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보릿고개의 위로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보릿고개의 위로 입하(立夏)가 지나면서 나뭇잎의 푸르름은 속도를 더하기 시작한다. 이제 신록(新綠)이라는 말은 무색하다. 짙은 녹음(綠陰) 곧 농록(濃綠)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이즈음에 짙어지는 것은 나뭇잎 빛깔뿐이 아니다. 농사일은 고되고 먹을 것은 동이 난 농부의 걱정 또한 짙어만 간다. 보릿고개에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것은 역시 풋풋한 자연이고 마음 맞는 친구였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상수(李象秀)는 이러한 초여름의 모습을 정감 나게 그리고 있다. ◈ 친구를 찾아가 만나지 못하고(訪友不遇) 農家四月麥如雲(농가사월맥여운) : 농가의 사월은 보리가 구름같고 척촉花開不見君(척촉화개불견군) : 철쭉꽃은 피었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네 小婢留人沽酒去(소비류인고주거) : 작은 계..

봄 산에 밤이 드니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시기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봄 산은 형형색색의 꽃과 싱그러운 초록이 어우러져 보통은 화창한 날과 잘 어우러지고, 실제로 사람들이 봄을 즐기는 시각은 대부분 낮이다. 날씨로 보아도 봄은 밤이 되면 온도가 상당히 낮아지므로 사람이 머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늦봄의 경우는 여름이나 마찬가지인 날들도 있어서 달 밝은 산 속을 거닐만한데, 이 같은 밤 산행은 낮과는 다른 묘미(妙味)가 있다. 당(唐)의 시인 우량사(于良史)는 늦봄의 진풍경(珍風景)을 만끽(滿喫)한 행운아였다. ◈ 춘산야월(春山夜月) 春山多勝事(춘산다승사) : 봄 산에는 좋은 일도 많아 賞玩夜忘歸(상완야망귀) : 느끼고 즐김에 밤 되도록 돌아가길 잊었네 국水月在手(국수월재수) ..

사람보다 꽃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예나 지금이나 꽃과 미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둘 다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한다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외양의 모습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를 따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당연시한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 여성 인권이니 여성 비하니 하며 시비를 따지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말(麗末)의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꽃과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는 장면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 절화행(折花行)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알 같은데 美人折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미인이 모란꽃 꺾어 창앞을 지나간다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웃음을 머금고 박달나무 신랑에게 물었다 花强妾貌强(화강첩모강)..

잡사(雜事)는 가라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할수록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대부분 이해관계로 얽히지만, 친구들도 출세한 사람에게 꼬이는 게 세상인심이다. 세속적 성공이 잘사는 삶과 전혀 동일시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불을 보고 무작정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성공을 향해 질주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회의가 들게 되고, 그럴 때면 꿈꾸는 게 바로 전원생활이다. 그러나 전원생활을 한다 해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전원생활 또한 만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농사지으며 사는 생활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알았던 도연명(陶淵明) 같은 사람만이 느끼는 소회(所懷)는 어떠했을까? ◈ 시골에 돌아가다..

사람의 향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사람이 어려서 부모나 스승 같은 어른들께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어린 사람들은 대부분 “예” 라고 대답하며, 실제로 마음속으로도 그러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그러면 훌륭한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이 물음에 닥치면 속 시원한 대답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보통 과거(科擧) 같은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반대로 명리(名利)를 초월해 자유롭게 사는 것을 훌륭하다고 생각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벼슬길에 나서느냐 나서지 않느냐가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인간으로서의 향기를 지니며 산다면, 그것이 훌륭한 삶일 것이다.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이 생각한 훌륭한 사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

만대루와 백제성루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우리나라에 있는 50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마을 중 하나로 안동 하회(河回) 마을이 있다. 이곳은 풍산(豊山) 류씨(柳氏)가 대대로 세거(世居)하던 곳으로, 사당(祠堂), 종택(宗宅), 서원(書院), 정사(精舍), 누대(樓臺), 강학당(講學堂) 같은 다양한 건축물들이 나름의 멋과 역사를 지닌 채 보존되고 있다. 이들 건축물들은 모두 나름의 명칭이 붙여져 있는데, 보통은 지명을 본뜨거나, 그 용도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붙여지지만, 간혹 그것들과 유관한 유명 글귀에서 이름을 따오기도 한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屛山書院)의 만대루(晩對樓)는 그 앞에 펼쳐지는 경관만큼이나 그 누호(樓號) 또한 운치가 넘쳐난다. 당(唐)의 시인 두보(..

여름 산의 밀어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여름은 푸름의 계절이다. 산 빛은 푸르다 못해 검게 느껴지기도 한다. 들판을 지나는 강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산 속을 흐르는 계곡의 물은 푸른 숲이 비쳐서 그런지 몰라도, 그 빛이 더욱 푸르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산 속의 나무와 풀, 바위와 물이 한데 어우러진 계곡은 한 폭의 수채화이며, 무 엇과도 바꿀 수 없는 풍류(風流)와 힐링(healing)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는 이러한 산 속 계곡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 청계(靑谿) 言入黃花川 황화천에 들어가려면 每逐靑谿水 늘 청계의 물을 따라가야 하네 隨山將萬轉 산 따라 물길은 만 번을 돌지만 趣途無百里 가는 길 백리도 못되는 곳 聲喧亂石中 어지러운 돌 사이에 물소리 시끄럽고 色靜深..

날씨와 인생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인류 생활에 있어서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제일 변한 것 중의 하나가 날씨에 대한 예측 능력일 것이다. 기상 관측용 슈퍼컴퓨터는 기압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날씨의 변화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이다. 날씨는 과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여전히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러한 날씨의 예측불가의 속성은 인생의 모습과 퍽이나 닮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인생을 날씨에 비유하곤 하는 것이다. 조선의 시인 김시습(金時習)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 개었다가 비 내리다가(乍晴乍雨)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잠깐 개었다 비 내리고 내렸다가 도로 개이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하늘의 이치도 이러..

게으름이 지혜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여름은 무더워야 여름이다. 자연 생태의 순환과 유지는 철마다 그 철에 맞는 날씨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더위는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한다. 이런 때는 사람이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신의 체력이나 체질에 맞추어 적당히 게으른 것이 무더위를 탈 없이 지나가는 데는 도리어 약이 될 수 있고, 이처럼 융통성 있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이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무더운 여름 대낮에 자다 깨다 하며 빈둥대는 일상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 여름 대낮에 우연히 짓다(夏晝偶作) 南州溽暑醉如酒(남주욕서취여주) : 남쪽 고을이라 무더위에 지쳐 마치 술에 취한 듯하고 隱几熟眠開北牖(은궤숙면개배유) : 안석에 기댄 채 깊은..

여름밤의 매력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계절은 계절마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봄 가을을 선호하지만, 그것은 온도나 풍광 같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 의한 판단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마다 보편성보다는 유일한 개체로서의 개성이 작용하여 형성되는 매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계절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도리어 밋밋하여 무난한 것 보다, 심하지만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계절이 매력에는 더욱 어필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여름은 매력적이다. 무덥고 축축하여 생활에는 많은 불편을 주지만, 여름 특유의 매력은 그래서 도리어 빛을 발한다. 당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시를 통해 여름의 매력을 살피는 것 또한 매력적이다. ◈ 어느 여름 남정에서 신재를 생각하며 (夏日南亭懷辛大) 山光忽西落(산광홀서낙)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