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138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미조약 체결 전 조선 대표는 청 황실에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287.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숨은 對中 굴욕외교 인천 개항장거리에는 거대한 공자상이 서 있다. 청국과 일본 조계지를 경계 짓는 계단 꼭대기다. 그 위에는 1882년 미국과 조선이 수호조약을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기념비가 서 있다. 오른쪽 난간 위 황금 용이 장식된 담장 아래다. 당시 조선 대표는 중국의 속국 신하로 청나라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치렀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1.12 03:00 * 유튜브 https://youtu.be/ymEgM2QmSGs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천 개항장거리는 영역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높은 계단을 경계로 동쪽은 일본 조계지였고 서쪽은 청나라 조계지였다. 복원된 지금 풍경도 비슷하다. 계단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갑오년 7월, 天下가 뒤집어졌다

286.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① 전조(前兆)들 일본 화가가 그린 청일전쟁 풍도해전도.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는 청나라 함대를 그렸다. /영국박물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2.01.05 03:00 청나라 화가가 그린 풍도해전 판화 '조선수전 득승첩도'. 사실과 달리 청나라 함대가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고 묘사돼 있다. /영국박물관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① 전조(前兆)들 전조(前兆) 1 – 유미유동(留美幼童) 심수창 187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 정부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청소년들을 유미유동(留美幼童)이라고 한다. 근대 문물을 배워 나라에 충성하라고 보냈던 이 120여 어린이들은 1881년 “배우라는 기술은 팽개치고 정신이 서화(西化)됐다”는 이유로 소환됐..

“못생긴 계집을 내놓으면 왕명 불복종으로 벌한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5. 중국에 바친 여자, 공녀(貢女) 경복궁 행랑에 석양이 내린다. 조선 전기에 이 궁궐에 딱 한 번 놀러와 보고 명나라로 떠났던 여자들이 있다. 명 황실에 바쳐진 공녀(貢女)들이다. 공녀들은 크게는 나라를 위해 작게는 집안을 위해 희생된 ‘물건’ 취급을 받았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2.22 03:00 * 유튜브 https://youtu.be/Z31O0qE4vzU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로 가는 공녀(貢女) 선발을 피하기 위해) 딸자식 둔 어떤 자는 사윗감 서넛을 동시에 부른 뒤 맨 먼저 온 사내에게 시집보낸다. 강보에 싸인 어린 계집을 유모가 안고 시집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집에서는 하루에 딸 서넛을 한꺼번에 시집보내기도 한다. 서울에 남은 총각과 처녀..

화성에 행차한 정조 “내 아버지처럼 군복을 입고 산성에 올랐느니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4. 사도세자 아들 정조가 은폐해버린 기록들 경기도 팔달산 수원화성에 있는 화성장대. 장대는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현 융릉)에 참배한 뒤 화성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많은 의혹 속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 의해 상당량의 사료가 왜곡되거나 삭제되고, ‘무사 기질과 현명함을 갖춘’ 군주로 변신했다. 현륭원 참배길에 정조는 ‘그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어김없이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2.15 03:00 * 유튜브 https://youtu.be/kUOKIBCnJIQ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재위 15년째인 1791년 마침내 화성으로 이장..

[박종인의 땅의 歷史] 노론을 떨게한 정조의 한마디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

283. 금등지서의 비밀과 융건릉 사도세자 무덤인 경기도 화성 융릉은 홍살문-정자각-봉분 배치가 일직선이 아니다. 봉분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방향도 다르다. 아버지 사도세자 복권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정조가 ‘천 년 만에 있을 길지’를 고른 끝에 내린 풍수학적인 배치다. 정조는 세자를 죽인 영조가 적어내린 한(恨)을 품은 문서 ‘금등지서’를 17년 동안 숨겨놓고 노론 눈을 피해 아버지 복권 작업을 벌였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2.08 03:00 * 유튜브 https://youtu.be/JRL4Lvz1SsY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가위를 7일 앞둔 1793년 8월 8일 왕위에 오른 지 17년이 된 노련한 국왕 정조가 문서 한 장을 꺼내 읽는다. 듣는 사람은 전·현직 대신..

[박종인의 땅의 歷史] 壬亂 직후 일본은 조선에 그릇 공장을 세웠다

[113]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와 부산요(釜山窯)의 비밀① 1592년 5월 23일 새벽, 1만8천 일본군 대마도 출항… 이틀 만에 동래성 함락4 13년 지난 2005년 5월, 부산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학살 유골 쏟아져 동래부사 송상현 ‘피하라’는 日장수 청 거부… 사후 일본군이 장례 치러 남원과 웅천 등지에서 조선 도공 집단 납치… 상당수는 종전 후 귀국 거부 국교 재개 직후 일본은 부산에 그릇공장 ‘부산요’ ‘왜 일본은 OEM 공장을?’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18.03.07 03:03 1913년 어느 날 일본 대마도 제1 도시 이즈하라(嚴原) 경매장에 대마도주 소씨(宗氏) 가문 소장품이 대거 출품됐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역사와 문화 자료는 물론 영화로운 소씨 문중 재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왜 그는 혁명을 택하지 않았을까

[123] 14대 조선 국왕 이연과 조선 군인 이순신 민심과 군사력 모두 갖춘 군인 이순신… 전쟁 초부터 ‘軍神’ 추앙 ’명나라 벼슬 받았다' 소문… 선조 임금 눈밖에 나… 선조 “죽여야 할 자” 고문과 수감… 백의종군… 칠천량해전 대패로 넉달 만에 사령관 복귀… 선조 “할 말 없다” 고백 명량대첩 승리 후 선조 “사소한 공에 불과” ’우리 역사가 개탄스럽다' ‘간신배들이 국정 그르쳐’ ‘군주를 섬겨야’ 이순신, 심경에 혼란 보여 종전 후 대륙은 명-청 교체, 일본은 새 막부 정권… 조선은 ‘부패 없애달라’ 한산도 주민들 청원 이순신이 원했던 세상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18.05.23 03:01 군인 이순신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계급장을 떼이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무계급으로 전투에 ..

[박종인의 땅의 歷史] 유관순의 魂은 어디에 쉬고 있을까

[125] 망우리 집단 무연고 분묘와 유관순 1920년 9월 28일 아우내 3·1운동 주도한 유관순, 옥중에서 사망…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혀 1937년 경성 인구과밀화, 이태원묘지 망우리로 이전… 주택단지 건설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18.06.06 03:01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일본 식민지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감옥 여자 8호 감방에서 한 소녀가 죽었다. 나이는 열여덟이고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다. 14일 뒤 소녀가 다니던 이화학당으로 시신이 운구됐다. 이틀 뒤 시신은 정동교회에서 인수해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소녀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름은 유관순, 그 소녀 영혼 이야기다. 망우리 무연고 분묘 합장비 서울 중랑구 망우리에 있는 묘지공원 이름..

[박종인의 땅의 歷史] 왕이 宮을 버렸다

[146] 아관파천(俄館播遷)과 국가 최고 지도자 고종 박종인 선임기자 유튜브 https://youtu.be/oDlSjsRNLvQ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조, 인조 그리고 고종 500년 조선왕조 역사에서 궁궐을 탈출한 왕이 셋이다. 횟수는 다섯 번이다. 1592년 양력 6월 9일 임진왜란 개전 17일 만에 선조가 폭우 속에 의주로 갔다. 경복궁은 불바다가 됐다. 이듬해 양력 10월 24일, 1년 넉 달 만에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폐허가 된 경복궁 대신 성종 큰형인 월산대군 종택에 살다 죽었다. 아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했다. 지금 공식 명칭은 덕수궁이다. 1623년 4월 12일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경운궁에서 즉위했다. 열한 달 뒤인 1624년 3월 26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1719년 통신사 신유한 “어찌하여 오랑캐가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말인가!”

[156]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⑧성리학과 난가쿠(蘭學)·中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19.03.13 03:00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아카마신궁 앞 부두에는 조선통신사 기념비가 서 있다. 정확하게는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 기념비다. ‘엄류(淹留)’는 머물렀다는 뜻이다. 2001년 한일의원연맹이 세웠다. 임진왜란 종전 후 조·일 양국은 각각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교류를 재개했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이어진 통신사는 한성을 떠나 부산~쓰시마~시모노세키~오사카를 거쳐 에도(江戶·현 도쿄)를 왕래했다.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통해 근대 세계를 흡수하던 일본과 성리학적 세계관을 심화시키던 조선, 그 지성(知性)과 지도층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틀림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