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소쇄원 설경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전라남도 담양에 가면 유서 깊은 정원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소쇄원(瀟灑園)이다. 조선 중기 정치적으로 실의를 겪은 양산보(梁山甫)라는 사람이 낙향하여 은둔지로 꾸민 정원인데, 자연의 모습을 잘 살린, 졸박하지만 격조 있는 품격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이 정원을 수시로 드나들던 시인 김인후(金麟厚)가 이곳의 정경을 48수의 시로 묘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눈 덮인 풍경에 대한 것이다. 뜰에 깔린 눈(平園鋪雪) 不覺山雲暗(불각산운암) 산 구름 어두운 걸 몰랐는데 開牕雪滿園(개창설만원) 창을 여니 눈이 뜰에 가득하네 階平鋪遠白(계평포원백) 섬돌에도 두루 하얀 눈 쌓이니 富貴到閑門(부귀도한문) 부귀가 한가한 문에 이르렀구나. 소쇄원은 자연..

봄이라서 그립다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어느덧 5월 중순이다. 모든 세월이 다 지나고 보면 덧없이 빠르게 느껴지지만, 그중에서도 봄은 더욱 빠르게 느껴진다. 꽃샘추위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니 하며 봄을 투정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봄은 성큼 돌아서 자리를 뜨려 한다. 당(唐)의 여류시인 쉬에타오(薛濤)는 춘망사(春望詞)라는 시에서 봄을 이렇게 읊었다. 花開不同賞(화개불동상) : 꽃은 피었건만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불동비) : 꽃이 지건만 함께 슬퍼할 님 없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 : 님 계신 곳에 묻고 싶어라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 꽃 피고 꽃이 지는 때를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 꽃에 바람 불고 해는 곧 지려는데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 오기로 한 임은 여전히 ..

초여름엔 꽃보다 이것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 태 봉 교수 입하(立夏), 소만(小滿) 지났으니 이제는 영락없이 여름이다. 밭에서는 보리 이삭이 피어나고,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어댄다. 그러나 현실은 고달팠다. 김매기와 모내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작년 식량은 바닥이 났고, 보리는 아직 익지 않아 먹을 것이 없던 보릿고개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가장 바쁜 철이자 가장 배고픈 시기에도 사람을 위안한 것은 철마다 제철의 모습을 뽐내는 자연이었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라 옛 부터 일러 있고' 널리 알려진 단가(短歌) 사철가의 일부이다. 봄이 꽃이라면 여름은 녹음방초라고 조상들은 읊었던 것이다. 北宋의 정치인이자 문인이었던 왕안쓰(王安石)는 그의 시 '초여름 정경(初夏卽事)'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살다보면 가끔은 뜬금없는 소릴 듣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너 왜 사냐"일 것이다.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다. 1930년대 시인 김상용은 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그야말로 뜬금없이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되뇐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말에는 삶에 대한 달관이 듬뿍 담겨 있다고들 말하는데 이런 뉘앙스의 말은 한시(漢詩)에도 보인다. 당(唐)의 시인 리바이(李白)는 달관(達觀)의 나이가 아닌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 말을 하였다. 리바이(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을 보자.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 왜 푸른 산에 깃들어 있냐고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저절로 한가..

전원생활과 귀농 사이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58년 개띠로 대변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봇물을 이루면서 귀농 인구도 급증하는 추세라고 한다. 요즘의 귀농은 여유로움을 즐기고자 하는 전원생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귀농은 도시의 직장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재취업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고, 삶의 취향이 전원인 사람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하는 것은 일반적인 귀농은 아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삶을 즐기는 경우가 그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이러한 인물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될 터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405년에 귀농을 감행한 타오이앤밍(陶淵明)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41세였고 직책은..

술 외상과 고희(古稀)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에게 실의(失意)는 하나의 숙명이다. 실의(失意)의 원인은 각양각색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실의(失意)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현명한 사람은 실의(失意)를 만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평생을 지독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唐)의 시인 뚜푸(杜甫)야 말로 실의(失意)의 달인이라는 호칭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번번이 과거(科擧) 시험에 낙방하다가, 요행으로 얻은 관직에서도 금방 쫓겨나기 일쑤였다. 거느린 식솔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나가는 것을 수차 보아야 했고, 본인 스스로도 병마와 싸워야 했다. 뚜푸(杜甫)의 인생은 실의(失意)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그것..

느림의 미학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느림이라는 말의 어감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매사에 빨리빨리를 외쳐대면서 느린 것은 그 꼴을 못 본다. 통신이며 교통이며 초스피드 시대인 요즘, 느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 이치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슬로우 푸드니 슬로우 시티니 하는 말들이 있는 것을 보면, 느림은 초스피드 시대에 케케묵은 골동품으로 골방에 처박혀 있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초스피드 시대에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여기 1300년 전 사람인 멍하오란(孟浩然)의 시 벗의 시골집을 지나다(過故人莊)에서 느림의 미학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故人具黍(고인구계서), : 벗은 닭고기며 기장밥을 차려 놓고는 邀我..

장미와 해어(解語)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봄의 여운이 더욱 진해지기 마련인데, 어느 날 문득 담장 너머로 보이는 유월의 덩굴장미가 봄에 대한 미련을 씻어준다.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말을 의식한 듯, 늦깎이 꽃 장미는 유월에 느지막이 유유히 나타나 도도한 자태를 뽐낸다. 요염한 자태에 농염한 향내, 거기에 앙칼진 가시까지 팜므파탈 자체다. 15세기 완고한 유가(儒家) 선비였던 김시습(金時習)은 장미와 전혀 무관할 듯하지만, 그도 이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매화를 좋아하여 아호마저 매월당(梅月堂)이었던 매화 바보의 장미타령이라니 흥미로움이 배가될 수밖에. 갓 피어난 장미 한 송이(四季一朶始開) 一點臙脂惱殺人(일점연지뇌쇄인) : 한 점의 연지인지 남의 애..

허풍(虛風)의 유쾌함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농사에 논농사 밭농사만 있는 게 아니다. 수택(水澤)의 고장에서는 못농사를 주로 하는데, 이 또한 힘들기는 매양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여기에 낭만적 체취가 물씬한 것은 주인공들이 여느 농사와는 판이하게, 꽃과 아가씨이기 때문이다. 7, 8월 성하(盛夏), 물이 그득한 드넓은 못은 그야말로 연꽃천지다. 순결과 청정의 꽃, 연꽃의 즐비를 맵시 난 모습으로 누비는 가녀리고 어여쁜 아가씨는 그 자신이 또 한 송이의 연꽃이다. 마치 특급 모델의 화보 촬영 장면 같지만 사실은 못농사의 일상이라는 게 뜻밖이다. 여자를 꽃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모양이 같아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느낌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낌이 아니라 생김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탕(唐)의 시인 왕창..

압구정의 추억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에게 추억이 있듯이, 땅에도 추억이 있다. 잘 알려진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절실히 이를 일깨운다. 뽕나무 밭(桑田)이 푸른 바다(碧海)가 된 것은 자연적 현상이었겠지만, 기계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는 인간의 힘으로도 그 못지않은 땅의 변신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정평이 난 압구정(狎鷗亭)은 땅의 변신은 자유임을 역설하지만, 실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 이름자에서 이 땅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탕(唐)의 시인 왕웨이(王維)의 시는 압구정(狎鷗亭)의 원형을 가늠케 한다. 장마에 왕추안 시골집에서(積雨輞川庄作) 積雨空林煙火遲,(적우공림연화지), 텅 빈 숲 장맛비에, 밥 짓는 연기 느릿한데 蒸藜炊黍餉東淄(증려취서향동치) . 명아주 찌고,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