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리 내어 읊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리 내어 읊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소리 내어 읊다 믿지를 못하겠네, 인간의 술이 가슴속 걱정을 풀어낸단 말 거문고 가져다가 한 곡조 타고 휘파람 길게 불며 언덕에 올라 천리 너머 먼 곳을 바라보자니 광야에는 쏴아 쏴아 몰려온 바람 현자도 바보도 끝은 같나니 결국에는 흙만두가 되어버리지 작은 이익 얼마나 도움된다고 소란스레 다투다가 원수 되는가 그 누굴까 내 마음을 알아줄 이는 머리 풀고 일엽편주 물에 띄우리. 不信人間酒(불신인간주) 能澆心裏愁(능요심리수) 呼琴彈一曲(호금탄일곡) 長嘯上高丘(장소상고구) 高丘千里目(고구천리목) 曠野風颼颼(광야풍수수) 賢愚同結束(현우동결속) 竟作土饅頭(경작토만두) 錐刀亦何利(추도역하리) 擾擾成釁讐(요요성흔수) 誰歟會心人(수여회심인) 散髮弄扁舟..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송붕(松棚)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송붕(松棚)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송붕(松棚) 작은 초가라서 처마가 짧아 무더위에 푹푹 찔까 몹시 걱정돼 서늘한 솔잎으로 햇살을 가려 한낮에도 욕심껏 그늘 얻었네 새벽에는 이슬 맺혀 목걸이로 뵈고 밤에는 바람 불어 음악으로 들리네 도리어 불쌍해라, 정승 판서 집에는 옮겨 앉는 곳마다 실내가 깊네 小屋茅簷短(소옥모첨단) 偏愁溽暑侵(편수욕서침) 聊憑歲寒葉(요빙세한엽) 偸得午時陰(투득오시음) 露曉看瓔珞(노효간영락) 風宵聽瑟琴(풍소청슬금) 却憐卿相宅(각련경상댁) 徙倚盡堂深(사의진당심) ―권필(權韠·1569~1612) '조선조 제일의 시인'이라는 칭송을 듣던 권필의 시다. '송붕(松棚)' 또는 '송첨(松簷)'은 소나무 가지를 처마에 덧대어 햇살을 막는 차양(遮陽)이다. 무더운 여름을..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시험에 떨어지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시험에 떨어지고 안대회·성균관대 교수· 한문학 시험에 떨어지고 送張生希稷下第後歸海西婦家 (송장생희직하제후귀해서부가) 책 보따리 달랑 들고 부모 곁을 떠났건만 객지에서 고생 끝에 실의하여 돌아가네 과거에 급제 못한 오늘의 한 어찌 풀까 고향의 박 넝쿨은 이태 넘게 못 보았네 자넨 시름겹게 바다의 달만 보며 가고 나는 구름 조각 떠가는 강하늘만 응시하네 그래도 눈물 마른 규방의 아내가 안쓰러워 또다시 베를 잘라 귀향 편지 쓰게 하랴 獨携書笈別親闈(독휴서급별친위) 久客偏憐眊矂歸(구객편련모조귀) 攀桂可堪今日恨(반계가감금일한) 敦瓜嬴得隔年違(돈과영득격년위) 愁邊海月團團影(수변해월단단영) 望裏江雲片片飛(망리강운편편비) 却想秋閨粧淚盡(각상추규장누진) 何心更斷錦文機(하심갱단금문기) ―장유(張維·..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누이를 보내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누이를 보내고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누이를 보내고 別妹(별매) 아침에 해남으로 누이를 보냈는데 하루 종일 몹시도 날이 차구나. 오누이로 태어나 처음 헤어져 강산은 갈수록 멀어만 가네. 스산한 바람은 거세게 불고 밤들어 슬픔은 아련히 밀려오네. 지금쯤 어느 주막에 들어가 집 생각에 눈물을 쏟고 있을까? 海南朝送妹(해남조송매) 終日苦寒之(종일고한지) 骨肉生初別(골육생초별) 江山去益遲(강산거익지) 陰陰風勢大(음음풍세대) 漠漠夜心悲(막막야심비) 知爾宿何店(지이숙하점) 思家也涕垂(사가야체수) ―신광수(申光洙·1712~1775) 조선 영조 시대의 저명한 시인인 신광수가 누이를 시집으로 보내고 지은 시다. 충남 서천군에 살던 그의 누이동생은 멀리 해남으로 시집을 갔다. 그 누이는 다른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생각이 있어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생각이 있어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생각이 있어 有所思(유소사) 허둥지둥 달려온 마흔여섯 세월 거친 꿈은 아직 식지 않았는데 가을빛은 천리 멀리 밀려오고 석양은 하늘에서 내리 비치네. 강호의 곳곳에는 아우들이 있고 비바람 속 벗들은 곁을 떠나네. 남산의 달빛 아래 홀로 섰나니 고목 가지엔 거미가 줄을 치누나. 悤悤四十六(총총사십육) 磊落未全消(뇌락미전소) 秋色生千里(추색생천리) 夕陽照九霄(석양조구소) 江湖弟子在(강호제자재) 風雨友生遙(풍우우생요) 獨夜終南月(독야종남월) 蛛絲古木條(주사고목조) ―황오(黃五·1816~?) 19세기 조선의 기이한 시인인 녹차거사(綠此居士) 황오(黃五)의 작품이다. 사십도 중반을 넘긴 중년 남자의 뒤숭숭한 마음자리가 쓸쓸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을의 소회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을의 소회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가을의 소회 秋日遣興(추일견흥) 산에서는 나무하고 물에서는 낚시하니 세상에 구하는 무엇이 있기나 하나? 지위 낮아 세상일에 걸릴 것 없어 은덕도 원한도 주고받은 것 적건마는 때때로 문을 닫고 틀어박힌 채 이맛살 찌푸리며 갖은 걱정을 하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오는 식구들에게 가을을 타노라고 둘러대었네. 采山復釣水(채산부조수) 於世果何求(어세과하구) 身微不羇物(신미불기물) 而寡恩與讐(이과은여수) 時復掩闈坐(시부엄위좌) 攢眉懷百憂(찬미회백우) 家人問何故(가인문하고) 答云性悲秋(답운성비추) ―김윤식(金允植·1835~1922) 이철원 구한말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며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김윤식이 지은 시다. 그가 1850년대 경기도 양평 한강..

[가슴으로 읽는 한시] 비꼴 일이 있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비꼴 일이 있다 소리개가 병아리를 나꿔채 동산의 높은 나무가지에 앉네. 가련하다 하늘 높이 날아야 할 새가 배고프니 안 하는 짓이 없구나. 불쌍하다 세상의 선비된 자들 앞으로는 무얼 할지 알기 어렵네. 처음부터 끝까지 잘해야 할 뿐 공연히 목소리만 높이지 말라! 有諷(유풍) 鳶攫雞兒去(연확계아거) 東山高樹枝(동산고수지) 可憐九霄翼(가련구소익) 飢來無不爲(기래무불위) 矜矜世上士(긍긍세상사) 前頭難預期(전두난예기) 惟自善終始(유자선종시) 莫謾大其辭(막만대기사) 조선시대 숙종 임금의 외사촌뻘인 춘주(春洲) 김도수의 시다. 그는 왕가의 외척(外戚)이기는 했으나 불우하게 지내며 일그러진 세태를 풍자한 시를 즐겨 지었다. 병아리를 채가는 소리개는 고고하게 살아가야 할 지식인과 관료다.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망(所望)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망(所望)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소망(所望) 내 소망은 많지도 크지도 않아 자식이나 키우며 일없이 살고파. 산 한 곳을 장만하여 나무를 심고 창고에는 벼 백 섬을 거둬들이지. 공부 시켜 선대 가업 이어가고 닭을 삶고 돼지 잡아 이웃 부르네. 유유히 한 백년을 지내는 동안 태평시대 백성으로 보내고 싶네. 所望不豊侈(소망불풍치) 閑居養子孫(한거양자손) 一區園種樹(일구원종수) 百斛稻收囷(백곡도수균) 文史傳先業(문사전선업) 鷄豚會比隣(계돈회비린) 悠悠百歲內(유유백세내) 願作太平民(원작태평민)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를 옹호하다 비명에 죽은 우념재(雨念齋) 이봉환의 작품이다. 문장으로 명성도 제법 누렸고 낮은 직책도 얻은 적이 있으나 늘 미래가 불안했던 그였다.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린 아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린 아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어린 아들 얼굴도 잘 생긴 어린 내 아들 흐리거나 맑거나 걱정이 없네. 풀밭이 따스하면 송아지처럼 내빼고 과일이 익으면 원숭이인 양 매달리네. 언덕배기 지붕에서 쑥대 화살 날리고 시냇가 웅덩이에 풀잎배를 띄우네. 어지럽게 세상에 매인 자들아 어떻게 너희들과 함께 놀겠나! 稚子(치자) 稚子美顔色(치자미안색) 陰晴了不憂(음청료불우) 草暄奔似犢(초훤분사독) 果熟挂如猴(과숙괘여후) 岸屋流蓬矢(안옥류봉시) 溪幼汎芥舟(계요범개주) 紛紛維世者(분분유세자) 堪與爾同游(감여이동유) ―정약용(丁若鏞·1762~1836)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이 젊은 시절에 지었다. 그가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며 한창 바쁘게 지내던 시절, 다산의 어린 아들도 무럭무럭 자..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성거산의 원통암 창가에서 題聖居山元通庵窓壁(제성거산원통암창벽) 동쪽에서 눈부시게 해가 떠오르고 신령한 비인가 나뭇잎이 떨어진다. 창문 열자 온갖 걱정 말끔해지고 병든 몸에선 날개가 돋으려 한다. 東日出杲杲(동일출고고) 木落神靈雨(목락신령우) 開窓萬慮淸(개창만려청) 病骨欲生羽(병골욕생우) 세조가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서른두 살에 개성 성거산에 올라 원통암이란 절에서 하룻밤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니 온 천지에 낙엽이 떨어진다. 늦가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수수 지는 낙엽! 그의 눈에는 산신령이 흩뿌리는 비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