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여름엔 그대가 그립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연이은 열대야에 잠 못 드는 밤, 선풍기는 질식이다 뭐다 해서 꺼림칙하고, 에어컨은 냉방병이다 산소부족이다 해서 영 마뜩치 않을 때,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작년 여름 지나며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그 분, 이름 하여 죽부인(竹夫人)이다. 차가운 물성(物性)으로 여름에 환영받는 죽제품에다, 남의 아내에 대한 존칭어인 부인(夫人)을 처음 갖다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여름 나기 용품에 불과한 이 물건이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풍류(風流) 넘치는 그 이름 덕임에 틀림없다. 풍류(風流) 하면 둘째가기 서러운, 여말(麗末)의 천재 시인 이규보(李奎報)가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죽부인(竹夫人) 竹本丈夫比(죽본장부비) : 대나무..

불출문(不出門)의 여름나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물리학적으로 세월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지만, 사람의 느낌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람의 기분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세월은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다. 계절에 따라서도 세월의 속도는 다르게 느껴지는데, 대개는 봄, 가을은 빠르고 여름, 겨울은 느리게 느껴질 것이다. 유독 더위에 약한 사람이라면 여름이 더디 갈 것이고, 빨리 여름이 지나기를 학수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여름날도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아까운 시간이다. 무더위가 싫다 해도 세월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다면, 무더운 여름이라도 소홀함 없이 즐겨야 한다. 탕(唐)의 시인 바이쥐이(白居易)는 나름의 여름나..

비 갠 후에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했다 해도 자연의 거대한 힘을 당해 낼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힘이 가장 센 대통령이 아무리 4대강 사업 덕에 가뭄 홍수 걱정 덜었다 외쳐 봐도, 말없는 자연이 내린 가뭄과 홍수 앞에서는 그 말이 공허할 수밖에 없다. 두 달 넘게 가물다가 내린 비는 반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비가 해갈(解渴) 수준을 넘어 홍수로 이어지면 이제는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인심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끝 모르고 내리던 비가 그쳤을 때, 사람들은 십년체증이 사라진 것처럼 산뜻한 기분이 든다. 탕(唐)의 문장가 류쭝위앤(柳宗元)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름 첫 비 내린 뒤 시내를 찾아(夏初雨后尋愚溪) 悠悠雨初霽(유유우초제) : 끝 모르고 내리던 비 개..

일상의 소중함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살다보면 누구나 마주치는 진부한 화두(話頭)가 아닐 수 없지만, 이 물음에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에 따라 형편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결코 멀리서 찾아지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자신의 지근거리에 숨어있는 것을 모르고 무작정 먼 곳에서 찾아 헤맨다. 소중한 것은 높은 출세도, 벼락부자도 아니다. 때론 구질구질하고 따분하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존재하는 일상(日常)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인생의 관건이다. 탕(唐)의 시인 뚜푸(杜甫)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벼슬을 찾아 떠돌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잠시 쓰촨(四川)성 청뚜(成都)에 초당(草..

별들의 사랑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올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가뭄에, 무더위에, 폭우에 참으로 모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 시제인 그 여름이 되려 하고 있으니 시원섭섭이라는 말이 이참에 딱 어울린다. 삼복(三伏)을 품은 음력 유월이 지나고 이제는 칠석이 들어 있는 칠월이다. 칠월칠석(七月七夕)하면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으니,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그들이다. 이들은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늘에 실재하는 별들의 이름이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떨어져 있어, 만나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숙명적 비극이 이 별들이, 이 캐릭터들이 통시적으로 던지는 메시지이다. 한(漢)의 메이청(枚乘)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에도 이들은 나타난다. 초초牽牛星(초초견우성) : 견우의 별은 아득히 멀고..

다산(納┌) 과 처서(處暑)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다. 입추(立秋)가 지난 뒤의 더위를 남은 더위(殘暑)라 하고, 이마저도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가을 날씨가 되는 것이 바로 처서를 전후한 때이다.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은 천하의 무더위도 흐르는 세월을 거역할 수는 없다. 처분(處分), 처리(處理), 처치(處置), 처결(處決)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處)라는 말에는 없앤다는 의미가 있어서, 처서(處暑)를 더위를 없애다 내지는 입추(立秋) 뒤의 잔서(殘暑)를 처분(處分)하다는 뜻으로 새기는 경우가 많지만, 기실 처서(處暑)의 처(處)는 처녀(處女) 또는 처사(處士)의 처(處)와 같은 쓰임으로 새기는 것이 한결 의미에 부합하다. 처녀(處女)는 자신이 태어난 집을 떠나지 않은 딸(..

오엽(梧葉) 하나 떨어지면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세상 모든 일에는 나름의 전조(前兆)가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봄의 알림이가 매화라면, 가을의 조짐은 아무래도 오동잎에 숨어있다. 매화가 후각적이라면, 오동잎은 청각적이다. 옛사람들은 떨어지는 오동 잎 소리로 가을이 옴을 알아챘던 것이다(梧葉一落盡知秋). 오월에 자주색을 피우는 것으로도, 어린 딸이 장성하여 혼수 장만으로 딸과 나이가 같은 그루터기를 자를 때도 보이지 않던 오동나무의 존재감은, 그 잎사귀 하나를 떨어뜨림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다. 가을이 옴을 알리고자 자신의 몸통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온 잎사귀 하나는 세상에 가을이 왔다는 숙명적 소식을 전하고서야 장렬히 대지에 몸을 맡긴다. 주자(朱子)로 알려진 남송(南宋)의 대유(大儒)이자 문호..

잊혀진다는 것

한시이야기 김태봉 용도폐기(用途廢棄)란 말이 있다. 쓸모가 없어지면 내다버린다는 뜻이다. 본디 물건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쓰다가, 그 쓰임이 끝나면 한쪽에 치워두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배신이니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니 하는 감정적인 말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애당초 물건과 인간의 관계는 쓰임으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건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쓸모가 없어졌다해서 사람을 창고에 치우거나 내다 버릴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쓰임만으로 맺어지는 게 아니다. 그 안에 정서적인 유대감이라는 복잡한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람을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여름 무더위에 사랑을 받다가,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가을이 되면 상자 속에 쳐박혀 있어야 되..

불만백천세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인생백세가 결코 허언이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만 고소원(固所願)이었던 백세 시대를 맞았지만, 인생에 만족을 느끼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짧은 인생에 긴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백세의 인생보다 열배나 긴 것이 있었으니이름 하여 천년 시름(千歲憂)이다. ◈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15 生年不滿百(생년불만백) : 사람은 채 백년을 살지 못하면서 常懷千歲憂(상회천세우) : 늘 가슴에 천년의 시름을 품고 있다네 晝短苦夜長(주단고야장) : 낮은 짧고 정녕 밤은 길기만 하니 何不秉燭遊(하불병촉유) : ..

황진이의 달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음력 8월은 추삼월(秋三月) 중 두 번째 달이라 해서 중추(仲秋)라 불리는데, 중추(仲秋)하면 떠오르는 것이 중추절(仲秋節)이요, 중추절하면 떠오르는 것이 달이다. 달 중에도 보름달이다. 달을 보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고향 생각이지만, 이 못지않은 것이 님 그리움이다. 두 경우 모두 바탕에는 그리움의 정이 깔려있다. 떠나온 고향에도 떠 있을 달, 헤어진 님도 바라볼 달이기에 달을 매개로 헤어짐과 떨어짐의 상처는 치유된다. 굳이 보름달만 고집할 일은 아니다. 초승달도, 반달도 모두 나름의 형상으로 그리움의 정을 돋운다.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을 정도로, 시재(詩才)를 뽐냈던 황진이는 중추(仲秋)의 반달을 보고 과연 어떤 시상(詩想)을 떠올렸을지 자못 궁금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