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천연의 살림살이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천연의 살림살이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천연의 살림살이 담쟁이넝쿨로 옷 해 입고 난초로 띠를 매면 어울릴까? 개울가의 나무 밑에 가지 엮어 살고 싶다. 섬돌 덮은 파초 잎은 부치기 쉬운 부채이고 길을 덮은 이끼는 넓게 깐 보료겠네. 낚싯대 잡고 비를 뚫고 가면 그게 바로 지팡이요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물 내려보면 방석이 따로 없다. 봉선화를 비벼 짜고 갈대 붓에 즙을 적셔 오동잎을 주어다가 은사(隱士)의 노래 지어내리. ―정학연(丁學淵·1783~1859) 天然具(천연구) 蘿衣蕙帶稱如何(나의혜대칭여하) 因樹爲居在澗阿(인수위거재간아) 砌覆芭蕉搖扇易(체복파초요선이) 徑添苔蘚鋪氍多(경첨태선포구다) 把竿衝雨當扶老(파간충우당부로) 據石臨泉是養和(거석임천시양화) 挼碎鳳仙沾荻筆(뇌쇄봉선첨적필..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매천의 묘소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매천의 묘소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대지에는 까마득히 호겁(浩劫)의 재난 한창이고 서대(西臺)*에는 달도 지고 저문 강엔 날이 차다지금 붓을 잡은들 땅이 없어 시름하노니봄바람이나 그리고 난초는 그리지 말자. 梅泉墓(매천묘) 大地茫茫劫正蘭(대지망망겁정란) 西臺月落暮江寒(서대월락모강한) 秖今筆下愁無土(지금필하수무토) 但畵春風莫畵蘭(단화춘풍막화란) —이건방(李建芳·1861~1939) 구한말의 항일 우국지사 이건방이 매천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의 묘소에 올라 시를 지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매천의 묘소를 홀로 올라 참배하고 사방을 둘러보니 어둠에 묻힌 대지는 온통 큰 재난의 기운에 뒤덮여 있다. 망국을 개탄하며 자결한 지사의 무덤은 어둡고 춥다. 그 앞에서 나 같은 글쟁..

[가슴으로 읽는 한시] 김장

[가슴으로 읽는 한시] 김장 안대회·성균관대 교수· 한문학 김장 蓄菜(축채) 시월이라 바람 세고 새벽 서리 매서워져 울 안팎의 온갖 채소 다 거둬 들여놓네. 김장을 맛나게 담가 겨울나기 대비해야 진수성찬 아니라도 하루하루 찬을 대지. 암만 봐도 겨우살이는 쓸쓸하기 짝이 없고 늙은 뒤로는 유난스레 감회에 깊이 젖네. 이제부터 먹고 마실 일 얼마나 남았으랴 한 백 년 세월은 유수처럼 바쁜 것을. 十月風高肅曉霜(시월풍고숙효상) 園中蔬菜盡收藏(원중소채진수장) 須將旨蓄禦冬乏(수장지축어동핍) 未有珍羞供日嘗(미유진수공일상) 寒事自憐牢落甚(한사자련뇌락심) 殘年偏覺感懷長(잔년편각감회장) 從今飮啄焉能久(종금음탁언능구) 百歲光陰逝水忙(백세광음서수망) ―권근(權近·1352~1409) 고려 말·조선 초의 저명한 학자인 권근이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밤 검푸른 솔숲으로 밤안개 자욱하더니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쪽으로 잠겼다. 개 짖는 소리 잦아들며 인적이 끊긴 마을 관솔불이 타 들어가 토방 안은 깊어간다. 창 아래서 흥얼흥얼 글 읽는 소리 들려오고 이불이 펼쳐진 화롯가에는 군밤이 익어간다. 아득히 먼 한양의 남산 아래 집에서는 골육 친지들이 단란하게 모였으리. 煙靄蒼蒼松樹林(연애창창송수림) 蛾眉新月已西沈(아미신월이서침) 吠殘村犬人蹤斷(폐잔촌견인종단) 爇盡松明土室深(설진송명토실심) 窓下伊吾聞夜讀(창하이오문야독) 爐邊芋栗伴寒衾(노변우율반한금) 依然却憶終南舍(의연각억종남사) 骨肉諸郞盡盍簪(골육제랑진합잠) ―이산해(李山海·1539~1609)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북인(北人)의 영수(領袖) 아계(鵝..

[가슴으로 읽는 한시] 친구의 죽음

[가슴으로 읽는 한시] 친구의 죽음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친구의 죽음 哭劉主簿(곡유주부) 인생은 한 번 피는 꽃 천지는 큰 나무다. 잠깐 피었다 도로 떨어지나니 억울할 것도 겁날 것도 없다. 人世一番花(인세일번화) 乾坤是大樹(건곤시대수) 乍開還乍零(사개환사령) 無寃亦無懼(무원역무구) ―원중거(元重擧·1719~1790) 조선 영·정조 시대의 학자 현천(玄川) 원중거가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친구를 조문하며 지은 시다. 삶이 있다면 죽음도 있게 마련이다. 그 법칙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죽어 마땅하다고 뒤돌아서 침 뱉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사라지는 생명은 다 아쉽고 연민의 마음을 자아낸다. 더욱이 망자(亡者)가 그냥 보내기 아까운 사람이고, 게다가 남보다 일찍 서둘러 세상을 버렸다면 훨씬 더..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偶詠(우영) 山翁與山禽(산옹여산금) 相宿一詹裏(상숙일첨리) 昨日渠先飛(작일거선비) 今朝後我起(금조후아기) 우연히 읊다 산 늙은이랑 산새랑 한 처마 밑에 함께 살지요. 어제는 제가 먼저 날더니 오늘 아침에는 내 뒤에 일어났구나. —무명씨(無名氏)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시다. 우리의 농촌 마을과 산골에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저런 마음씨를 지닌 분들이 여기저기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사람들이 산의 일부로 특별할 것 없는 초가집을 지어 살면 산새는 그 추녀 끝을 찾아와 둥지를 튼다. 집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따지는 것은 문명에 물든 인간의 버릇일 뿐 산 늙은이도 산새도 초가집을 제 것이라 우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오늘 아..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 해가 간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 해가 간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2.12.28 23:09 한 해가 간다 창가에 쓸쓸히 앉아 친구들을 그리노니 계절 따라 풍경은 어수선하게 바뀌었다. 덧없는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 저무는 한 해는 전쟁에 패한 군사. 사람들은 묵은해 간다고 환호하지만 심란한 벗의 마음은 산 너머 구름이리라. 가득 따른 술잔일랑 취기 어려 남겨두고 책상 위 낙지론(樂志論) 을 다시 펼쳐 읽어본다. 歲除用前韻(세제용전운) 梢梢軒窓念我??(초초헌창염아군) 推遷時物自繽紛(추천시물자빈분) 浮生但覺風飄葉(부생단각풍표엽) 殘歲爭如戰敗軍(잔세쟁여전패군) 氓俗歡聲除舊日(맹속환성제구일) 故人心緖隔岡雲(고인심서격강운) 十分盞酒留餘醉(십분잔주유여취) 重讀牀頭樂志文(중독상두낙지문) *낙지론: 중국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새벽 풍경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새벽 풍경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3.01.06 23:30 새벽 풍경 어두컴컴 강 위로 눈이 내리고 새벽빛은 조금씩 밝아오는데 하늘에는 지려 하는 달이 머물고 들녘은 구름이 뒤덮어간다. 천지 원기 가슴에 가득 채우자 온갖 소리 귓가에서 멀어져간다. 이런 뜻을 다부지게 간직하고서 길이길이 참마음을 지켜 가리라. 次子益詠曉景韻(차자익영효경운) 泱莽連江雪(앙망련강설) 晨光稍向分(신광초향분) 天留將落月(천류장낙월) 野有欲鋪雲(야유욕포운) 一氣彌襟次(일기미금차) 羣囂遠耳聞(군효원이문) 秖應存此意(지응존차의) 長以事天君(장이사천군) 조선 숙종 시대의 저명한 사상가인 농암(農巖) 김창협이 어느 추운 겨울날에 지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어두컴컴한 강 위로 눈이 내린다. 하늘도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벙거짓골에 소고기를 굽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벙거짓골에 소고기를 굽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벙거짓골에 소고기를 굽다 고기 썰어 벙거짓골에 늘어놓고 몇 사람씩 화로를 끼고 앉아서 자글자글 구워서 대강 뒤집다가 젓가락을 뻗어보니 고기 벌써 없어졌다. 온 나라에 유행하는 새 요리법은 근자에 여진에서 들어온 풍속. 의관을 갖추고서 달게 먹지만 군자라면 부엌을 멀리해야지. ―신광하(申光河·1729~1796) 詠氈鐵煮肉(영전철자육) 截肉排氈鐵(절육배전철) 分曹擁火爐(분조옹화로) 煎膏略回轉(전고약회전) 放筯已虛無(방저이허무) 擧國仍成俗(거국잉성속) 新方近出胡(신방근출호) 衣冠甘餔餟(의관감포체) 君子遠庖廚(군자원포주) 조선 정조 시대의 시인 진택(震澤) 신광하가 두만강 일대를 탐방하던 중에 지었다. 화로 위에 전골을 지지는 철판(벙..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물물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물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우물물 井水(정수) 우물물은 천 길 천 길이라도 퍼 올리고 사람 마음은 한 치 한 치라도 알기 참 어렵다. 고드름은 진흙에 버려져도 한 번 씻자 도로 깨끗해지는데 나쁜 쇳덩어리는 큰 대장장이가 벼리나 천 번을 연마해도 끝내 부서진다. 井水雖千尋(정수수천심) 千尋猶可汲(천심유가급) 人心雖一寸(인심수일촌) 一寸難可測(일촌난가측) 淸氷委泥塵(청빙위니진) 一洗還淸潔(일세환청결) 惡鐵經大冶(악철경대야) 千磨終缺折(천마종결절) ―김윤안(金允安·1560~1622) 조선 선조 시절의 안동 선비 동리(東籬) 김윤안이 지었다. 그는 유성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늘날 수도꼭지를 틀듯이 옛날에는 우물을 길었다. 깊으면 깊을수록 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