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붉은 나무

[가슴으로 읽는 한시] 붉은 나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붉은 나무 철렁! 하고 잎사귀 하나 간밤에 떨어지더니 서리 내린 아침에는 숲이 온통 바뀌었네. 가여워라! 푸르던 빛을 붉게 비춰 부수더니 웬일인가! 흰 머리를 재촉하여 나게 하네. 거친 뜰을 바라보며 시름 겨워 쓸쓸할 때 먼 산에는 당돌하게 석양빛이 눈부셔라. 기억도 새로워라 지난해 이맘때쯤 병풍 같은 산길 뚫고 몽골로 향했었지. 紅樹(홍수) 一葉初驚落夜聲 (일엽초경낙야성) 千林忽變向霜晴 (천림홀변향상청) 最憐照破靑嵐影 (최련조파청람영) 不覺催生白髮莖 (불각최생백발경) 廢苑瞞?秋思苦 (폐원만우추사고) 遙山唐突夕陽明 (요산당돌석양명) 去年今日燕然路 (거년금일연연로) 記得屛風嶂裏行 (기득병풍장리행) ―이장용(李藏用·1201~1272) 고려 후기의..

[가슴으로 읽는 한시] 사직동 북쪽으로 이사하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사직동 북쪽으로 이사하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사직동 북쪽으로 이사하고 세금을 납부하라 너무 시달려 견디다 못 견뎌서 집을 팔았네. 겉보기엔 초가 아닌 기와집이나 작기가 게딱지에 달팽이 집일세. 손님 맞을 대문 꼴은 제법 좋아도 꽃을 심을 땅뙈기는 전혀 없구나. 내년에 장맛비가 오고 난 뒤면 밭을 갈아 살림살이 넉넉해질까? 稷北移居(직북이거) 苦被催租急(고피최조급) 謀窮賣及家(모궁매급가) 外非茅代瓦(외비모대와) 小是蟹成蝸(소시해성와) 今可門看客(금가문간객) 全無地揷花(전무지삽화) 明年霖雨至(명년임우지) 耕種富生涯(경종부생애) ―장혼(張混·1759~1828) 정조 순조 시대의 저명한 출판가 이이엄(而已�) 장혼의 한탄이다. 서울에서 나고 산 서울내기 장혼은 멋진 집을 갖고 싶..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우연히 읊다 의관을 갖춰 입고 사리에 밝은 선비라면 빈민 틈에 굶주려도 걱정할 것 하나 없네. 만국(萬國)에는 구름 걷혀 하늘의 달을 함께 보고 천가(千家)에는 꽃이 피어 모두들 봄을 맞네. 소강절은 시를 읊어 기상을 드러냈고 주렴계는 술에 취해 천진함을 보여줬지. 옛날부터 큰 은사는 도시에서 살았나니 무엇 하러 외딴 데서 낚시질을 해야 하나? 偶吟(우음) 明哲衣冠士子身(명철의관사자신) 簞瓢陋巷不憂貧(단표누항불우빈) 雲開萬國同看月(운개만국동간월) 花發千家共得春(화발천가공득춘) 邵子吟中多氣像(소자음중다기상) 濂溪醉裏足天眞(염계취리족천진) 從來大隱皆城市(종래대은개성시) 何必投竿寂寞濱(하필투간적막빈) ―윤휴(尹鑴·1617~1680) 17세기에 사..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야산을 바라보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야산을 바라보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가야산을 바라보고 큰 산의 진면목을 안 드러내고 기묘한 한 모퉁이 살짝 보였네. 조물주의 깊은 뜻을 잘 알겠거니 천기를 까발려서 다 보여줄까? 夙夜齋望倻山(숙야재망야산) 未出全身面(미출전신면) 微呈一角奇(미정일각기) 方知造化意(방지조화의) 不欲露天機(불욕로천기) ―정구(鄭逑·1543~1620) 선조 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한강(寒崗) 정구 선생이 지은 시다. 61세 되던 1603년 겨울에 경상도 성주에서 지었다. 그해 9월 관료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 북쪽에 숙야재(夙夜齋)를 짓고 머물 때였다. 남쪽 멀리에는 가야산이 버티고 서 있는데 그날 따라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싸서 산의 모퉁이만 살짝 드러났다. 산 전체를 감추고 시야를..

[가슴으로 읽는 한시] 괴석

[가슴으로 읽는 한시] 괴석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괴석 이 한 마리를 창가에 매달아 놓고 뚫어지게 바라보면 수레바퀴처럼 커 보이네. 이 돌을 얻은 뒤로 나는 더 이상 화산(花山) 쪽으로 앉지도 않는다. 怪石(괴석) 窓間一蝨懸(창간일슬현) 目定車輪大(목정차륜대) 自我得此石(자아득차석) 不向花山坐(불향화산좌) ―최립(崔 ·1539~1612) 송윤혜 선조 때의 저명한 문인 간이(簡易) 최립이 젊은 시절 황해도 옹진군에서 벼슬살이할 때 지었다. 시에 나오는 화산은 옹진군에 있는 산이다. 작은 괴석을 얻어 관아 안에 놓아두었다. 이제는 발품 팔며 명산을 구경하러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괴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그 돌이 점차 불어나 화산처럼 거대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옛날 기..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달력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달력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달력 산에 살기에 애초부터 달력 따윈 필요 없나니 날이 차면 곰은 겨울잠 자고 날이 따뜻하면 개구리는 깨어나지. 이 책이 생긴 뒤부터 귀찮은 일 한 가지 불어났으니 이웃 사는 늙은이 몇 년생인지도 기억하네. 題時憲書(제시헌서) 山家元不識容成(산가원불식용성) 寒則熊藏 蟄驚(한즉웅장난칩경) 自有此書多一事(자유차서다일사) 隣翁能記某年生(인옹능기모년생) ―강진(姜?晉·1807~1858)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19세기 전기의 시인 대산(對山) 강진이 달력에 적어둔 시다. 1847년에 강원도 철원군의 작은 고을인 안협(安峽)의 현감으로 재직할 때 지었다. 현감이라고는 하나 깊은 산골짜기 고을이라 서울을 벗어나 사는 여유가 있다. 날씨가 추워지니 겨울이 왔나..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섣달 그믐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섣달 그믐날 해는 가도 나 죽은 뒤에 다시 또 돌아오고 풍경은 전과 똑같고 초당은 한적하겠지. 남은 자들 속에서는 멋진 사람 찾기 어려워 혼백인들 이 세상을 무엇 하러 그리워하랴? 술꾼의 자취 서린 무덤 그 위로 계절은 지나가고 시인의 명성 남은 옛집 강산만은 지켜주겠지. 낙화유수 인생이라 한평생 한이러니 세상만사 유유하다 상관 않고 버려두리라. 除夕(제석)歲去應吾死後還(세거응오사후환) 風光依舊草堂閒(풍광의구초당한) 典型難覓餘人裏(전형난멱여인리) 魂魄寧思此世間(혼백영사차세간) 酒跡荒墳隨節序(주적황분수절서) 詩名故宅有江山(시명고택유강산) 落花流水平生恨(낙화유수평생한) 一切悠悠摠不關(일절유유총불관) ―이만용(李晩用·1792~1863) 19세기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지팡이 짚고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지팡이 짚고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지팡이 짚고서 지팡이 짚고서 사립문 나서니 상쾌한 기분이 끝없이 샘솟네. 사방의 산들은 창을 세워 호위하고 한 줄기 시내는 구슬처럼 흘러가네. 솔숲 길에 학이 서서 날은 저물고 바위틈에 구름 피어 서늘해지네. 까마득히 떠오르네 십 년 세월 꿈이여! 그 속에서 내 얼마나 허둥댔던가! 倚杖(의장)倚杖柴門外(의장시문외) 悠然發興長(유연발흥장) 四山疑列戟(사산의열극) 一水聽鳴璫(일수청명당) 鶴立松丫暝(학립송아명) 雲生石竇凉(운생석두량) 遙憐十年夢(요련십년몽) 款款此中忙(관관차중망)-이숭인(1349~1392) 송윤혜 고려말의 시인이자 학자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9~1392)의 시다. 날이 저물어 가는 저녁은 지팡이를 찾아 짚고 산책하러..

[가슴으로 읽는 한시] 홀로 길을 가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홀로 길을 가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4.02.14 05:38 홀로 길을 가다 새 한 마리 하늘가로 사라졌으니 높은 자취를 어디 가서 찾을까? 밤길에서는 조각달을 따라서 가고 아침에 일어나선 외로운 산을 마주보네. 가림막이 있으면 간담도 멀리 떨어진 것이나 사심이 없으면 옛날도 현재가 되네. 지팡이 멈추고 때때로 홀로 앉노니 흐르는 물이 바로 내 친구일세. 獨行一鳥天邊去(일조천변거) 高蹤何處尋(고종하처심) 夜行隨片月(야행수편월) 朝夢對孤岑(조몽대고잠) 有膜肝猶越(유막간유월) 無私古亦今(무사고역금) 停笻時獨坐(정공시독좌) 流水是知音(유수시지음)-송익필(宋翼弼·1534~1599) 조선 중기의 유학자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시다. 그는 고독한 사물을 즐겨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서울 길에서 옛 벗을 만나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서울 길에서 옛 벗을 만나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서울 길에서 옛 벗을 만나다 촌뜨기가 우연히 장안을 들어오면서 썩은 새끼줄로 낡은 안장을 칭칭 동여맸지. 고관을 겁내 아이 종은 허겁지겁 피하고 큰길에 들어서자 말은 한사코 뒷걸음치네. 꾀죄죄한 옷차림에 먼지를 다 뒤집어썼고 풀만 먹어 앙상해진 데다 낯짝까지 두꺼워졌겠지. 반기던 벗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서 똑바로 마주쳐도 교생이라 잘못 보네. 戲贈周卿丈田夫偶爾入長安 (전부우이입장안) 朽索累累縛破鞍 (후삭누루박파안) 僮畏達官忙引避 (동외달관망인피) 馬臨周道苦盤桓 (마림주도고반환) 荷衣冷落皆蒙垢 (하의냉락개몽구) 菜色憔枯更厚顔 (채색초고갱후안) 靑眼故人多不識 (청안고인다불식) 相逢枉作校生看 (상봉왕작교생간) 조선 숙종조의 문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