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138

혁명가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혁명가 김옥균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매국 귀족 박제순의 돌덩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5. 서울 종로구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땅의 팔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9.14 03:00 서울 종로구 화동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뒤편 언덕에는 정체불명인 돌덩이가 보존돼 있다. 안내판을 봐도 정체가 도무지 불명이다.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보존한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은 이 돌덩이는 1905년 을사조약 대표서명자인 외부대신 박제순 집터에 있던 우물돌이다. 새겨진 글자들은 박제순이 썼고, 정독도서관 부지 절반이 박제순 집터였다. 집터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 집터와 겹친다. 김옥균 집터는 이 언덕 아래 잔디밭 부근이었다. 정변을 함께 한 서재필 또한 이곳에 살았다. 두 사람 집터에는 훗..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박종인의 땅의 歷史]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3. 서울 공덕오거리에 서 있는 흥선대원군 별장 금표비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8.31 03:00 | 수정 2022.08.31 03:00 * 유튜브 https://youtu.be/0EmC0OrqvO0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은 용산과 함께 새로운 도심으로 떠오른 지역이다.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도로는 넓다.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서 옛날부터 만리재, 애오개 두 길과 새로 뚫린 백범로 모두 언덕길이다. 그 세 길이 합류하는 지점이 공덕오거리인데, 이 로터리에서 지하철 6호선도 만난다. 사통팔달한 땅 위로 빌딩 숲이 울창하다. 그 지하철 공덕역 3번 출구 옆에 공원이 있는데 공원 모퉁이에는 작은 비석이 ..

‘헤이그 밀사 이준 할복자살’은 대한매일신보의 가짜뉴스였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311. 모두가 쉬쉬했던 ‘미화된 역사’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8.10 03:00 1962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됐다가 현지에서 죽은 이준의 사인 논란에 대해 자살설과 분사설에 대한 각종 기록과 증언을 취합한 문건이다. 위 81~83페이지에 “신채호와 양기탁, 베델이 민족 긍지를 위해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조작했다”는 증언이 수록돼 있다. ‘할복자살’과 ‘분사(憤死)’로 대립하던 이준의 죽음에 대해 국사편찬위는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로 타협을 봤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유튜브 https://youtu.be/y4vZresOHj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 ‘해방 후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아..

가토 기요마사가 통과해서 남대문이 ‘총독부 보물’이 됐다고?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토 기요마사가 통과해서 남대문이 ‘총독부 보물’이 됐다고? [박종인의 땅의 歷史] 310. 남대문 괴담과 사라진 국보 번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8.03 03:00 서울 남대문은 국보1호였다. 2021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관련법을 개정해 지정번호 표기를 없애면서 ‘국보 남대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남대문으로 입성해 한성을 함락시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남대문을 보물1호로 등재시켰다는 이야기가 초래한 결과다. 찬찬히 뜯어보면, ‘일본 전승 기념을 위한 남대문 보물 지정’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 괴담이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xdrfm8uSAwE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밤..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일본서 뇌물 2만원(25억원)을 받았다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일본서 뇌물 2만원(25억원)을 받았다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 받은 황제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이토 히로부미 대사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주었다 -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0.21 03:00 을사조약 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무엇을 했나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다.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이 대한제국(이하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05년 9월이었다. 황제 고종은 앨리스를 공주처럼 접대하며 조선 독립을 호소했다. 이미 두 달 전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는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우선권을 맞교환한 이후였다. 그리고 두 달 뒤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했다. 조선이라는 민족공..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수용할 수 있다’-한일의정서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수용할 수 있다’-한일의정서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9. 1904년 한일의정서 한 장에 사라진 용산 둔지미 마을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경원선 용산역과 서빙고역 사이에 있는 이 건널목 이름은 ‘돈지방’이다. 조선 후기 이 일대 행정명 ‘둔지방(屯之坊)’이 변형된 명칭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둔지방’이었고 현 한강대로 서쪽 지역은 ‘용산방(龍山坊)’이었다. 각각 해당지역 최고봉인 ‘둔지산’과 ‘용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둔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 전 지역을 ‘용산’이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둔지산’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둔지산기슭에 있던 마을 ‘둔지미’와 그 주민들에 대한 기억도 실종됐다./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

[박종인의 징비] 복원한다는 광화문 월대, 있기는 했나?

[박종인의 징비] 복원한다는 광화문 월대, 있기는 했나?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7.17 15:20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사진. 광화문 앞 월대가 훼손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는 17일 서울 광화문 앞을 가로지르는 사직로 도로 모양 변경 공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2023년 10월까지 추진하는 ‘광화문 월대 복원’에 앞서서 직선형인 광화문 앞 도로를 곡선형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선행돼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복원할 월대’가 과연 존재했는가. 둘째, 복원할 가치가 있는가. 서울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月臺)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딱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1866년이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경복궁영건일기’라는 문서다. 1866년 ..

가짜뉴스를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권력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짜뉴스를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권력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8. 청와대 옛 관저 뒷산 ‘천하제일복지’ 암각의 비밀 청와대 옛 대통령 관저 뒷산 기슭에 새겨져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여섯 글자. 1990년 청와대 신축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 글자는 ‘청와대 명당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물증이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이 글자는 1850~1860년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던 시기에 누군가가 새겨넣은 글자로 추정됐다. 궁궐 중건이라는 대규모 공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왕권에 정통성을 주려는 의도였다. 당시 ‘기이하게도’ 자하문 부근 땅 속에서는 ‘을축년(1865년) 흥선대원군이 이 잔을 받으리’라고 새긴 구리 그릇이 발굴되기도 했다. 각자가 됐든 구리 그릇이 됐든 도참과 풍수를 ..

세종의 실수...“사또를 고소하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세종의 실수...“사또를 고소하는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7. 세종의 실수, 수령고소금지법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많은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하지만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 시스템 완성을 위해 마련한 ‘수령 고소 금지법’은 조선 백성에 큰 상처를 남겼다.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고발하지 못한 백성은 그 억울함을 삭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7.06 03:00 * 유튜브 https://youtu.be/7L_og6KoxfY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국세력의 설계: 중앙집권 새 나라를 세울 때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끄는 군사-신진사대부 연합 세력이 꿈꾼 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중..

나라를 망가뜨린 노론 조작정치의 그늘[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라를 망가뜨린 노론 조작정치의 그늘[박종인의 땅의 歷史] 306. 정읍 송시열 수명유허비 ‘독수(毒手·독 묻은 손)’의 비밀 충북 괴산에는 조선 후기 노론 영수 우암 송시열 무덤이 있다. 영조 때 경기도 수원에서 이리로 이장된 묘 아래 비각 안에는 정조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효종이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송시열은 효종을 독대(獨對)한 자리에서 북벌 10년 계획을 세우자는 제안을 “마음 수양부터 한 뒤 뭘 해도 하라”며 거부한 인물이다. 노론 지지를 받으며 등극한 정조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비문에 기록했다. 송시열이 지휘한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은 정적인 남인과 소론을 대상으로 수시로 공작정치를 벌였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여러 비석에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