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⑪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⑪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김홍도 (1745-1806) 봄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아래 물이로다 이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속인가 하노라 - 오주석 발굴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 신라 때의 솔거 이후 우리나라 그림의 전통을 확립한 천재 화가 김홍도가 남긴 시조다. 이 시조는 미술사가 오주석(1956~2005)씨가 ‘단원 특별전’을 준비하다가 발견했다. 단원이 그린 ‘주상관매도’는 화폭에 그림이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데 조각배에서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하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꽃을 쳐다보는 노인과 다소곳이 옹송그린 뱃사공이 있다. 노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가파른 절벽에 핀 꽃나무가 있다. 그림의 여백이 하도 넓어 어..

⑩ 개화

⑩ 개화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개화 -이호우 (1912-1970)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 현대문학 (1962) 시조의 문학 선언 꽃이 피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소재의 선택과 표현도 탁월하지만 시조를 전통적인 형식에서 탈피시켰다. 즉 초장, 중장, 종장을 연으로, 각 구를 행으로 배열했다. 시조의 3장6구를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음수율의 제약에서도 과감히 벗어나 있다. 이로써 시조는 더 이상 노래(唱)가 아니고, 읽는 시(문학)임을 선언하였다. 그 이후 많은 경우 시조의 행과 연의 배열이 이미지의 전개에 따라갔으니 현대시조의 일대 변모를 선도했다. 1940년 그의 아름다..

⑨ 이시렴 부디 갈다

⑨ 이시렴 부디 갈다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이시렴 부디 갈다 -성종 (1457-1495) 이시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네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일러라 - 해동가요 왕이 신하에게 바치는 노래 성리학의 조선은 왕에 대한 사대부들의 충성의 노래가 넘쳐난다. 세종조 재상을 지낸 고불 맹사성은 시조 강호사시사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일들이 모두 왕의 은혜라고 노래했다. 가사의 대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듣기 민망할 정도의 연군(戀君)의 노래다. 그런데 오직 하나, 왕이 신하에게 바치는 노래가 있으니 바로 이 시조다. 홍문관 교리 유호인은 문장이 좋아 성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가 낙향하려 하자 왕이 만류하며 부른 노래다. 유호인이 노모를 봉양..

⑧ 어느 날

⑧ 어느 날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어느 날 -김상옥 (1920-2004)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한국대표명시선100 현대시조의 문학적 완성도 확립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아버지가 마련해준 새 구두를 신고 저만치 가는 딸을 보며 읊은 소회다. 그렇다. 애타게 사무쳤던 일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스무 살 때인 1939년 10월 ‘문장’ 제1권 9호에 시조 ‘봉선화’가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고, 11월에는 동아일보 제2회 시조 공모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초정 선생은 시와 시조를 구분하지 않았다. 창(唱)으로 불리던 시조가 현대에 와서 문학이 되었으니, 시조는 시로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⑦ 절명시(絶命詩)

⑦ 절명시(絶命詩)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절명시(絶命詩) -성삼문 (1418-1456)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 청구영언 충신이란 무엇인가? 성삼문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의 사신을 따라가서 음운을 연구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낙형(烙刑·달군 인두로 살을 지짐)을 당한 뒤에 거열형(車裂刑·사지를 찢어 죽임)된 시신은 각지에 나뉘어졌다. 그의 남계(男系) 친족은 젖먹이까지 모두 죽여 멸문..

⑥ 석류

⑥ 석류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석류 -조운 (1900~1960년대 말?)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 연간조선시집 현대시조의 교과서 절창이다. 잘 익어 스스로 빠개진 석류를 최상의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우툴두툴한 외모. 그러나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알알이 붉은 모습. 어느 시인은 석류의 이런 모습을 “홍보석 같은 그 맛을 알알이 맛보노니”로 묘사하기도 했다. 시인은 석류에 자신의 모습을 대입시킨다. 그러므로 이 시조는 열린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좋은 시의 한 전형이라고 하겠다. 윤곤강 시인은 “시도 여기까지 이르면 시신(詩神)도 감히 시 앞에 묵언(默言)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19..

⑤ 단장가(斷腸歌)

⑤ 단장가(斷腸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단장가(斷腸歌)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청구영언(靑丘永言) 세상에 이렇게 슬픈 노래가 또 있을까? 숙부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노산군은 유배지 영월에서 사약을 받는다. 그때 집행의 책임을 진 이가 금부도사 왕방연이다. 그는 고을에 도착했으나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마침내 입시(入侍)하자 열일곱 살의 어린 상왕이 관복을 차려입고 나와 그가 온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단종이 승하함으로써 김종서와 사육신, 금성대군 등의 죽음, 생육신의 저항을 남긴 조선 초기 최대의 비극 계유정난은 막을 내렸다. 그 절정의 순간을 ..

④ 장안사(長安寺)

④ 장안사(長安寺)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장안사(長安寺) 이은상 (1903-1882)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 노산 시조집 가곡왕 노산 삼국시대에 창건된 금강산 장안사. 고려 때는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씨가 전국 최고의 사찰로 화려하게 중건하였다 한다. 금으로 된 전각(金殿)이 푸른 하늘(碧宇) 아래 빛나던 그 웅장하던 모습이 몇 차례의 화재로 차디찬 재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중창을 거쳤으나 기황후가 봉안하였다는 1만 5천 불(佛)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흥망이 인간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산중에도 절이 지어지고 쓰러지는 흥망이 유수하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시가..

③ 하여가(何如歌)

③ 하여가(何如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하여가(何如歌) 이방원 (1367-1422)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왕조의 존망을 가른 시조 우리는 시조 한 수에 왕조의 존망이 엇갈린 역사가 있다. 바로 이방원의 이 작품이다. 역성혁명을 꿈꾸며 세력을 키워가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를 해서 벽란도에 드러누웠다. 정몽주는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눈치를 챈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경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정몽주를 포섭하라는 이성계의 지시를 받은 이방원이 병문안 온 정몽주에게 던진 노래가 바로 이 시조였다. 그때 이방원의 나이 26세. 아버지의 친구이자 정적인 30세 연..

② 난초 1

난초 1 이병기 (1891-1968)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 가람문선 현대시조의 아버지 가람 난초가 개화하는 순간을 그려낸 작품이다. 가람의 이 시조를 보면 고시조의 옷을 완전히 벗어 던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감각이 청신하며 스케치가 정밀하다. 마치 현대시 한 편을 읽는듯한 느낌을 준다. 이 시조 한 편에 그의 일상과 기호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가람은 현대시조의 주소를 찾아준 시인이다. 그는 1926년에서 1934년 사이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시조의 현재와 장래’ ‘시조는 혁신하자’ ‘시조의 기원과 그 형태’ 등 본격적인 시조론을 계속 발표했다. 고시조의 관념성과 추상성을 배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