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84> 善分民

- 잘할 선(口-9)나누어줄 분(刀-2)백성 민(氏-1) 남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는 권력과 갖가지 정보를 한손에 쥐게 되는데,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짊과 올바름이 없다면 아무리 富國(부국)을 이루어 國庫(국고)가 충실해지더라도 그 나라는 한낱 소인배들이나 간교한 자들의 금고로 전락하게 된다. 군주가 현명한 인물이어야 하고 군자가 정치를 맡아서 실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재물을 증식시킬 수도 있고 적절하게 분배할 수도 있다. 현명한 사람은 그저 덕만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덕성뿐만 아니라 지식과 지혜도 아울러 갖추어야 진정한 현자다. ‘논어’ ‘陽貨(양화)’편에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시를 배워야 한다면서 “邇之事父, 遠之事君..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83> 以身發財

- 써 이(人-3)몸 신(身-0)일으킬 발(癶-7)재물 재(貝-3) 사람에게는 그 몸이 다른 어떤 재물보다 귀하다. 그럼에도 이를 잊고서 재물을 붙좇느라 제 몸을 잊는 이들이 적지 않다. 所有欲(소유욕) 때문이다. 사실 사람은 제 몸조차 소유할 수 없다. 늙어가는 것도 막지 못하고 병이라도 들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무너지기도 한다. 제 몸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재물이나 명예, 권력 따위 제 몸 밖에 있는 것을 어찌 마음먹은 대로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소유욕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고, 도리어 그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가장 귀한 제 몸조차 위태롭게 하거나 망가뜨린다. “不仁者以身發財”(불인자이신발재) 곧 “어질지 못한 자는 몸으로써 재물을 일으킨다”는 말은 어질지 못한 자, 어리석..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82> 實事求是

- 참 실(宀-11)일 사(亅-7) 구할 구(水-2) 옳을 시(日-5) 근대는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이 이어지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이른바 경제학의 시대로 불린다. 그런데 경제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다만, 경제의 어떤 부문이 중시되었느냐, 경제의 규모나 정책의 수준이 어떠했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근대보다 중세가, 중세보다 고대가 모든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관자’의 경제에 관한 인식이나 통찰, 정책 결정과 수준은 참으로 놀랍다. 오늘날의 경제 정책에 뒤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다. 조선 시대에 이른바 사대부들은 ‘관자’와 같은 고전을 백안시하고 道學(도학)을 운운하며 당파 싸움에 혈안이 되었다. 오직 농업 진흥만이 최선인 것처럼 여겼고..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81> 物利之不平

- 재물 물(牛-4)이로울 리(刀-5)의 지(丿-3)아닐 불(一-3)고를 평(干-2) 앞서 든 글(280회)을 풀면 이렇다. “풍년에는 시장에 내놓은 쌀이 팔리지 않아서 개나 돼지들이 사람의 양식을 먹고, 흉년에는 시장에서 쌀 대여섯 되를 사려 해도 돈이 열 꿰미나 드니 길에 굶어 죽은 백성이 보인다. 그렇게 된 것이 어찌 토양이 비옥하지 않고 농민의 노력도 부족하며 양식이 본디 넉넉하지 않아서겠는가?” 위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夫往歲之糶賤, 狗彘食人食, 故來歲之民不足也. 物適賤, 則半力而無予, 民事不償其本; 物適貴, 則什倍而不可得, 民失其用. 然則豈財物固寡而本委不足也哉? 夫民利之時失, 而物利之不平也. 故善者委施于民之所不足, 操事于民之所有餘. 夫民有餘則輕之, 故人君斂之以輕; 民不足則重之, 故人君散之..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80> 固不贍也哉

- 참으로 고(口-5)아닐 불(一-3)넉넉할 섬(貝-13)어조사 야(乙-2)어조사 재(口-6)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생산 기술과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농업도 급속도로 발달했다.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이루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황무지 개간이 늘어나고 또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늘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군수 물자가 넉넉해야 했으므로 농업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제후국들에서 농업을 가장 중시하며 농업을 부국의 원천으로 생각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 관중은 특이하게도 농업과 함께 상업을 중시했다. 관중이 상업을 중시한 것은 제나라가 바다에 인접해 있어서 산과 바다에서 풍부한 자원이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사기’ 에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79> 德裕乃身

- 덕 덕(彳-12)넉넉할 유(衣 - 7)너 내(丿-1)몸 신(身 - 0) “不知節用裕民則民貧, 民貧則田瘠以穢, 田瘠以穢則出實不半. 上雖好取侵奪, 猶將寡獲也, 而或以無禮節用之, 則必有貪利糾譑之名, 而且有空虛窮乏之實矣. 此無它故焉, 不知節用裕民也. 康誥曰, ‘弘覆乎天, 若德裕乃身,’ 此之謂也.”(부지절용유민즉민빈, 민빈즉전척이예, 전척이예즉출실불반. 상수호취침탈, 유장과획야, 이혹이무례절용지, 즉필유탐리규교지명, 이차유공허궁핍지실의. 차무타고언, 부지절용유민야. 강고왈, ‘홍복호천, 약덕유내신,’ 차지위야) “알맞게 써서 백성을 넉넉하게 해줄 줄 모르면 백성은 가난해지고, 백성이 가난해지면 밭은 척박해지고 황폐해지며, 밭이 척박해지고 황폐해지면 소출은 반도 안 되게 줄어든다. 군주가 거두어들이기를 좋아하여..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78> 節用裕民

마디 절(竹-9)쓸 용(用-0)넉넉할 유(衣-7)백성 민(氏-1) ‘순자’ ‘富國(부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足國之道, 節用裕民, 而善臧其餘. 節用以禮, 裕民以政. 彼裕民故多餘. 裕民則民富, 民富則田肥以易, 田肥以易則出實百倍. 上以法取焉, 而下以禮節用之, 餘若丘山, 不時焚燒, 無所臧之.”(족국지도, 절용유민, 이선장기여. 절용이례, 유민이정. 피유민고다여. 유민즉민부, 민부즉전비이이, 전비이이즉출실백배. 상이법취언, 이하이례절용지, 여약구산, 불시분소, 무소장지) “나라가 풍족해지는 길은 알맞게 써서 백성을 넉넉하게 해주고 남는 것을 잘 갈무리하는 것이다. 예의로써 알맞게 쓰고, 정치로써 백성을 넉넉하게 해준다. 백성을 넉넉하게 해주므로 여유가 많아진다. 백성을 넉넉하게 해주면 백성은 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77> 必先富民

반드시 필(心-1)먼저 선(儿-4)가멸 부(宀-9)백성 민(氏-1) ‘관자’ ‘치국’의 글(276회)을 풀면 이렇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이 부유하면 다스리기 쉽고, 백성이 가난하면 다스리기 어렵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백성이 부유하면 마을을 편안하게 여기고 집안을 중시하며, 마을을 편안하게 여기고 집안을 중시하면 윗사람을 공경하고 죄를 두려워하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죄를 두려워하면 다스리기 쉽다. 백성이 가난하면 마을을 위태롭게 여기고 집안을 경시하며, 마을을 위태롭게 여기고 집안을 경시하면 감히 윗사람을 능멸하고 금령을 어기며, 윗사람을 능멸하고 금령을 어기면 다스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잘 다스린 나라는 늘 부유하고, 어지러운 나라는 늘 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76> 生財有大道

낳을 생(生-0)재화 재(貝-3)있을 유(月-2)클 대(大-0)길 도(辵-9) 이제 15-1이다. “生財有大道. 生之者衆, 食之者寡, 爲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생재유대도, 생지자중, 식지자과, 위지자질, 용지자서, 즉재항족의.) “재화를 생산하는 데에는 크나큰 도가 있다. 생산하는 자가 많고 먹는 자가 적으며 일하는 데에 빠르고 쓰는 데에 느리면, 재화는 늘 넉넉하리라.” 疾(질)은 빠르다, 힘쓰다는 뜻이다. 舒(서)는 천천히, 느리다는 뜻이다. 흔히 유가라고 하면 인의도덕이나 외치고 백성의 물질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던 학파로 여기는데, 이는 성리학의 폐해가 빚어낸 오해다. 누구보다 인의에 입각한 정치를 외친 맹자도 ‘산 사람을 먹여 살리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섭섭함이 없는 것’이 왕도의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75> 殉葬

따라 죽을 순(歹-6)장사지낼 장(艸-9) 진나라의 융성이 멈춘 것은 목공이 재위 39년만에 죽으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殉葬(순장)시켰기 때문이다. 진나라에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이런 가혹한 풍습을 목공도 폐지하지 못하고 따랐던 것이다. 목공의 죽음과 더불어 따라 죽은 사람들의 수는 177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훌륭한 신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으니, 목공 사후에 진나라에는 인재가 텅 비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목공이 끊임없이 인재를 찾아서 구하고 발탁한 일이 참으로 虛事(허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를 두고 당시 군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秦繆公廣地益國. 東服彊晉, 西覇戎夷. 然不爲諸侯盟主, 亦宜哉. 死而棄民, 收其良臣而從死. 且先王崩, 尙猶遺德垂法, 況奪之善人良臣百姓所哀者乎? 是以知秦不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