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604

[고전 속 정치이야기] 안영회고(晏嬰懷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춘추시대 제(齊)의 명재상 안영의 묘는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임치구(臨淄區) 영순장(永順庄) 들판에 있다. 묘지 주변은 고요하다. 관중(管仲)의 묘에 비하면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안영의 자는 중(仲), 시호는 평(平)이다. 영공(靈公), 장공(庄公), 경공(景公)을 보필한 그는 공자를 제에서 축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5척 단신에 용모까지 보잘것없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성장하는 전(田)을 잘 견제해 강(姜)씨의 정권을 잘 유지했다. 그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는 지금도 즐겁다. 어느 해 안영은 사신으로 초에 파견됐다. 당시 1척은 지금의 7촌에 해당하므로 그의 키는 140㎝ 정도였을 것이다. 초는 안영과 제에 모욕을 주고 싶어서 성문 옆에 작은 개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들어오라..

[고전 속 정치이야기] 건곤일척(乾坤一擲)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BC 206년, 진(秦)이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했다. 항우는 유방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함양을 먼저 점령한 유방을 오지인 한왕(漢王)으로 봉했다. 분노한 유방은 항우와 패권을 다투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유방은 대단한 야심을 품지 않았다. 그가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것은 다른 무장에 비해 자신의 봉지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제후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되지 못한 전영(田榮)은 항우가 제왕으로 봉한 전도(田都)와 교동왕(膠東王) 전시(田市)를 죽인 후 제왕으로 자립했다. 또 팽월(彭越)과 연합해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까지 죽였다. 전영이 동방의 강자로 부상했다. 요동왕 한광(韓廣)은 연왕 장도(臧荼)를 죽였다. 제왕 전영의 지지를 받아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

[고전 속 정치이야기] 지인지감(知人之鑑)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사람이 원래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됐다면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공자에 따르면 인심의 험악함이 산천의 험악함과 같으면 하늘도 알지 못한다. 하늘은 춘하추동과 아침저녁을 구분하지만, 사람은 겉모습의 이면에 다른 면이 숨어있다. 겉으로 겸허하지만, 내심은 더욱 교만하거나, 겉으로 부족한 척할수록 자부심이 강하다. 겉으로 초조한 척하지만 이미 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겉으로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유약하다. 겉으로 화평한 척하는 사람일수록 마음속은 흉악하다. 육도(六韜) 선장편(選將篇)에서 여상(呂尙)은 무왕에게 ‘사(士)의 고저’를 아는 15가지 유형을 설명했다. 여상이 말한 표리부동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1. 겉은 현명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 2. 겉은 엄격하면서 속은 흐..

[고전 속 정치이야기] 격안관화(隔岸觀火)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격안관화는 전국책(戰國策)의 ‘휼방상쟁(鷸蚌相爭) 어옹득리(漁翁得利)’에서 유래됐다.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알려진 이 고사를 두고 당의 선승 건강(乾康)이 지은 시다. 격안홍진망사화(隔岸紅塵忙似花), 당헌청장냉여빙(當軒靑嶂冷如氷). 건너편 언덕의 단풍은 꽃처럼 피어나는데, 집 앞의 가파른 푸른 산은 얼음처럼 차갑구나. 홍진의 화려함을 얼음처럼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으로 상대의 싸움을 지켜보는 책략가의 날카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봉광록(中蜂廣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생각이 은밀하면 행동도 은밀하다. 수행이 깊으면 깨달음도 역시 깊다.” 불교의 ‘삼매(三昧)’는 잡년이 제거된 몸과 마음의 평정을 가리킨다. 이 경계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 보통 ..

[고전 속 정치이야기] 애도왕열(哀悼王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삼국시대의 왕열은 병원(邴原), 관녕(管寧)과 함께 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천하의 조조마저도 차마 그를 초빙하지 못할 정도로 재야에서 깨끗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는 다양한 지식과 도에 통달했지만, 정의가 아니면 돌아보지 않았다. 영천(穎川)의 진태구(陳太丘)를 스승으로 모셨다. 많은 학우들이 진태구에게 배웠으나, 왕열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모두 감복하며 따랐다. 그의 이름은 해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조부의 상을 당해 귀향했다. 마침 대기근이 닥쳐서 사람들이 굶주리자 자신의 창고를 풀어 읍민들을 구했다. 종족들은 효자라 불렀으며, 읍민들은 어질다고 칭송했다. 교육에 전념해 학교를 세웠다. 각자의 성품과 기질에 맞춰 선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도록 가르쳤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고전 속 정치이야기] 존왕양이(尊王攘夷)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BC 681년, 제가 노를 격파했다. 노장공(魯莊公)이 영토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제환공(齊桓公)도 수락했다. 양국 군주가 회맹을 체결했다. 노장공이 서약서를 읽으려고 할 때 조말(曹沫)이 비수로 제환공을 위협하면서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승낙하자 조말은 비수를 거두고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의 자리에 섰다. 환공이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管仲)은 신뢰를 잃지 말라고 말렸다.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제를 믿고 패주로 받들었다. 환공 23년, 산융(山戎)의 침공을 받은 연을 구하러 갔다가 철수했다. 연장공(燕庄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의 국경을 넘었다. 환공이 말했다. “천자를 제외하고는 제후들끼리 국경을 넘어서 배웅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는..

[고전 속 정치이야기] 경덕불첨(敬德不諂)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울지경덕은 당태종 이세민의 경호대장으로 이름은 공(恭)이다. 논란은 있지만 성으로 미루어 선비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젊어서 대장장이로 생업으로 삼다가 수말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나중에 이세민에게 항복하여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다. 이부상서 당검(唐儉)과 태종 이세민이 바둑을 두다가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난 이세민이 당검을 담주(譚州)로 유배시켰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울지공에게 “당검이 나를 무시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대가 증인이 되어 주시오.” 울지공이 응답했다. 다음날 조회에서 울지공이 머리를 찧으며 신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물어도 바뀌지 않았다. 화가 난 이세민이 나가버렸다. 얼마 후 3품 이상 관리들을 초대한 잔치에서 이세민이 말했다..

[고전 속 정치이야기] 낙양재자(洛陽才子)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부필(富弼, 1004~1083)은 북송시대의 명재상으로 특히 북방의 강국 요(遼)와 서북에 웅거한 서하(西夏)와의 외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수십 년 동안 중원에서 전쟁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부필은 명성을 얻은 후 낙양재자로 불리었다. 이미 상당한 명성을 누리던 범중엄(范仲淹)은 부필을 만난 후 왕좌지재(王佐之才)라고 칭찬했다. 당시의 재상은 안수(晏殊)였다. 그는 20세가 되기 전에 진사가 된 기재로 ‘꽃이 언제 지는지도 모르면서, 제비가 돌아오는 것을 아는 척 했다(無可奈何花落去, 似曾相識燕歸來)’라는 유명한 명구를 남겼다. 범중엄이 부필의 문장을 안수에게 보여주었다. 한눈에 부필의 앞날을 알아본 안수가 범중엄에게 이 낙양재자가 혼인을 했느냐고 물었다. 범중엄이 아직 미혼이..

[고전 속 정치이야기] 시비붕당(是非朋黨)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국가나 조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제갈량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당파를 결성하여 충직하고 유능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라고 했다. 물론 당파는 경쟁과 견제를 통해 권력집중을 막고 적절한 대안을 추구한다는 순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략적 목표나 전술적 방법론이 결정되면 당파는 비효율적인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특히 군대는 고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명령과 복종이 기본 축이다. 어떤 조직이거나 의사결정까지는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하지만, 결정된 후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지나침이 문제이지 적당하면 약이다. 적당의 기준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리더의 필수적인 능력이다. 시간적, 공간적 상황과 가치판단에 ..

[고전 속 정치이야기] 단사표음(簞食瓢飮)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곡부의 공묘 동쪽에는 공자가 자랑하고 아쉬워했던 안회를 모신 복성묘(復聖廟)가 있다. 공자는 제자를 받아들일 때 차등을 두지 않았다. 빈부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을 자유로 드나들었다. 안회는 10여세에 처음 공자를 만났다. 키는 작고 옷도 남루했으며 얼굴은 황달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마가 두드러졌고, 깊은 두 눈이 샛별처럼 반짝여서 총명해 보였다. 공자는 처음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안회는 제자들 가운데 독서에 가장 열심이었고, 질문은 거의 없었지만 강의에 열중했다. 공자가 강의를 할 때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마치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제자들은 바삐 집으로 돌아갔지만, 안회는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