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233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6> 가난한 살림이지만 여유로운 삶 노래한 정민교

장차 백 년 인생 살다 가리라(且作百年歸·차작백년귀) 구월에 찬 서리 내리니(九月寒霜至·구월한상지)/ 남으로 기러기 차츰 날아오네.(南鴻稍稍飛·남홍초초비)/ 나는 논에서 벼를 수확하고(我收水田稻·아수수전도)/ 아내는 목면옷을 짓는다.(妻織木綿衣·처직목면의)/ 모름지기 막걸리를 많이 빚으리니(白酒須多釀·백주수다양)/ 국화꽃은 는 절로 많이 피네.(黃花自不稀·황화자불희)/ 애오라지 한 몸 숨길만 하니(於焉聊可隱·어언료가은)/ 장차 백 년 인생 살다 가리라.(且作百年歸·차작백년귀) 위 시는 18세기 위항시인 정민교(鄭敏僑·1697~1731)의 ‘稻歸’(도귀·나락을 걷고 돌아오면서)로, 그의 문집 ‘한천유고(寒泉遺稿)’에 들어있다. 그는 시로 이름높았는데 호남의 한천(寒泉)에서 농사짓고 살았다. 자신은 나락을 ..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5> 진주사마소에 대한 이야기

유향소·사마소가 많이 점한 토지와 노비를 뺏어 (削鄕社司馬所媵占田奴·삭향사사마소잉점전노) 이에 이르러 과연 목사(牧使)를 제수받았다. 이미 진주에 이르자 먼저 민간에 있는 폐단을 찾아 한 가지로 고쳐 혁파하였다. … 또 유향소와 사마소가 많이 점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뺏어 서원에 귀속시켰다. 至是果拜牧使. 旣下車, 首訪弊之在民者, 一釐革之. … 削鄕社司馬所媵占田奴, 歸之書院.(지시과배목사. 기하차, 수방폐지재민자, 일리혁지. … 삭향사사마소잉점전노, 귀지서원.) 위 문장은 1578년께 진주목사로 부임한 이제신(李濟臣·1536~1584)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내용 일부로, 그의 문집인 ‘청강집(淸江集)’에 수록돼 있다. 이제신이 진주목사로 부임해 이 고을의 여러 폐단을 제거하였다. 그중 하나가 유향소와 ..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4> 가을날 회포 시로 읊은 조선 중기의 정용(鄭鎔)

어젯밤에 고향 꿈을 꾼 탓일지도 - 昨夜夢江湖·작야몽강호 국화꽃 고개 숙여 비를 맞고(菊垂雨中花·국수우중화)/ 뜰에 지는 오동잎에 가을 놀라네.(秋驚庭上梧·추경정상오)/ 오늘 아침 더욱 더 마음 슬픈데(今朝倍惆悵·금조배추창)/ 어젯밤에 고향 꿈을 꾼 탓일지도.(昨夜夢江湖·작야몽강호) 위 시는 조선 선조 때 문사인 오정(梧亭) 정용(鄭鎔·생몰년 미상)의 시 ‘秋懷’(추회·가을의 회포)로,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들어있다. 국화꽃이 가을비에 늘어져 비를 맞고 있다. 뜰에 오동잎이 져 떨어지는 걸 보고 가을이 깊어가는 걸 느낀다. 해마다 가을을 맞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 아침은 마음이 더 슬프고 애잔하다. 무엇 때문일까. 시인은 간밤에 고향 꿈을 꾸었다. 시인은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른 문신이었다. 그러다 ..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3> 아버지의 과거시험 낙방과 관련한 소동파의 글

운을 맞추어 소시(小詩) 14수 지어 (그를) 보냈다 - 因以爲韻, 作小詩十四首送之 · 인이위운, 작소시십사수송지 백부는 ‘내 아버지가 과거에 낙방하여 촉으로 돌아갈 때 배웅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인적이 드물어 노점은 한가로이 쉬고 있고 길이 영관으로 접어들어 편안히 노새를 탔다.” 나는 안절이 떠나갈 때 이 구절을 노래하고 운을 맞추어 소시(小詩) 14수를 지어 (그를) 보냈다. 伯父 ‘送先人下第歸蜀’ 詩云: 人稀野店休安枕, 路入靈關檼跨驢. 安節將去, 爲誦此句, 因以爲韻, 作小詩十四首送之.(백부 ‘송선인하제귀촉’ 시운: 인휘야점휴안침, 노입령관은과려. 안절장거, 위송차구, 인이위운, 작소시십사수송지.) 위 문장은 우리나라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하는 중화서국(中華書局)이 1982년 펴낸 ‘..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2> 단풍 물든 가을 산 풍경 읊은 조선 후기 문신 최석항

곱게 물든 붉은 단풍 두세 잎이 떨어지네(紅葉落兩三·홍엽락양삼) 가을 산의 오솔길 굽이져 있고(秋山樵路轉·추산초로전)/ 가도 가도 맑은 바람만 스치네.(去去唯淸風·거거유청풍)/ 해거름에 산새들 텅 빈 숲에 내려오고(夕鳥空林下·석조공림하)/ 붉은 단풍 두세 잎이 떨어지네.(紅葉落兩三·홍엽락양삼) 조선 후기 문신 최석항(崔錫恒·1654~1724)의 시 ‘秋景’(추경·가을 풍경)으로, 그의 문집인 ‘손와유고(損窩遺稿)’에 들어 있다. 계절은 지금쯤이다. 시인이 가을 산 오솔길을 걸었다. 당시 산의 오솔길은 요즘의 시멘트 포장길이나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길과 다르다. 굽이굽이 흙길이다. 오르락내리락 걷는 재미도 있다. 햇살이 좋을 뿐더러 바람이 맑다. 그렇게 여유롭게 걷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해거름..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1> 세종이 사가독서 위해 독서당 세운 뜻 적은 조위(曺偉)

만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화류마와 녹이마 같은 좋은 말을 미리 찾아서 반드시 꼴과 콩을 배불리 먹이고 안장과 고삐를 정돈한 후에야 연나라나 초나라처럼 먼 곳에 갈 수 있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이 뛰어난 인재를 미리 기르는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것이 독서당을 세운 이유이다. 適萬里者, 豫求驊騮騄駬之種, 必豊其芻豆, 整其鞍鞁, 然後可達燕楚之遠, 爲國家者, 豫養賢才, 赤何以異於此? 此讀書堂之所由作也.(적만리자, 예구화류녹이지종, 필풍기추두, 정기안비, 연후가달연초지원, 위국가자, 예양현재, 역하이이어차? 차독서당지소유작야.) 점필재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인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가 쓴 ‘讀書堂記’(독서당기) 앞부분으로, 그의 문집 ‘매계집(梅溪集)’ 권4에 있다. 세종은 뛰어난..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0> 동래 객사 뒤 적취정(積翠亭)을 시로 읊은 안축

푸른 1천의 대나무 빽빽하게 둘레 에워싸 - 碧玉千竿密作圍·벽옥천간밀작위 푸른 1천의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레를 에워싸(碧玉千竿密作圍·벽옥천간밀작위)/ 적취헌 지대(地臺)에는 푸름이 하늘을 메웠네.(滿空蒼翠積軒墀·만공창취적헌지)/ 비오는 날에 누가 국수(國手)를 불러오겠는가?(雨天誰喚王逢手·우천수환왕봉수)/ 관아의 휴가에 여유롭게 바둑 한 판 두네.(官暇來饒一局碁·관가래요일국기) 위 시는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1282~1348)의 시 ‘積翠亭’(적취정)으로, 그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에 있다. 그는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을 이제현 등과 수정 보완했고, 충렬·충선·충숙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적취정은 동래객사 뒤에 있던 정각으로, 조선 초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09> 가난한 선비로서 먹는 것도 아까워 한 성호 이익

한두 번 굶는다 하여 반드시 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 一飢二飢未必生疾·일기이기미필생질 나는 일의 효과를 빨리 볼 수 있는 방법으로 굶주림을 참고 먹지 않는 것만 한 게 없다고 본다. 한두 번 굶는다 하여 반드시 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굶는 데 따라서 한 되 두 되의 쌀이 불어나게 되는 것이다. 약간의 굶주림을 참지 못하거나, 쌀이 떨어지자마자 병이 드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어리석고 더 지혜롭겠는가? 余謂事之效速, 莫如忍飢不食. 一飢二飢未必生疾, 一升二升隨飢米羨也. 與未忍少飢, 而米絶先病者, 愚智何如也?(여위사지효속, 막여인기불식. 일기이기미필생질, 일승이승수기미선야. 여미인소기, 이미절선병자, 우지하여야?) 위 문장은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글 ‘食小’(식소·적게 먹는..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08> 산속 가을비 풍경을 시로 읊은 유희경

밝은 달 벗삼아 함께 돌아왔다(歸來伴明月·귀래반명월) 백로 지나니 가을 하늘 높아지고(白露下秋空·백로하추공)/ 산속에는 계수나무 꽃이 활짝피었네.(山中桂花發·산중계화발)/ 가장 오래된 꽃가지를 꺾어 들고(折得最古枝·절득최고지)/ 밝은 달 벗 삼아 함께 돌아왔네.(歸來伴明月·귀래반명월) 위 오언절구는 유희경(劉希慶·1545~1636)의 시 ‘山中秋雨’(산중추우·산속에 내리는 가을비)로, 그의 문집인 ‘촌은집(村隱集)’에 수록돼 있다. 유희경은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시를 잘 지어 당대 사대부와 교유한 시인이다. 자기 집 뒤 계곡 가에 대를 쌓아 침류대(枕流臺)라 이름 지어 많은 사람과 어울렸는데, 위 시도 그 공간에서 지었을 수 있다. 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입추가 지나면 한풀 꺾인다. 처서가 되면 비..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07> 최익현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쓴 글

우리 삼천리강토의 인민은 모두 노예요 -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隸耳·즉범아삼천리인민, 개노예이 우리에게 국토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통감(統監)하게 하니 이는 군주를 가지지 않은 것이다. 나라가 없고 군주가 없다면, 우리 삼천리강토의 인민은 모두 노예요, 신첩(臣妾)이다. 我有土地人民, 而不能自主, 使他人代監, 則是無君也. 無國無君,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隸耳, 臣妾耳.(아유토지인민, 이 불능자주, 사타인대감, 즉시무군야. 무국무군, 즉범아삼천리인민, 개노예이. 신첩이.) 위 문장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의 ‘布告八道士民’(포고팔도토민·팔도의 국민에게 포고하다)의 일부분으로, 그의 문집인 ‘면암집(勉菴集)’ 권16에 수록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