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네 가지 기쁜 일

[가슴으로 읽는 한시] 네 가지 기쁜 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네 가지 기쁜 일 共人賦四喜詩(공인부사희시) 가난한 집 급한 빚을 이제 막 해결하고 장맛비로 지붕 새는데 날이 문득 개어오네. 파도에 휩쓸린 배가 언덕에 정박하고 깊은 산속 길 잃었는데 행인을 만나네. 책 읽다가 난해한 것을 별안간 깨우치고 시구 찾다 좋은 소재 홀연히 떠오르네. 용한 의원 처방하자 묵은 병이 사라지고 봄날씨가 추위를 몰아내니 만물이 소생하네. 窶家急債券初了(구가급채권초료) 破屋長霖天忽晴(파옥장림천홀청) 駭浪飄舟依岸泊(해랑표주의안박) 深山失路遇人行(심산실로우인행) 讀書斗覺微辭透(독서두각미사투) 覓句忽驚好料生(멱구홀경호료생) 良醫對症沉痾去(양의대증침아거) 和煦破寒品物亨(화후파한품물형) ―윤기(尹愭·1741∼1826) 우리..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마을을 바라보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마을을 바라보고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마을을 바라보고 청산 아래 마을이 터를 잡고서 맑은 시내 주변으로 동산이 있네. 집집마다 저물 무렵 베틀 돌리고 곳곳에서 밥 연기가 피어오르네. 세금 내니 남은 것은 얼마 안 되나 질항아리 두드리며 자연 즐기네. 전쟁이 휩쓸고 간 이 땅 위에서 태평 세상 다시 볼 줄 어찌 알았으리? 村望(촌망) 村住靑山下(촌주청산하) 園林綠水邊(원림녹수변) 家家鳴夕杼(가가명석저) 處處起炊煙(처처기취연) 官租輸餘幾(관조수여기) 陶盆樂自然(도분락자연) 何知兵火地(하지병화지) 重見太平天(중견태평천)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살다 간 동계(桐溪) 정온의 시다. 시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강직한 신념과 불굴의 지조로 국난에 대처하여 존경을 받았다. 참혹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에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섣달 그믐에 도성에는 열 길 높이 부연 먼지 떠오르며 명예 다투고 이익 좇아 동과 서로 뛰어다니네. 정말 이상하다 우리 집안 형님들은 그 바쁜 세상에서 담백한 모임 가지네. 담백한 모임은 거듭 하면 깊은 맛이 우러나나 바쁜 일은 겪고 나면 흔적조차 사라지네. 매화 모임 하고 나자 그믐날의 술자리 차례대로 즐기면서 끝없이 이어가리. 除夕飮(제석음) 城塵十丈浮軟紅(성진십장부연홍) 爭名射利汨西東(쟁명사리골서동) 獨怪吾宗諸夫子(독괴오종제부자) 作閑淡事熱閙中(작한담사열료중) 閑淡積來味啖蔗(한담적래미담자) 熱?B經盡迹飛鴻(열료경진적비홍) 梅花會後除夕飮(매화회후제석음) 次第取樂眞無窮(차제취락진무궁) ―조귀명(趙龜命·1693~1737) 조선 영조 초반기의..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야설(野雪)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야설(野雪)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야설(野雪)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를 말자.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이양연(李亮淵·1771~1853) 조선 정조와 순조 때를 살다 간 시인 임연당(臨淵堂) 이양연의 작품이다. 김구(金九) 선생의 애송시로 많은 애독자를 갖고 있다. 서산대사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작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집(淸虛集)'에는 실려 있지도 않다. 이양연의 시집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려 있고,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작품으로 올라 있어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옛사랑

[가슴으로 읽는 한시] 옛사랑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옛사랑 아무리 임이 그리워도 창자 끊어질 일은 절대 없어요. 만약 그랬다면 제 창자는 한 치도 남아나지 않았겠죠. 올해도 어김없이 강가에는 배꽃이 피었네요. 빈 창문에 기대 서서 석양빛을 하염없이 홀로 봅니다. —유희(柳僖.1773~1837) 古閨怨(고규원) 相思定不斷人腸(상사정부단인장) 苟斷儂無一寸長(구단농무일촌장) 每歲梨花江上宅(매세이화강상택) 獨憑虛牖眄斜陽(독빙허유면사양)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글 음운(音韻) 연구서 '언문지(諺文誌)'의 저자인 서파(西陂) 유희가 옛날풍으로 사랑을 읊었다. 처음부터 따지듯이 말한다. 미칠 듯이 사랑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면 창자가 끊어져서 '단장(斷腸)의 슬픔'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틀리는 말이다.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아들 손자와 함께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아들 손자와 함께 높디높은 나무에서 가지 살랑 흔들흔들 어디선가 작은 새가 날아왔다 알려주네. 후다닥! 물고기도 개구리도 뒤질세라 풀에 숨더니 왜 아닐까? 물총새가 연못을 엿보고 있네. 광경이 새로워서 시로 짓기 오묘하지만 애잔하여 들여다보며 지팡이에 기대서려니 그 틈에 또 노랑나비 쌍쌍이 펄펄 날아오는 이 한때의 기이한 일 약속이라도 했나 보다. 同韻兒與孫(동운아여손) 高高庭樹乍搖枝(고고정수사요지) 幽鳥飛걐自可知(유조비래자가지) 쮖爾魚蛙爭匿草(숙이어와쟁닉초) 果然翡翠下窺池(과연비취하규지) 景光新出模詩妙(경광신출모시묘) 情悲詳看倚杖遲(정비상간의장지) 卽又雙飜金翅蝶(즉우쌍번금시접) 一時奇事겭相期(일시기사약상기) —이규상(李奎象·1727~1799) 18세기 명사들의 인물평을 잘했..

[가슴으로 읽는 한시] 혼자 웃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혼자 웃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혼자 웃다 곡식 가진 이는 먹을 식구 없는데 자식 많은 이는 굶주려 걱정이다. 고관은 영락없이 바보인데도 영재는 재능 써먹을 자리가 없다. 두루 두루 복을 갖춘 집 이렇게 드물고 극성하면 대개 쇠락의 길을 밟는다. 아비가 검소하면 자식은 방탕하고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은 어리석다.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망쳐놓는다. 세상사 모두가 이런 것을 혼자 웃는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獨笑(독소)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達官必憃愚(달관필용우)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至道常陵遲(지도상능지)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婦慧郞必癡(부혜낭필치)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物物盡..

[가슴으로 읽는 한시] 봄날 성산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봄날 성산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봄날 성산에서 누가 우리 살림살이 가난하다더냐? 봄 되면 모든 것이 기이한 것을. 산에서는 붉은 비단 병풍을 치고 하늘은 푸른 비단 휘장을 친다. 바위 스치자 소맷자락에서 구름이 피어나고 술잔을 드니 달빛은 잘람잘람 넘친다. 옛 책을 읽는 것이 으뜸가는 멋 그 좋다는 고기 맛도 잊어버린다. 春日城山偶書(춘일성산우서) 誰謂吾生窶(수위오생구) 春來事事奇(춘래사사기) 山鋪紅錦障(산포홍금장) 天作碧羅帷(천작벽라유) 拂石雲生袖(불석운생수) 呼樽月滿危(호준월만위) 古書還有味(고서환유미) 芻豢可忘飢(추환가망기) ―김성일(金誠一·1538~1593) 선조 때의 명신 학봉(鶴峰) 김성일이 1587년 50세에 지었다. 그전 해 연말에 벼슬에서 물러난 학봉은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종이연

[가슴으로 읽는 한시] 종이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종이연 들은 좁고 바람은 약해 내 뜻대로 날지 못하니 햇빛 속에 흔들흔들 짐짓 당겨 버텨낸다. 하늘 아래 회화나무 싹둑 쳐서 없애고서 새가 사라지고 구름 떠가듯 날려 보내야 가슴이 후련하리라. -박제가(朴齊家·1750~1805) 紙鳶(지연) 野小風微不得意(야소풍미부득의) 日光搖曳故相牽(일광요예고상견) 削平天下槐花樹(삭평천하괴화수) 鳥沒雲飛迺浩然(조몰운비내호연) '북학의'의 저자 초정(楚亭) 박제가가 10대 소년 시절에 썼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아이들이 연을 날린다. 그 무리 속에 시인도 함께 끼어 있다. 연을 높이 날리고 싶지만 들이 좁고 바람이 약해 아이들은 겨우 버티고 있다. 게다가 키 큰 회화나무가 하늘로 날아갈 길을 막고 섰다. 저..

[가슴으로 읽는 한시] 봄바람

[가슴으로 읽는 한시] 봄바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봄바람 봄바람은 괜스레 살랑거리고 어느새 달이 떠서 황혼 되었네. 오지 않을 그대인 줄 잘도 알면서 그래도 문을 차마 닫지 못하네. 춘풍(春風) 春風空蕩漾(춘풍공탕양) 明月已黃昏(명월이황혼) 亦知君不來(역지군불래) 猶自惜掩門(유자석엄문) ―복아(福娥) 영조 임금 시절 전라도 부안의 기생인 복아가 지은 시다. 황윤석의 '이재란고'에 복아의 어머니가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의 후손이라는 사연과 함께 실려 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밑도 끝도 없이 싱숭생숭, 그리운 사람이 한결 더 보고 싶어진다. 기다리는 줄을 안다면 제가 먼저 찾아올 법도 하건만 해가 다 지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달도 환히 떠서 이제 밤이다. 긴긴 대낮에도 오지 않은 임이니 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