는 쌍둥이와 같다. 특정한 환경에서 민주정치는 오히려 전쟁을 촉진한다. 고대 그리스 군은 평민이 중심이었으며, 그들이 민주정치를 추동했다. 종군과 시민권은 로마에서 동의어였다. 미국의 흑인은 베트남전쟁에서 성조기에 헌신하면서 평등을 요구했다. 해전은 민주정치의 형성에 대해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그리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살라미스해전이었다. ..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분적구지(分敵驅之)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분적구지(分敵驅之) 천지일보 승인 2022-09-01 18:16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치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어떤 세력과 연합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 때문에 정치적 연합은 반드시 모순관계에 빠진다. 전력이 열세인 쪽은 상대의 모순을 이용해 분쟁을 일으키고 세력이 약화되기를 기다렸다가 적절한 찬스를 포착해 공격해야 한다. 이것이 분적구지이다. 전국시대에 제(齊), 위(魏), 한(韓)은 북방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핑계로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연(燕)을 침공했다. 다급해진 연은 태자를 초(楚)에 파견해 구원을 요청했다. 연과 초는 수직으로 동맹을 체결해 삼국의 수평동맹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른바 종(縱)과 횡(橫)의 대결이었다. 초왕은 경양(景陽)..

[고전 속 정치이야기] 생존공간(生存空間)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에서 작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원인 때문에 생존공간에 대한 문제에 매우 민감한 것 같다. 배후의 태평양은 이렇다 할 만한 육지가 없어서 안정적 삶의 공간을 확장할 수 없었다. 대륙과 연결되는 가장 가까운 통로는 한반도뿐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진입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목표로 내걸고 세계적인 근대화 궤도에 신속하게 진입했다. 생존공간 확장을 위한 욕망도 날로 강렬하게 확장됐다. 욕망의 확장은 몇 가지 방면으로 드러났다. 첫째, 일본은 자기의 생존공간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적 강대국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군사력을 뒷받침할 경제력을 기르기 위해 각종 자원과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고전 속 정치이야기] 동원전투(東垣戰鬪)

[고전 속 정치이야기] 동원전투(東垣戰鬪)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유방이 진희(陳豨)의 반란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일으킨 동원전투는 사실상 공신제거가 목적이었다. 진희의 반란은 사소한 일이었고, 진짜 목적은 그 과정에서 전쟁의 신 한신과 유격전의 명수 팽월이라는 최고 군사실력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전국시대 무인의 기풍을 마지막으로 발산했던 항우를 제거하고 이룩한 한의 위업은 유방 부부의 잔혹함으로 큰 손상을 입었다. 처음부터 기획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유방은 일거양득의 결과를 얻었다. 한신과 팽월은 부하의 밀고로 모반죄에 걸려들었다. 공교롭다고 하기에는 음모의 냄새가 짙다. 팽월은 진희의 반란 진압에 참전하라는 명을 어겼다고 하나 실제로 중병에 걸렸을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유방이 진희를..

[고전 속 정치이야기] 서하학파(西河學派)

[고전 속 정치이야기] 서하학파(西河學派)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춘추와 전국시대의 구분 기준은 제(齊)의 정권이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넘어간 전씨대제(田氏代齊)와 한(韓), 위(魏), 조(趙)가 진(晋)을 분할한 삼가분진(三家分晋)이다. 이 대표적인 사건은 하극상(下剋上)이었다. 공자가 예견한 예악의 붕궤가 현실화됐다. 위문후는 최초로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해 본격적인 전국시대를 주도했다. 그는 춘추시대 강자였던 진(秦)부터 공격했다. 오자병법의 저자 오기(吳起)가 진의 서하지역을 점령했다. 위문후는 점령지역에 대한 문화적 침투를 시행했다. 유명한 서하학파는 이를 배경으로 형성됐다. 자하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이 복상(卜商)이었으며, 공자보다 44세가 적어서 BC507년에 태어났다. ..

[고전 속 정치이야기] 형세판단(形勢判斷)

[고전 속 정치이야기] 형세판단(形勢判斷)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초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 항량(項梁)은 진시황 사후에 조카 항우와 함께 반진기의를 일으켰다. 진승(陳勝)이 사망하자 항연은 제후들을 설읍(薛邑)으로 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이 회의에 등장한 범증(范增)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 양을 치던 초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회왕으로 옹립했다. 회왕은 허수아비였으나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항량이 살아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항량이 전사하자 반진군의 전선이 궤멸됐다. 팽성에 주둔하던 유방은 재빨리 항우와 연합했다. 회왕은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송의(宋義)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해 차장(次將)으로 삼았다. 초의 병권은 회왕이 신임하는 송의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