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투항 권유 받은 장쭤린, 스스로 수갑·족쇄 차고 무릎 꿇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8〉 장쭤린은 1912년 3월부터 1928년 말까지 집권한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총통보다는 대원수 직함을 좋아했다. 1928년 1월 즈진청(紫禁城·자금성). [사진 김명호] 1626년, 후금(後金)의 칸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선양(瀋陽)에서 세상을 떠났다. 8년 후 아들 황타이지(皇太極·황태극)가 부족들을 평정했다. 선양을 셩징(盛京)이라 높여 부르고 천제(天祭)를 올렸다. 청 제국을 선포하고 여러 부족의 족칭(族稱)도 만주족으로 통일시켰다. 황타이지 사후 푸린(福臨·복림)이 황위를 이었다. 베이징으로 천도한 순치제 푸린은 셩징을 펑텐푸(奉天府)로 승격시켰다. 만주 전역(동3성)의 군·정을 총괄할 셩징장군을 파견했다. 장쭤린, 장인 돈으로..

만주총독 자오얼쉰, 마적 장쭤린을 정부군에 편입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7〉 러·일전쟁 발발 전인 1903년 가을, 요동반도의 끝자락 뤼순(旅順)을 방문한 자오얼쉰(앞줄 오른쪽 둘째). 자오얼쉰 왼쪽은 동생 자오얼펑. [사진 김명호] 청(淸)제국 멸망 17년 후인 1927년 9월 3일, 83세의 노인이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국의 언론매체가 마지막 만주(당시는 동3성)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의 사망을 연일 대문짝만 하게 다뤘다.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군사정변과 중국 공산당의 첫 번째 무장폭동으로 온 중국에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할 때였다. 일본 위력에 놀란 서태후가 파견 인재 발굴·양성 기반 구축에 역점 공직자에게 진보·효율·절약 강조 표준서 어긋나면 가차없이 처벌 새 화폐 만들고 자본가·지주 단..

러허사변 참가한 요시코, 일본 기녀들 동원해 관동군 격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6〉 중국은 나라가 크다 보니 일본과 내통한 정권도 많았다. 1933년 3월, 자치정부 선포식에 참석한 인루겅. 일본 패망 후 총살로 삶을 마감했다. [사진 김명호] 1933년 2월 중순 일본 관동군이 러허(熱河)를 침략했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관동군의 묵인하에 조직한 안국군(安國軍)을 이끌고 작전에 참여했다. 요시코는 군 지휘 경험이 없었다. 일본 기녀(妓女)들을 동원해 관동군의 사기진작에 힘썼다. 항일영웅 마덴산 유혹하러 갔다 일본 헌병대 장교 몽둥이로 패 소녀 시절부터 알던 도조 히데키 일본 요릿집 인수해 경영 맡겨 구룡보검 주고 풀려난 마한싼 일 패망 후 요시코 체포하기도 요시코는 대담하고, 거칠었다. 관동군과 만주군이 마덴산(馬占..

요시코 “중국인들끼리 죽고 죽이게 정보 넘기자” 일본 설득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5〉 1934년 6월 16일 ‘국민혁명군 중앙군관학교(황푸군관학교의 본명)’ 성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열병식을 진행하는 장제스(앞줄 왼쪽 첫째)와 왕징웨이(오른쪽 셋째). 오른쪽 둘째는 국부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 한때 쑨원의 후계자였던 왕징웨이는 군에 기반이 없었다. 결국 일본과 합작, 중국역사상 최대의 한간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지난 60여년간 중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조직이었던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 국장 다이리(戴笠·대립)와 가와시마 요시코의 합작설이 그치지 않았다. 길지만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1931년 3월,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정보기관 설립에 착수했다. 특무..

"北, 총 쏘기 전 밧줄로 묶어 끌고갔다…줄 끊겨 2시간 수색도"[출처: 중앙일보] "北, 총 쏘기 전 밧줄로 묶어 끌고갔다…줄 끊겨 2시간 수색도"

함민정 기자 인천해양경찰서는 지난 24일 인천시 옹진군 소연평도 해상에서 최근 북한의 총격으로 사망한 공무원 이모씨가 타고 있던 어업지도선 무궁호10호를 조사했다. 사진은 무궁화10호에 남아 있는 이씨의 슬리퍼. 인천해양경찰서=연합뉴스 북한군이 실종 공무원 이모(47)씨를 해상에서 발견한 뒤 줄에 묶어 이동하다가 중간에 놓쳐 수색 작업까지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북한이 이씨를 6시간 동안 붙잡아둔 채 감시하다가 총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내용이다. 25일 중앙일보의 취재에 따르면 복수의 국회 국방위 위원들은 북한군이 이씨를 해상에서 밧줄로 포박해 이송했으며 도중에 줄이 끊기는 등의 이유로 실종돼 찾아다녔던 것을 국방부가 파악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전날 국방부의 비공개 현안보고 내용을 토대..

일어·중국어 유창한 청왕녀, 일본의 중국 침략전 기획 참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4〉 1932년 겨울 도쿄에 도착한 리튼조사단 일행. 왼쪽 넷째가 단장인 전 영국 총독 리튼. [사진 김명호] 1927년 여름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는 일본을 떠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뤼순(旅順)에 정착했다. 양부 가와시마 나니에(川島浪速)는 요시코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관동군 참모장과 펑톈(奉天) 총영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게 편지를 보냈다. “10년 전 양녀의 생부 숙친왕(肅親王)과 만·몽독립군을 일으킨 몽고 장군 바브자브의 아들 간주르자브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다롄(大連)에 주둔 중이다. 숙친왕은 바브자브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자식들 대에도 인연이 계속되기를 염원했다.” 그해 가을 다롄의 야마도 호텔에서 관동군 참모장이 주재한 요시코와 ..

청 왕조 부활 꿈꾼 숙친왕, 힘 빌리려 일본 짝사랑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3〉 소녀 시절 가와시마 요시코는 육군대학 교관 도조 히데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935년 10월 10일 밤,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에 도착한 관동군 헌병사령관 도조 히데키(맨 앞).[사진 김명호] 1900년 5월,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서태후는 황급히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산시(山西)성 경내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였다. 먼저 와있던 숙친왕 산치(善耆·선기)를 불렀다. “베이징으로 돌아가라. 리훙장(李鴻章·이홍장)과 함께 뒷일을 수습해라.” 청 망하자 상인으로 변장한 숙친왕 일본 헌병들 경호 속 베이징 탈출 만·몽독립론 외친 통역사 가와시마 숙친왕과 자주 머리 맞대고 밀담 동북 3성 아우른 대제국 건설 야망 일 영사관·군 제동으로 거사 실패 숙친..

대한간 가와시마 요시코의 죽음, 아직도 역사 속 비밀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2〉 항일전쟁 승리 후 중국 전역에서 한간과 일본 간첩 체포 사태가 벌어졌다. 간첩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1945년 가을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1998년 4월 1일, 베이징의 유서 깊은 음식점에서 혁명 만화가 딩충(丁聰·정총)이 “중국은 만우절이 필요 없는 나라”라며 좌중을 웃겼다. “100여 년간, 어중간한 사람들까지 혁명 타령하며 몰려다녔다. 나도 한때는 좌파 소리 들으며 우쭐했다. 진보나 좌파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주접떨고 다니는 좌경유치병 환자였다. 모였다 하면 황당한 소문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우절 아닌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50년 전 만우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의 총살이 화제였..

천자껑 “왜구와 평화 논하는 공직자·군인, 국가 해치는 한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1〉 동생(뒷줄 오른쪽 둘째)과 함께 최승희 무용단 공연을 관람 후 기념사진을 남긴 가와시마 요시코(의자에 앉은 사람). 왼쪽 첫째는 훗날 한국무용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최승희의 수제자 김백봉 선생. 1943년 수저우(蘇州)의 둥싱로우(東興樓) 정원. [사진 김명호] 중국은 오래전부터 소수민족 침략자에게 한족의 이익을 팔아먹는 사람을 한간(漢奸)이라고 매도했다. 세월과 함께 의미도 변질됐다. 청나라 말기 개혁파와 혁명파가 충돌했다. 쑨원(孫文·손문)의 동맹회(同盟會)는 무장혁명을 외쳤다. 개혁으로 만주족 정권의 유지를 주장하던 개혁파들을 한간이라 몰아붙였다. 정파가 다르면 서로 한간이라 물어뜯는 일이 한동안 계속됐다. 항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년 11..

우이팡 “금하는 것 소통만 못하다”…기숙사에 연인실 만들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0〉 인민복 입고 제3야전군 사병들과 함께 춤추는 우이팡. 1949년 5월 초, 진링여자대학 체육관. [사진 김명호] 진링여자대학의 시설과 교육환경은 당대 최고였다. 교장 우이팡(吳貽芳·오이방)은 하나를 더했다. 당시 국립 진링대학에는 잘생긴 남학생들이 많았다. 진링여대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명승지 쉬안우후(玄武湖) 인근은 해만 지면 진링여대와 진링대학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불온 학생’ 체포하러온 경찰에 우이팡 “나를 잡아가라” 저지 국민당 교육부장 자리 두 번 거절 대만 함께 가자는 전화 받지도 않아 공산당 산하 장수성 교육청장 맡아 우이팡 만난 마오 “신중국 영광” 진링여대는 밤 9시만 되면 기숙사문을 닫았다. 우이팡은 새벽에 학교를 산책하는 습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