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가을 연꽃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가을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하나 들라하면 그것은 ‘맑다’일 것이다. 가을이면 우선 하늘이 맑고, 다음으로 날씨가 맑고, 마지막으로 물이 맑다. 맑은 하늘 아래서, 맑은 날씨에, 맑은 물에 고운 연꽃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허난설헌(許雪軒)은 길지 않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호사(豪奢)를 누리는 행운이 있었다. ◈ 채연곡(采蓮曲)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 가을은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 흐르고 荷花深處繫舟(하화심처계난주) : 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다네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 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서..

가을 상념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맑고 푸른 하늘에 한 조각 흰 구름이 떠 있는 모습은 가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여기에 기러기까지 가세하면 가을 하늘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이다. 그러나 가을이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부쩍 쌀쌀해진 바람이라도 갑자기 불어오고, 낙엽이 여기저기 나뒹구는 모습은 쓸쓸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쓸쓸한 모습을 지닌 것이 가을이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러한 가을의 양면성을 잘 그려내고 있다. ◈ 추사(秋思) 夕照紅於燒(석조홍어소) : 석양은 타는 불빛보다 붉고 晴空碧勝藍(청공벽승람) : 맑은 하늘은 쪽빛보다 푸르네 獸形雲不一(수형운불일) : 짐승모양 구름은 일정하지 않고 弓勢月初三(..

가을 국화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가을 하면 떠오르는 꽃은 뭐니뭐니해도 국화이다. 색깔과 모양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기도 하지만, 어느 것이든 가을 느낌을 풍기기는 매한가지이다. 집안에서 정성들여 기른 국화는 고고한 선비의 기품을 지니고 있고, 산야를 덮고 있는 들국화는 청초하면서도 강인하다. 이러한 국화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가을 정취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도 예외가 아니었다. ◈ 몽득과 술 사 마시고 후일을 기약하며(與夢得沽酒閑飮且約後期) 少時猶不憂生計(소시유불우생계) : 젊어서도 생계에 마음 두지 않았거늘 後誰能惜酒錢(노후수능석주전) : 늙고 난 뒤 누가 술값을 아낄 수 있을까 共把十千沽一斗(공파십천고일두) : 일만 전을 모두 들여 술 한 말 사는데 相看七十缺三年(상간..

어느 가을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들은 가을에 유독 외로움을 타기 쉽다. 그 래서 가족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친구가 그립다. 홀로 먼 타향을 떠돌다가 가을을 맞는 사람들의 외로움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맑고 아름다운 가을 풍광을 함께 하지 못하는 서글픔과 쌀쌀해진 날씨와 지는 낙엽이 주는 쓸쓸함이 합쳐져 외롭고 그리운 마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가을날에 객지에서 가까운 친구들을, 그것도 뜻하지 않게 우연히 만난다면 그 반가움이 어떻겠는가? 당(唐)의 시인 대숙륜(戴叔倫)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 객사에서 친구들과 우연히 모이다(江鄕故人偶集客舍) 天秋月又滿,(천추월우만), 때는 가을, 달은 또 보름달 城闕夜千重.(성궐야천중), 성궐에 밤이 들어 밤은 천 겹이나 깊은데 還作江南會,(환작강남회), 강..

가을 골짜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맑고 서늘한 가을날은 걷기에 더없이 좋다.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다니면서 가을의 이모저모를 눈여겨 들여보다 보면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가을 정취가 새롭게 몸에 와 닿기도 한다. 하늘과 산, 물처럼 크고 일반적인 풍광에서도 가을을 느낄 수 있지만 나뭇잎이나 돌, 새와 같은 작은 정경들 속에도 빠짐없이 가을은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어느 가을날 한가롭게 홀로 걸으며 가을 정취를 꼼꼼하게 더듬고 있었다. ◈ 남쪽 골짜기에서 짓다(南磵中題) 秋氣集南磵(추기집남간) : 가을 기운 남쪽 골짜기에 모여들고 獨遊享午時(독유향오시) : 혼자 거닐며 한낮 시간을 즐기노라 廻風一蕭瑟(회풍일소슬) : 회오리 바람이 한번 소슬하게 불고 林景久參差(임영구참치) : ..

높이 누대에 올라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뭐니뭐니해도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낙엽이 지고, 서리가 내리고, 기러기가 하늘을 날으면, 사람들은 사무치게 고향 가족 친구가 그리워진다. 이럴 때 사람들은 산이나 언덕 같은 높은 곳을 찾곤 하는데, 이것은 조금이라도 먼 데를 내다보며 그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는 평생을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가 가을에 느낀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높은 곳에 올라(登高) 風急天高猿嘯哀,(풍급천고원소애), 바람은 빠르고 하늘은 높아 원숭이 휘파람소리 애달픈데 渚淸沙白鳥飛回.(저청사백조비회). 물가는 맑고 모래는 하얗고 새는 날아 돌아오네 無邊落木蕭蕭下,(무변낙목소소하), 보이는 곳마다 나무에선 나뭇잎 쓸쓸히 떨어..

가을밤 그리움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누군가를 절실히 기다려 본 사람은 가을밤이 얼마나 길고 긴지를 안다. 기다리는 사람이 언제 들이닥칠지를 몰라서 일부러 잠을 자지 않는 의미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이 잘 들지 않는 경우이다. 그래서 잠 못 이루고 밤을 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밤의 정경들이 세세하게 눈에 들어오고 그 정경들이 또 다른 그리움을 자아내도록 하기도 한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가을 밤,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잠 못 들고 있는 아낙의 모습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 차가운 방에서(寒閨怨) 寒月沈沈洞房靜(한월침침동방정) : 차가운 달빛에 밤은 깊어 방은 고요한데 眞珠簾外梧桐影(진주렴외오동영) : 진주 구슬주렴 밖으로 오동..

초겨울 풍광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늦가을 내지 초겨울이 주는 느낌은 스산함일 것이다. 바람은 한층 더 쌀쌀해지고, 나뭇잎은 거의 다 떨어져 나무들은 초췌한 알몸을 드러낸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던 낙엽들마저도 이맘때가 되면 누군가에 의해 쓸려나가고 보이지 않는다. 들은 텅 비고, 산은 듬성듬성 빈자리가 드러난다. 까맣게 땅에 말라붙은 풀들 위로 하얗게 서리가 엉기어 있다. 이처럼 초겨울의 풍광들은 한결같이 스산한 느낌을 주지만, 이 와중에도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우는 생명체들도 있다. 송(宋)의 시인 소식(蘇軾)은 초겨울의 스산함 속에서 도리어 생명의 빛을 찾아낸다. ◈ 초겨울에 짓다(初冬作) 荷盡已無擎雨蓋(하진이무경우개) : 연꽃 다 떨어져 비 막을 덮개 없고 菊殘猶有傲霜枝(국잔유유오상지) : 국화는 아직 남..

달과 서리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요즘처럼 밤이 밝은 시대에 달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기가 없던 시절에 달은 밤을 밝혀주는 요긴한 존재였다. 달이 밝혀주는 밤의 풍광은 낮과는 또 다른 운치를 자아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차분하고도 신비스러운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낮에는 잊고 지냈던 이런저런 상념들이 밤 특히 달밤에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달이 촉발시키는 상념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리움과 외로움인데, 이것이 가을이라는 계절과 겹치게 되면 그 강도가 배가된다고 할 수 있다.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은 이러한 가을 달밤의 상념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밤의 상념(夜思) 床前明月光,(상전명월광), 침상 앞에 밝은 달빛 비쳐드니 疑是地上霜.(..

초겨울과 술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초겨울로 들어서면,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차가우지고, 서리 내리는 날이 잦아진다. 이에 따라, 들판의 풀들은 까맣게 말라비틀어지고 지고 몇 잎 남지 않은 나뭇잎마저도 모두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의 마음도 왠지 허전해지고, 무심한 세월 앞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주는 친구와 술이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초겨울의 을씬함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 초겨울, 술은 익어가는데(冬初酒熟) 霜繁脆庭柳(상번취정류) : 서리 자주 내리자 마당의 버들 시들고 風利剪池荷(풍리전지하) : 바람 매서워지자 연못의 연꽃이 베어졌네 月色曉彌苦(월색효미고) : 달빛은 새벽이 되니 더욱 맑고 鳥聲寒更多(조성한경다) : 새소리는 날 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