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138

“한강 남쪽은 어디든 일본에 줄 테니 나를 살려내라”[박종인의 땅의 歷史]

305. 조선 대표 건달 권력자, 선조 아들 임해군 경기도 남양주에는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 무덤이 있다. 혼이 저승으로 무사히 가도록 인도해주는 장명등은 무덤 아래 지붕과 몸체가 떨어져나간 채 팽개쳐져 있다. 임해군은 막내 순화군과 함께 백성에게 악명을 떨친 건달이었다. 폭력으로 모은 재화가 많아서 임진왜란 개전 초기 임해군이 살던 집은 난민이 떼로 침입해 불태웠다. 전쟁 기간에도 멈추지 않은 악행에 질린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 기요마사 부대에 넘겨버렸다. 임해군은 전쟁 후에도 악행을 일삼다 유배당한 뒤 살해됐다. 부서진 장명등은 그 악행에 대한 흔적이다. /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6.15 03:00 * 유튜브 https://youtu.be/..

종두법 선구자들은 모두 당쟁에 휘말려 역사에서 사라졌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4. 지석영보다 80년 먼저 종두법을 개발한 박제가, 이종인, 정약용 304. 지석영보다 80년 먼저 종두법을 개발한 박제가, 이종인, 정약용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구내 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 있는 지석영 동상. 1880년 일본으로부터 우두법과 근대 의학을 도입한 인물이다. 우두법이 도입되기 전 1800년 북학파 학자 박제가와 의사 이종인은 정약용과 함께 천연두 환자 고름을 이용한 인두법을 연구해 접종법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은 개발 이듬해인 1801년 역모와 천주교 신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유배형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인두법 또한 종적을 감췄고, 조선을 500년 동안 괴롭혔던 마마는 근 100년을 더 기다려 지석영에 의해 치료되기 시작했다. /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

선조는 정말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포기했을까?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조는 정말 류성룡의 반대로 명나라 망명을 포기했을까?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3. 임진왜란 발발 직후 선조의 명나라 망명이 무산된 진상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鳥谷關)’. 1592년 4월 26일 임진왜란 개전 보름이 못돼 새재를 무혈통과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한성에 임박하자 사흘 뒤 선조는 의주로 도주했다. ‘“명나라로 가겠다”는 선조를 류성룡을 비롯한 관료들이 단념시켰다’는 통설과 달리 선조는 “여진족 지역 폐기된 관아 건물에 수용하겠다”는 명 정부의 실질적인 망명 거부 통보에 망명을 포기했다. 조곡관은 2년 뒤인 1594년 류성룡 건의에 의해 충주사람 신충원에 의해 건축됐다./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5.25 03:00 * 유튜브 https://youtu.be/TPB5z..

조선 왕 순종, 식민 통치 미화작업에 끌려다녔다

조선 왕 순종, 식민 통치 미화작업에 끌려다녔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2. 식민 조선의 왕, 왕공족 ②1917년 순종의 천황 알현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순종 일행이 신의주까지 다녀온 서순행(西巡幸)을 기념해 촬영한 단체 사진이다. 가운데 대한제국 황제 융희제 순종이 앉아 있고 왼쪽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다. 나라가 망하고 7년이 지난 1917년 6월, ‘조선 창덕궁 이왕’에 책봉된 전 제국황제 순종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 천황이 책봉한 왕족 자격으로 천황 다이쇼를 알현했다. 중국에 사대했던 조선 500년사에도 없었던 초유의 일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5.18 03:00 유튜브 https://youtu.be/GdcmvXC7..

[박종인의 땅의 歷史]일본 천황은 이들을 조선 왕족으로 책봉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일본 천황은 이들을 조선 왕족으로 책봉했다 301. 식민 조선의 왕공족(王公族) ①고종의 자녀들 덕혜옹주(1912~1989). 대마도 번주 가문 장손에 시집간 덕혜옹주는 소아성 치매를 앓다가 해방 후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살았다. 아버지는 고종이고 어머니는 복녕당 양씨다. /문화재청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5.11 03:00 * 유튜브 https://youtu.be/q1JO1XZlVaI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황족에서 일본 왕족으로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끈질기게 근대화를 시도한 일본이 시대를 주도했다

끈질기게 근대화를 시도한 일본이 시대를 주도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0.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⑧/끝 시모노세키조약과 종전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부두에는 청일전쟁 종전협상장으로 사용됐던 옛 연회장 ‘춘범루(春帆樓)’가 있다. 1895년 종전협상 그대로 재현된 회담장에는 청일 양국 대표단이 앉은 자리가 표시돼 있다. 오른쪽 앞은 ‘대청제국흠차두등전권대신’ 이홍장, 건너편은 ‘대일본국전권변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자리다. 전쟁터였던 조선은 초대받지 못했다./박종인 기자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5.04 03:00 시모노세키 풍경(風景) 1: 승자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부두에는 ‘춘범루(春帆樓)’라는 연회장이 있다. 복어 요리 전문 요리점이다. 일본어로는 ‘슌판로’라고 읽는다. ..

[박종인의 땅의 歷史] 정조의 사상 통제로 조선 학문은 몰락했다

299. 조선 학문의 종말 선언② 문체반정과 백탑파의 몰락 1803년 음력 7월 2일 훈련도감 무관 108명이 훈련대장인 영안부원군 김조순 후원으로 서울 창신동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뒤쪽에 원각사 10층석탑이 보인다. 석탑은 흔히 백탑(白塔)이라 불렀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같은 이용후생을 주장한 학자들이 백탑 주변에서 수시로 만나 백탑파를 형성했다. 김조순은 백탑파 수장인 박지원 글을 맹비난하고 정조의 ‘문체반정’에 적극 동조한 관료였다. 그 덕에 김조순은 정조 사위가 됐고,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 문을 열었다. 백탑파는 학문 탄압 속에 사라졌고 그 학문도 맥이 끊겼다. 박지원이 죽기 2년 전 김조순이 후원한 이 시회 그림은 바로 학문 탄압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들은 시회를 기념하..

[박종인의 땅의 歷史] 청일전쟁 후 조선 정부는 10년을 허송세월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청일전쟁 후 조선 정부는 10년을 허송세월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8.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⑦ 대한제국과 잃어버린 10년 1929년 중국 하북성 제1공창이 제작한 ‘중화 국치 지도(中華國恥地圖)’. 그때까지 300년 동안 외세에 의해 상실한 중국 실지(失地)를 표시한 지도다.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제국(諸國)에 빼앗긴 영역을 표시한 ‘국치 지도’는 1916년 중화제국 황제를 자칭한 원세개에 의해 제작이 시작됐다. 그런데 조선 또한 ‘실지’로 표시돼 있고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독립을 허락 받고 1910년 일본에 멸망’이라고 적혀 있다. /미국 국회도서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4.20 03:00 중국 국치 지도와 조선 독립경축절 1911년 ..

[박종인의 땅의 歷史] “요망한 이단 서적은 일절 수입을 금하고 모두 불태우라” - 정조

[박종인의 땅의 歷史] “요망한 이단 서적은 일절 수입을 금하고 모두 불태우라” - 정조 297. 조선 학문의 종말 선언① 1786년 병오소회(丙午所懷) 정조 본인과 아버지 사도세자, 아들 순조가 태어난 창경궁 위로 낮달이 떠 있다.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불렀다.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달의 주인 되는 늙은이’이라는 뜻이다. 본인은 ‘치우침 없이 밝힘으로써 스스로도 밝다’고 자평했지만 정조 시대는 일관되게 성리학 이외 학문을 배격한 학문의 암흑기였다. 1786년 ‘병오소회’는 그 암흑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4.13 03:00 * 유튜브 https://youtu.be/iNnpIT9q55A 에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관광객..

500년 쌓인 모순 뒤엎은 그들 “두번 다시 나라를 그르치지 말자”

500년 쌓인 모순 뒤엎은 그들 “두번 다시 나라를 그르치지 말자”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6.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6. 500년 모순을 뒤집은 갑오개혁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은 1894년 조선정부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뒤 부관참시와 능지형을 받았다. 일본 지식인들은 그 잔인한 처형에 경악했다. 고종 정부가 환호작약하는 동안 전쟁이 터졌다. 대원군과 갑신정변 세력이 꿈꾸던 세상을 하나씩 그려갔지만, 일본 측 지원 속에 시작된 갑오개혁은 양날의 칼이었다. 김옥균 피살과 부관참시를 묘사한 일본 판화. /영국박물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4.06 03:00 갑오개혁의 시작 1894년 7월 13일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 요구에 항복해 정부 내에 개혁 담당 기관인 ‘교정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