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604

[고전 속 정치이야기] 도교음악(道敎音樂)

[고전 속 정치이야기] 도교음악(道敎音樂)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위대한 시성 이백(李白)과 도사 오균(吳筠)은 좋은 친구였다. 이백은 그로부터 도가사상을 알게 돼 점차 깊이 빠져들었다. 이백을 당현종에게 추천한 사람도 오균이었다. 이백은 그 기쁨을 앙천대소출문거(仰天大笑出門去) 즉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고 표현했다. 현종은 궁중에 이원(梨園)을 조성하고 악대와 무녀들을 배치했다. 오균은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이백은 궁중에서 시를 지었고, 이구년(李龜年)은 곡을 지었다. 오균은 지휘자였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시인과 도사라도 결국은 황제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시인의 정신은 항상 자유를 추구한다. 점차 참을 수 없게 된 이백은 미치광이로 변했다. 맨정신으로는 시를 쓰지 못하자..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부저추신(釜底抽薪)

[고전 속 정치이야기] 부저추신(釜底抽薪)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가마솥에서 물이 끓는다. 식히려고 찬물을 붓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아궁이에서 장작을 빼내면 된다. 그것이 부저추신이다. 부저추신은 주역 제10괘인 천택리괘(天澤履卦☰☱)에서 비롯됐다. 천택리괘는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다. 건(乾☰)은 무서운 호랑이다. 태(兌☱)는 가냘프고 어린 소녀이다. 아무리 무서운 호랑이라도 나긋나긋한 소녀의 미소와 교태에는 약하다. 노자에서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즉 유약함이 강강함을 이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유약하면 일단 강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천택리괘의 도리이다. 또한 리괘의 상괘인 건(乾☰)은 중천에 뜬 뜨거운 태양의 형상이며, 태(兌☱)는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를 식..

[고전 속 정치이야기] 구중심처(九重深處)

[고전 속 정치이야기] 구중심처(九重深處) 천지일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국가를 형성한 후, 신속하게 입법, 사법, 행정으로 권력을 나눈 정치체제를 구축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신권(神權)정치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처음부터 독제적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시종일관 전제군주 외의 권력이 형성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삼권분립이라는 정치적 견제제도를 갖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제군주는 산천(山川)의 신을 임명하기도 했다. 군주는 전제왕권이라는 통치제도 아래 각급 기관을 두고 다양한 정무를 분담시켰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통치자는 측근에게 황실 바깥을 다스리게 하는 이내어외(以內馭外), 작은 조직으로 큰 집단을 다스리게 하는 이소어대(以小馭大), 안과 밖을 긴..

[고전 속 정치이야기] 승부불측(勝負不測)

[고전 속 정치이야기] 승부불측(勝負不測)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578년, 북주(北周)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이 죽고 태자 우문윤(宇文贇)이 즉위했다. 자질이 부족했던 그는 중신들을 죽이고, 동궁의 관료였던 정역(鄭譯)에게 국정을 위임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황제 노릇마저 귀찮아서 이듬해 태자 우문천(宇文闡)에게 전위하고, 천원제(天元帝)로 물러나 환락에 빠졌다. 그에게는 5명의 황후가 있었다. 양견(楊堅)은 제1황후의 아버지였다. 양견은 후한말 명신 양진(楊震)의 13대손을 자칭했다. 5대조 양원수(楊元壽)는 북위 초에 무천현(武川縣)의 사마(司馬)를 역임했다. 양씨 일족은 줄곧 거기에서 살았다. 양견의 부친 양충(楊忠)이 북주의 수국공(隋國公)에 봉해지면서 권력의 중심에 들어갔다. 양충은 ‘보륙여(..

[고전 속 정치이야기] 단판승부(單板勝負)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일본의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했던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은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 그러나 아들 가쓰요리(武田勝賴)는 아버지의 능력을 이어받지 못했다. 1575년 4월, 가쓰요리는 중원진출의 요로를 장악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공격하려고 정예군 1만 5000명을 이끌고 나가시노(長蓧)를 포위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연합군 3만 5000명을 이끌고 나가시노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렌꼬가와(連子川)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신겐은 죽었지만 다께다군은 여전히 막강했다. 1572년 미까다가하라 전투에서 신겐에게 혼이 난 적이 있던 이에야스는 가쓰요리가 뒤를 이은 후에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노부나가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장비로 무장했..

[고전 속 정치이야기] 난정집서(蘭亭集序)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수려한 글자가 뜬구름처럼 유유하다가, 갑자기 놀란 용처럼 꿈틀거리다가 똬리를 틀고 있다. 천하제일행서이자, 왕희지(王羲之)를 서성(書聖)으로 만든 작품 난정집서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글씨는 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영화(永和)9년 3월 3일, 소흥 회계산 뒷자락 난정의 유상곡수(流觴曲水)에서 41명의 명사가 모여 지은 시를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좌장인 왕희지가 서문을 지었다. 이 작품으로 왕희지는 천하에서 행서 제1인자가 됐고, 난정집서는 최고의 시집이 됐다. 그러나 난정집서의 진품은 당대 이후에 사라졌다. 역사의 기록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천하제일행서는 당태종 이세민의 소릉에 들어있어야 한다. 근세에 고고학자들이 소릉을 열자고 제안했으나, 결국은 무..

[고전 속 정치이야기] 상호주의(相互主義)

[고전 속 정치이야기] 상호주의(相互主義)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북한정권을 제거하고 통일천하를 이룩한 조광윤이 조보(趙普)에게 물었다. “당말 이래로 제왕의 성이 8차례나 바뀌었다.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되찾으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원인은 방진(方鎭)의 병권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군주는 약하고 신하가 강하면 천하가 안정되지 못합니다.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려면, 방진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군대를 회수해야 합니다.” 조광윤의 친구 석수신(石守信), 왕심기(王審琦)는 궁실을 지키는 금군을 통솔하고 있었다. 조보는 여러 차례 조광윤에게 그들에게 다른 직무를 주라고 권유했다. 조광윤이 말했다. “두..

[고전 속 정치이야기] 인문도시(人文都市)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소주(蘇州)는 평원의 수향(水鄕)이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평원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길에 흐르는 풍경은 좋지만, 기복(起伏)과 곡절(曲折)이 많지 않아 평범하기 때문에 신기한 맛이 떨어진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소주인들은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산을 쌓은 정원을 곳곳에 남겼다. 일본의 정원은 소주에서 따왔다고 해도 좋다. 기복과 곡절이 나타나자, 여러 가지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소주의 정원은 원림(園林)이라고 부르는 대표적인 인문문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원림만으로는 아무래도 평면적이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얄팍한 것을 싫어한다. 보탑(寶塔)이 생기면서 평면적인 풍경이 풍성하게 변했다. 보탑은 수향 소주의 풍경을 입체화했다. 어떤 곳의 풍경이 아름다운가의 여부는 공..

[고전 속 정치이야기] 문화통치(文化統治)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은을 멸망시킨 주는 봉건을 시행할 때 건국에 가장 공을 세운 주공단(周公旦)과 여상(呂尙)을 산동지역에 봉했다. 그러나 각자 통치기반을 구축하는 방법은 상반적이었다. 주공은 무왕이 죽은 후 섭정하느라고 봉지인 노(魯)를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맡겼다. 백금은 아버지 대신 건국의 책임을 지고 곡부로 갔다가 3년이 지난 후 돌아와 보고했다. 주공은 아들에게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었다. 백금이 대답했다. “노에 원래 있었던 풍습과 습관은 물론 예의와 제도도 바꾸느라고 늦었습니다.” 백금과 같은 시기에 봉지로 출발했던 태공망 여상은 제(齊)를 세운 후 5개월이 지나자 낙양으로 돌아와 경과를 보고했다. 주공이 어떻게 빨리 왔느냐고 물었다. 태공이 대답했다. “저는 예의를 간소화했습니다. ..

[고전 속 정치이야기] 망국회한(亡國懷恨)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은 웅장한 황토고원 산서성 태원 출신으로 자를 유지(裕之), 호를 유산(遺山)이라 했다. 강렬한 모래바람과 산서의 상무정신이 어울린 환경은 호걸의 기상을 길러줬다. 금의 선종(宣宗) 흥정(興定) 5년(1221)에 진사가 돼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 그는 중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소수민족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선비족 척발씨로 북위 효문제 시대에 원씨로 고쳤다. 부친 원덕명(元德明)은 관직을 사양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시로 명성을 날렸다. 원호문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숙부 원격(元格)은 조카의 재능을 사랑해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항상 다녔다. 덕분에 원호문은 산동, 산서, 감숙, 섬서 등 유명한 산천을 구경하며 벗을 사귀었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