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술과 친구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진부한 질문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돈 많고, 지위가 높고, 교양 있고, 호화롭고 이렇게 사는 것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삶 자체를 즐겨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사람들은 웬만해선 이를 수긍하지 않으려 한다. 그만큼 세속적인 욕망의 굴레는 벗어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굴레를 벗어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다. 당(唐)의 시인 고적(高適)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친구를 칭송했다. ◈ 취한 뒤 장욱에게(醉後贈張九旭) 世上謾相識(세상만상식) : 세상 사람들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넘쳐 나지만 此翁殊不然(차옹수불연) : 이 노인만은 유달라 그렇지가 않도다 興來書自聖(흥래서자성) : 흥에 겨워 글..

대설(大雪)의 마법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겨울의 진객(珍客)은 뭐니뭐니해도 눈이다. 눈 중에도 산과 들판을 두껍게 덮은 대설(大雪)이다.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면서 나름의 빛깔과 모습을 지켜왔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사물들은 한겨울의 대설(大雪)을 만나면, 모두 같은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대설(大雪)은 자신의 빛깔 외에 다른 빛깔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의 독재자이며 동시에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복(防寒服)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설(大雪)은 겨울의 장관(壯觀)을 연출하지만, 이것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빛깔에 모습도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신흠(申欽)도 대설(大雪)을 묘사하기가 쉽지는 않았던 듯하다. ◈ 큰 눈(大雪..

세한도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사시사철 상록(常綠)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송백(松柏)이지만, 다른 나무들도 함께 푸르른 봄 여름 가을은 그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다가, 다른 나무들이,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모습을 보이는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푸르른 자태가 확연히 눈에 띈다는 것이다. 강건한 절개의 소유자는 평소에 잘 보이지 않다가, 역경과 고난의 때에 그 진가가 드러남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朝鮮) 후기의 서화가(書形麻)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세한도(歲寒圖)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세상에 내 놓..

제야에 잠 못 들고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제야(除夜)는 보통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을 일컽는 말이다. 요즘은 양력으로 해를 보내기 때문에 양력 말일 밤을 제야(除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는 특별함 때문에 사람들이 제야(除夜)에 느끼는 감회(感懷)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향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리고 나이 들어서 맞는 제야(除夜)는 무척 외롭고 쓸쓸하기 마련이다. 당(唐)의 시인 고적(高適)은 이러한 제야(除夜)의 감회를 시로 읊고 있다. ◈ 제야음(除夜吟) 旅館寒燈獨不眠(여관한등독불면) : 여관 차가운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루고 客心何事轉凄然(객심하사전처연) : 나그네 속마음 무슨 일로 이리도 처절한가 故鄕今夜思千里(고향금야사천리) : 고향서도 오늘밤 먼 곳의 ..

강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들이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대부분 눈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눈의 어떤 면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 것일까 순백의 순결함이 주는 매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무차별적인 순응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매력은 눈이 만들어주는 고즈넉한 격리감일 것이다. 평소에 오가던 산야라도 눈이 내리고 나면, 그 느낌이 전혀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평범하고 익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의 왕래도 모두 끊기고, 전혀 낯설고 적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눈뿐일 것이다. 당(唐)의 문인 유종원(柳宗元)은 눈 내린 강(江)의 적막함과 격리감을 짧은 시로 그려내고 있다. ◈ 강설(江雪)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 새는 날지 않고 萬徑..

한겨울과 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에도 꿋꿋이 자신의 기품을 지키는 소나무와 측백나무(松柏)를 사람들은 세한심(歲寒心)이 있다고 칭송한다. 과연 이 나무들에게 한겨울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기개(氣槪)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소나무나 측백나무가 아니더라도 상록(常綠)의 나무나 겨울철에 꽃을 피우는 초목을 보고도 세한심을 느끼는 사람도 많이 있다. 당(唐)의 시인 장구령(張九齡)은 단귤(丹橘)나무에서 세한심을 느꼈다. ◈ 감우사수지사(感遇四首之四) 江南有丹橘(강남유단귤) 강남에 단귤나무 經冬猶綠林(경동유녹림) 겨울이 지나도 푸른 숲이네 豈伊地氣暖(개이지기난) 어찌 그 땅의 기운이 따뜻함이리..

달력 없는 세상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 진부한 질문에 아직도 정답은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이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달력이 먼저인가? 세월이 먼저인가? 이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답은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은 이성적인 것을 일부러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시계가 고장난다면 시간이 멈춘다거나, 달력이 없으면 세월도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해도 이를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럴싸하다고 추켜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은거(隱居)의 일화만을 남기고 있어 태상은자(太上隱者)라고 불리는 당(唐)의 시인은 달력 없는 세상을 의미심장하게 그려냈다. ◈ 사람들에게 답함(答人) 偶來松樹下(우내송수하)..

동백 이야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한 겨울의 산야(山野)에서 붉은 꽃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만약 이 세상에 동백(冬柏)이라는 나무가 없었다면, 한 겨울에 붉은 꽃을 보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 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백은 겨울의 홍일점(紅一點)으로 겨울의 삭막함을 녹여내는 희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상록의 잎새 사이로 선홍(鮮紅)의 꽃잎을 수줍은 듯 드러낸 동백의 자태는 한 겨울에 만나는 진경이라서 더욱 황홀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하얀 눈 속에 빨갛게 핀 동백을 만난다면 그 감회는 배가 될 것이다. 송(宋)의 시인 육유(陸游)는 이러한 설중(雪中)의 동백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 ◈ 동백(山茶) 雪裏開花到春晩(설리개화도춘만) : 눈 속에 꽃을 피워 늦은 봄까지 이르나니 歲閒耐久孰如君(세..

설과 거울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세월의 흐름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으니, 하나는 쉼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세월은 그저 흐를 뿐,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日月逝矣 歲不我延)”라고 탄식한 것은 이러한 세월의 속성을 잘 함축하고 있다. 잠시의 멈춤도 없이, 어떠한 가림도 없이 흐르는 세월이지만, 그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던히도 세월이 흐르는 모습을 그려내려 했지만, 비유적 방법 외에는 달리 수가 없었다. 흐르는 물 정도가 가장 근사한 모습을 띠는 것으로 사람들은 간주해왔다. 이처럼 세월 자체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세월이 흐른 흔적은 사물마다 각자 다른 양상으로 남게 마련이다. 일상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월의 흔적들이 유..

입춘 날에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맨 앞에 있으면서, 봄뿐만 아니라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節氣)가 바로 입춘(立春)이다. 보통 양력 이월 사일과 겹치는 이 날, 사람들은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거나, 대문에 용(龍) 자와 호(虎) 자를 써 붙여 한 해의 복과 안녕을 빌곤 하였다. 묵은해가 새해로 바뀌고,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날로 인식되기 때문에, 아직 여전히 춥고 삭막한 겨울임에도, 입춘(立春)이 되면 사람들은 봄을 떠올리고, 봄의 모습을 성급하게 그리곤 하였으니, 송(宋)의 시인 장식(張)도 그러하였다. ◈ 입춘에 우연히 짓다(立春偶成 ) 律回歲만빙霜少(율회세만빙상소) : 계절은 돌고 해는 늦어 얼음과 서리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