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하나같이 우습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하나같이 우습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하나같이 우습다 |어영부영 살아온 서른 살 인생 부귀는 내 뜻대로 못하겠구나. 밤비에 온갖 고민 몰려 들고 추풍에 분노가 울컥 솟는데 인심은 왜들 그리 악착같은지 세상사는 하나같이 우습기만 해. 하늘 아래 밭뙈기나 얻어진다면 콧노래 부르면서 밭을 갈 텐데. ―유금(柳琴·1741~1788) 一呵呵(일가가) 等閒三十歲(등한삼십세) 富貴末如何(부귀말여하) 夜雨牢騷集(야우뇌소집) 秋風感慨多(추풍감개다) 人心皆齪齪(인심개착착) 世事一呵呵(세사일가가) 願得桑麻土(원득상마토) 耕雲任嘯歌(경운임소가) 영정조 시대 시인 유금의 시다. 호를 기하(幾何)라 하여 기하학에 탐닉한 인생을 드러낸 유금은 실학자인 유득공의 작은아버지이자 박제가의 절친한 벗이다. ..

[가슴으로 읽는 한시] 혼자 깨어 있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혼자 깨어 있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혼자 깨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성미는 아니어도 술 한 병은 그래도 지니고 사네. 겁이 나서지. 할 일 없는 이들이 나 홀로 깨어 있다 말을 할까 봐. 쓸쓸한 매화나무 아래에 앉아 '이소경*'을 낭랑하게 읊어보네. 홀로 깨어 있는 자 없는 세상이기에 매화에게 들려주는 길밖에 없네. *이소경: 전국시대 중국의 굴원(屈原)이 지은 시 偶題(우제) 性本不愛酒(성본불애주) 猶貯酒一甁(유저주일병) 多恐悠悠者(다공유유자) 將我號獨醒(장아호독성) 蕭瑟梅樹下(소슬매수하) 朗讀離騷經(낭독이소경) 世無獨醒者(세무독성자) 要使梅花聽(요사매화청) ―이정주(李廷柱) 19세기의 '여항(閭巷) 시인(양반이 아닌 문인)' 몽관(夢觀) 이정주(李廷柱)가 지었다. 술을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우연히 읊다 바른 선비 사랑하는 사람들 태도는 범 가죽을 좋아함과 정말 똑같다. 살아서는 죽이려고 대들다가도 죽은 뒤에 아름답다 모두들 칭송하네. 偶吟(우음) 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 愛虎皮相似(애호피상사) 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死後皆稱美(사후개칭미) ―조식(曺植·1501~1572) 조선 중기의 큰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의 시다. 제목을 보면, 가볍게 지은 시처럼 보이지만 세태를 준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식 구조를 꼬집은 말이면서도 구체적인 사건을 염두에 둔 말로 보이기도 한다. 올바르고 훌륭한 인물을 누구나 사랑하고 존경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깎아내리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바다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바다에서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바다에서 산도 들도 멈춘 곳에 장관이 펼쳐져 하늘까지 이어진 물, 뱉었다가 삼키누나. 만고 세월 증감(增減)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너에게는 저 우주가 근원이라 해야 하리. 명예 추구, 박학 욕심 저 앞에선 사라지니 기쁨이니 슬픔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그 기이함 묘사하는 헛된 노력 잘 알기에 휘파람 길게 불고 솔뿌리 베고 눕는다. 海(해) 山停野斷大觀存 (산정야단대관존) 水與天連互吐呑 (수여천련호토탄) 萬古憑誰問增减 (만고빙수문증감) 太虛於爾作淵源 (태허어이작연원) 爲名爲博於斯盡 (위명위박어사진) 堪樂堪悲可復論 (감낙감비가부론) 詩欲摸奇知亦妄 (시욕모기지역망) 不如長嘯枕松根 (불여장소침송근) ―김창흡(金昌翕·1653~1722) 17세기 후반에서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송어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송어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송어(松魚) 팔딱팔딱 날아갈 듯 기운이 몹시 세어 열 자 높이 폭포조차 훌쩍 뛰어올라가네. 앞으로만 나가고 물러서지 못하나니 넓은 바다 푸른 파도는 영영 가지 못하리라. 潑潑如飛氣力多(발발여비기력다) 懸流十尺可跳過(현류십척가도과) 嗟哉知進不知退(차재지진부지퇴) 永失滄溟萬里波(영실창명만이파) ―안축(安軸·1282~1348) 고려 후기의 학자 근재(謹齋) 안축 선생이 영동 지방을 여행할 때 지었다.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송어는 5,6월이면 떼를 지어 강 상류로 올라와 알을 낳고 죽는다. 오로지 앞으로만 나가고 뒤로 물러서지 않는 송어에게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자유는 오지 않는다. 그것이 송어의 본능이지만 한사코 상류로 오르려는 억센 욕망이 남긴 비..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마음을 적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마음을 적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마음을 적다 중년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오니 작은 집은 앞 들녘을 내려다보네. 학을 기르자 바로 친구가 되고 책을 펼치자 저절로 책둥지 되네. 산 스님은 산나물을 한 움큼 나눠주고 개울가 노인은 물고기를 한 바구니 보내네. 그 풍미에 나는 사뭇 만족하노니 귀한 음식 부러워한 적 언제 있었나? 書情(서정) 中年還舊隱(중년환구은) 小築俯前郊(소축부전교) 養鶴聊成友(양학요성우) 攤書自作巢(탄서자작소) 山僧分菜把(산승분채파) 溪叟送魚包(계수송어포) 風味吾差足(풍미오차족) 何曾羨綺庖(하증선기포) ―김이만(金履萬·1683~1758) 영조 때의 시인 학고(鶴皐) 김이만이 서울에서 벼슬하다 충청도 제천으로 낙향하였다. 중년의 나이에 자리를 잃고 보니 버틸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느낌이 있어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느낌이 있어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느낌이 있어서 학은 길고 오리는 짧아도 모두가 새이고 오얏꽃은 희고 복사꽃은 붉어도 하나같이 꽃이지. 직책이 낮은 탓에 상관에게 욕을 자주 듣나니 갈매기 훨훨 나는 바닷가로 차라리 돌아갈까 보다. 有所感(유소감) 鶴長鳧短皆爲鳥 (학장부단개위조) 李白桃紅摠是花 (이백도홍총시화) 官賤頗遭官長罵 (관천파조관장매) 不如歸去白鷗波 (불여귀거백구파) ―김니(金柅·1540~1621) 조선 중기의 관료 유당(柳塘) 김니가 지은 시다. 관북 출신 시인들의 시선집인 '관북시선(關北詩選)'에 실려 있다. 황해도 관찰사까지 지냈으므로 고위직을 역임한 분이다. 그는 서울 태생이기는 하나 함경도에서 성장한 관북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상대적으로 관서·관북 지역에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양정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양정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소양정에서 한가한 사람은 본래 한가로워 멋진 풍경 있어도 잊고 살지만 바쁜 사람은 바쁘기에 강산의 멋을 제대로 사랑하지. 저 나루터에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을 보게나! 바쁜 사람 위해 서 있고 한가한 사람 위해 서 있지 않네. 昭陽亭戱題(소양정희제) 閑者自閑忘外境(한자자한망외경) 忙人方解愛江山(망인방해애강산) 看他畵閣津頭起(간타화각진두기) 正爲忙人不爲閑(정위망인불위한) ―박태보(朴泰輔·1654~1689) 숙종 때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죽은 정재(定齋) 박태보의 작품이다. 그는 강직한 선비로도 명성이 높았고, 시인으로도 출중했다. 시는 조금 난해하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소양강을 따라 바삐 지나가다 소양정에 잠깐 올랐다. 강과 산이..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발을 씻고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발을 씻고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발을 씻고서 문 앞에는 우물 있어 동이 가득 시원한 물 길어오고 부엌에는 작은 대야 있어 그 물 덜어 받쳐왔네. 마루 앞에 앉아 세상에서 묻은 때를 말끔하게 씻고 나니 이제부터 숲 속에서 베개 높이고 잠을 자겠네. 洗足詩(세족시) 汲取門前井水寒(급취문전정수한) 捧來廚下小龍盤(봉래주하소룡반) 臨軒快滌紅塵跡(임헌쾌척홍진적) 始得山林一枕安(시득산림일침안) ―이원휴(李元休·1696~1724)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유명한 서예가 옥동(玉洞) 이서(李 �余�)의 아들인 금화자(金華子) 이원휴의 시다.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와서 발을 씻었다. 문 앞에 있는 우물에서 차가운 물을 길어와 마루 앞에 앉아 발을 씻고 나니 문밖의 세상에서 묻혀온 갖은..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해당화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해당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해당화 가시덤불 그 속에서 야들야들한 태깔에 시름하듯 붉은 빛깔. 이 고운 꽃의 멋을 그 누가 알기나 할까? 깨끗이 씻어내어 얼굴 곱게 단장한다면 인간 세상에서 제일 가는 꽃이 되련만. 海棠花(해당화) 膩態愁紅荊棘裏 (이태수홍형극리) 此花風韻有誰知 (차화풍운유수지) 若敎洗出新粧面 (약교세출신장면) 便是人間第一奇 (편시인간제일기) ―박흥종(朴興宗·?~?) 함경도 경성의 문인인 박흥종의 작품이다. 시인의 생몰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경성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함경도 지역 해안가는 본래부터 해당화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시인은 그 해당화를 보고서 연민의 감정을 담아 노래하였다. 빛깔도 태깔도 아름다운 꽃을 누군들 좋아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