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여덟 살 밤골 소년의 가을 노래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뒤뜰의 누런 밤은 벌이 아니더라도 터진다는(後園黃栗不蜂) 김삿갓의 말마따나, 바야흐로 밤 터지는 철이 왔다. 김삿갓의 뒤뜰만이 아니고, 앞산 뒷산 옆산 할 것 없이 터지는 밤, 그 밤나무가 빼곡한 마을이 밤골 즉 율곡(栗谷)이다. 이 땅에 흔하디흔한 게 밤나무인지라, 밤골을 이름으로 한 마을도 한둘이 아니다. 이 중 하나가 파주 파평의 밤골이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 이이(李珥)가 가향인 이곳의 이름을 따서 율곡(栗谷)을 자신의 아호로 삼은 덕에, 파주 파평의 율곡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밤골이 되었다. 이율곡은 어려서 이 마을 어귀에 세워진 정자에서 노닐곤 했는데, 임진강 가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이 그것이다. 이율곡은 화석정을 제목으로 한 시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

단풍과 매화의 경염(競艶)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인간 세상에 여인의 미색을 평하는 많은 말들이 있어 왔다. 나라를 망쳐도 포기할 수 없는 미색이 경국(傾國)이요,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꽃마저도 부끄럽게 한다는 수화(羞花), 밝은 달을 숨게 만든다는 폐월(閉月), 날아가던 기러기를 떨어지게 만드는 낙안(落雁), 물고기가 숨고 마는 침어(沈魚)가 모두 절세의 미색을 일컫는 말들이다. 그러나 세상에 고운 것이 여인만은 아니다.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은 봄에 피는 꽃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로 미녀가 아닌 가을 단풍을 들고 있다. ◈ 산으로 떠나다(山行)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멀리 한산에 오르려는데 돌길 비스듬하고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에 그 사람 집이 있어라 停車坐愛楓林晩(정..

술 바다의 국화 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가을하면 생각나는 꽃은 단연 국화일 것이다. 들판 산판 할 것 없이 하얗고 노랗게 형형색색으로 지천에 깔린 게 들국화이다. 음력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에 꺾는 구절초(九節草)를 비롯하여 쑥부쟁이, 개미취, 산국, 감국 등 이름도 각양이다. 약재로 쓰이기도 하고 관상(觀賞)의 대상이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용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꽃이 국화인 것이다. 또한 본디 주인이 없어서 꺾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할 만큼 흔하면서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자존심과 지조의 선비 품성과 은자(隱者)의 탈속(脫俗)한 풍모를 지닌 것이 들국화이다. 국화가 은자(隱者)의 꽃으로 불리게 된 것은 중국 동진(東晋)의 도연명(陶淵明)에서 연유한 바가 크다. ◈ 술 마시며(飮酒其七) 秋菊有佳色 (..

산거추명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중의 하나가 산은 고요하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인(仁)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고요하다고(仁者樂山, 仁者靜) 말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산은 고요하다는 관념의 소산이다. 과연 산은 고요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멀리 산 밖에서 볼 때 산은 고요하겠지만, 산 속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산에는 이런저런 움직임과 다양한 소리들이 혼재해 있다. 탕(唐)의 시인 왕웨이(王維)의 눈에 비친 산속 모습 또한 이러하다. ◈ 산속의 가을 저녁 空山新雨后(공산신우후) 텅빈 산에 막 비 내리고 난 뒤 天氣晩來秋(천기만내추) 하늘의 기색을 보니 날은 저물어 가을이 왔다네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보름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추고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맑은 샘..

만추삼우(晩秋三友)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모두 다를 터이지만, 가을 정취를 말하면서 국화를 빼놓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낙목한천(落木寒天)에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강직한 기품이 있는가 하면 가을 산야(山野) 어느 곳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소박하고 친숙한 풍모에 탈속(脫俗)한 은자(隱者)의 초연한 자태도 두루 갖추었으니, 가을 어느 자리에도 어울리는 게 바로 국화리라. 이처럼 국화가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환영받는 가을 친구인 것은 기왕에 알겠고, 여기에 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忘憂物)이라 불리는 술이 합세하여야, 비로소 늦가을 세 친구(晩秋三友)가 그 만남을 완성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인물 고의후(高義厚)의 시에 보이는 내용이다. ◈ 국화를 읊다(詠菊) 有花無酒可堪嘆(..

가을 편지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늦가을마저도 늦어져 가는 이즈음, 길을 걷다 보면 자주 들리는 노래가 있으니 ‘가을 편지’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되는 고은의 노랫말처럼, 가을엔 누군가가 그립고, 그래서 편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리라. 마음만 먹으면 즉시로 얼굴까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편지는 여전히 사람의 애절한 그리움을 담아내는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다. 하물며 소식을 전할 방법이 달리 없었던 시절에 편지가 갖았던 의미는 어떠했으랴! 탕(唐)의 시인 장지(張籍)는 가을날을 맞아 편지를 쓰는 설렘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가을 그리움(秋思) 洛陽城裏見秋風(낙양성이견추..

어느 가을날의 상념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가을은 계절만이 아니다. 인생에도 가을은 있다. 초로(初老)의 나이인 오륙십이 인생으로 치면 가을이다. 보통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직장에서건 현업(現業)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고, 동시에 곧 닥칠 노후(老後)에 대한 불안이 엄습한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건만, 이룬 것은 거의 없고, 앞으로 할 일도 변변치 않은 것이 이 나이 사람들의 흔한 모습이다. 상념의 계절 가을이 되면, 이들의 시름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탕(唐)의 시인 바이쥐이(白居易)도 예외는 아니었다. ◈ 가을 저녁 시골집에서 시름을 적다(秋暮郊居書懷) 郊居人事少(교거인사소) : 성 밖 집에 사람 왕래 드물고 晝臥對林巒(주와대림만) : 낮인데도 누워서 산을 바라보네 窮巷厭多雨(궁항염다우) : 곤궁한 동네는 ..

여산진면목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어떤 사물이건 늘 일정하게 보이진 않는다.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날씨나 계절, 시간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그 사물의 모습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러면 과연 사물마다 진면목(眞面目)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설사 진면목(眞面目)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일까? 백두산에 올랐다하여 누구나 천지(天池)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天池)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천지(天池)가 없는 것이 백두산의 모습이겠지만, 그것이 백두산의 진면목(眞面目)은 아닐 것이다. 송(宋)의 시인 쑤둥포(蘇東坡)가 백두산을 보았을 리는 없지만, 그는 일찍이 산의 모습이 보기에 따라 각양각색임을..

하늘을 덮고 땅을 베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늘 함께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름이다. 철이 없을 때는 철이 없는 대로,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가 든 대로 , 사람은 그때그때의 시름이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는 시름이 없는 것을 시름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시름을 달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시름을 달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탕(唐)의 시인 리바이(李 白)는 술을 통음(痛 飮)하면서, 마음 통하는 벗들과 청담(淸談)을 나누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고자 했다. ‘벗을 만나고 묵다’라는 제목만으로 시의 내용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지만, 벗을 만나 며칠을 묵으면서 한 일은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 자체로는 ..

설천지(雪天地) 별천지(別天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시절(時節)은 어김이 없다. 다만 사람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지난 가을의 잔상(殘像)에서 여전히 머무른 사이, 시절(時節)은 성큼 겨울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겨울은 역시 눈이다. 그것도 밤사이 소리 없이 내린 눈이다. 하루 밤 사이에 계절이 바뀐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눈 말고 또 있을까 눈은 단순한 계절의 바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 낸 순백(純白)의 마법사(魔法師)이자, 사람의 마음을 청정화하는 순결(純潔)의 주술사(呪術師)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文人) 신흠(申欽)도 밤사이 내린 눈의 마법과 주술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 큰 눈(大雪) 塡壑埋山極目同(전학매산극목동)골 메우고 산을 덮어, 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