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7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7] 스포츠맨십 대신 권력·영예 얻는 길로 악용

고대 올림픽은 초고속 출세코스… 우승자는 軍지휘관으로 발탁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7] 스포츠맨십 대신 권력·영예 얻는 길로 악용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8.10 03:00 올림픽 정신은 ‘국제 평화 증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과 이상엔 늘 차이가 난다. 고대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인기 있는 경기였던 마차 경주에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권력과 영예를 얻으려 했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스포츠를 악용해 개인과 국가 모두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9세기 헝가리 화가 알렉산더 폰 바그너의 그림 ‘전차 경기’. 고대 로마 제국의 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참가자들은 전차 바퀴가 떨어질 정도로 치열하게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5] [17세기 영국 명예혁명] [상] 민심 거스른 국왕… 자리에서 쫓겨나다

종교·신념 강요한 왕의 일방통행… 군대도 딸도 등 돌렸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5] [17세기 영국 명예혁명] [상] 민심 거스른 국왕… 자리에서 쫓겨나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7.13 03:00 1688년 11월 5일,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네덜란드어로는 빌럼 Willem)이 2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도버 해협을 건너 토베이(Torbay)에 상륙했다. 이제 그는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2세를 공격하기 위해 런던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사실 제임스 2세는 장인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사위가 군대를 이끌고 장인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을까? 의회 승인으로 왕좌에… 영국 윌리엄 3세 대관식 - 1689년 4월 11일 영국 상원(House of Lor..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4][나폴레옹 다시 보기] [下] 제국의 종말

자신만이 정의라 믿은 독재자 나폴레옹… 러시아 눈밭서 신화는 끝났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4] [나폴레옹 다시 보기] [下] 제국의 종말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6.29 03:00 1811년경, 나폴레옹은 권력의 정점에 섰다. 유럽 대부분 지역이 같은 법률과 행정 체제를 따랐고, 모두 프랑스에 군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2~3년 후 이 체제가 종말을 맞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국 체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 민족 감정이 분출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한번 제국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 피압박 국가들이 곧장 저항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프랑스 내부적으로도 왕당파, 공화파..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3] [나폴레옹 다시 보기] [중] 제국의 끝없는 전쟁

교황을 들러리로 만든 나폴레옹, 유럽을 가족기업처럼 주물렀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3] [나폴레옹 다시 보기] [중] 제국의 끝없는 전쟁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6.15 03:00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무력 팽창을 시도했다. 우선 프랑스혁명 중 상실한 식민 제국을 재건하겠다며 1801년 말에 처남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2만명의 원정군을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섬에 파견했다. 이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프랑스혁명 당시 해방되어 이미 자유의 맛을 알게 된 흑인들은 다시 노예제로 돌아가느니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여기에 가공할 만한 감염병인 황열병이 퍼져 엄청난 수의 프랑스군이 희생됐다. 결국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생도맹그는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해방 노..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2] [나폴레옹 다시 보기] [상] 권력 잡은 섬소년

나폴레옹으로 이름 바꾸고 30살에 쿠데타… 코르시카 ‘촌놈’, 대권을 잡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2] [나폴레옹 다시 보기] [상] 권력 잡은 섬소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6.01 03:00 “천재적인 인물들은 자신을 불태워 세기(世紀)를 밝히는 유성(流星)이다.” 초급 장교 시절이던 1791년, 나폴레옹이 리옹 아카데미 콩쿠르에 참가하여 쓴 글이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이 악마적인 영웅은 조만간 자신을 불태우고 유럽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나폴레옹 신화의 시작, 이탈리아 1차 원정 -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국 정부가 탄생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러시아 등 제정 국가들은 혁명의 기운에 긴장했고, 1792년‘프랑스 대혁명 전쟁’이..

히틀러처럼 수백만명 죽였지만… 나폴레옹은 영웅으로 부활했다[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1]나폴레옹 서거 200주기 어떻게 신화가 됐나

히틀러처럼 수백만명 죽였지만… 나폴레옹은 영웅으로 부활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1] 나폴레옹 서거 200주기 어떻게 신화가 됐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5.18 03:00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21년 5월 5일, 남대서양 한복판에 위치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있던 나폴레옹이 사망했다. 그 소식은 두 달이 걸려서야 유럽에 전해졌다. 마지막 시기 나폴레옹은 한때 스페인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황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40일 넘게 시름시름 앓으며 자리를 보전하다가, 죽으면 배를 갈라 혹시 자신이 아버지처럼 위암에 걸린 게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요청했다. 검시 결과 실제로 위암이었다. 독살설은 뜬소문에 불과하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투기광풍 원조는 17세기 튤립… 그때도 서민들이 ‘영끌’ 매수

투기광풍 원조는 17세기 튤립… 그때도 서민들이 ‘영끌’ 매수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0] 비트코인도 울고갈 튤립 광기의 전말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입력 2021.05.04 03:00 튤립은 오늘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4월이 되면 수백만 송이의 튤립이 피어나는 쾨켄호프(Keukenhof) 공원은 천국의 정원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한때 이 순수한 꽃들마저 비트코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투기 대상이 된 적도 있다. 네덜란드 정물화가 한스 불롱히에르의 그림 '꽃이 있는 정물'(1639).흰 꽃잎에 붉은 무늬가 있는 튤립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로 5500길더였다는 기록도 있다. 미 시카고대에 따르면 5500길더는 현재 가치로 환산할때 약 17만8200달러(약2억원)/위키피디..

‘세계의 급소’ 수에즈운하… 이집트, 중동戰때 화물선 띄워 6년 봉쇄

‘세계의 급소’ 수에즈운하… 이집트, 중동戰때 화물선 띄워 6년 봉쇄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8] 운하 사고로 본 수에즈 152년史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4.06 03:00 1869년 개통한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항로다.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든지 아니면 수에즈 지협(地峽)의 육로를 통과해야 했다. 예컨대 런던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선박으로 이동한 다음 이곳에서 낙타 수천 마리로 승객과 화물, 물과 석탄 등을 홍해 연안까지 옮기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봄베이로 이동하는 식이다. 그나마 철도를 부설한 후 육로 운송이 훨씬 개선됐다. 영국은 이 방식 그대로 유지하면 경제·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6..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0] 팬데믹의 두 얼굴… 음모론 번져 유혈폭동, 또는 화해의 계기로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0] 팬데믹의 두 얼굴… 음모론 번져 유혈폭동, 또는 화해의 계기로 질병과 증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12.15 03:00 1892년 8월 6일 르 프티 저널에 실린 삽화 '아스트라한의 폭동'. 당시 러시아 볼가강 하류 지역의 경제·문화 중심지 아스트라한에서는 콜레라로 큰 혼란이 벌어졌다. 콜레라가 극성을 부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콜레라 봉기(Cholera riot)’ 중 하나였다. /게티이미지 2020년은 병으로 시작해서 병으로 끝난 끔찍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마치 온 세상이 몸져누운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거의 마비되어 모두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사회 전체를 불안과 공포 분..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7] 대주교인 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 최강 국왕의 末路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7] 대주교인 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유럽 최강 국왕의 末路 잉글랜드 헨리 2세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확과 교수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1133~1189, 재위 1154~1189)는 ‘제국’에 준하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뛰어난 왕이었다. 프랑스 앙주(Anjou) 출신의 이 인물이 잉글랜드 왕이 되기까지에는 실로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다. 이야기는 1120년에 있었던 해상 사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왕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작도 겸하고 있었으므로 두 지역의 통치를 위해 영불해협을 자주 건너다녀야 했다. 이해 11월, 국왕 자신은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항해를 마쳤지만, 왕자 두 명과 귀족 300명이 탄 블랑슈-네프(Blanche-Nef)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