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우이팡 “난세 여성, 조국과 후세 영광 위해” 중국어 취임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9〉 우이팡(둘째 줄 오른쪽 첫째)은 현안에 관한 회의를 자주 열었다. 1933년 일본군이 화베이(華北)를 점령하자 ‘국제문제토론회’를 열었다. [사진 김명호] 개혁과 혁명은 혼란의 시작이지 마무리가 아니었다. 19세기 중후반 개혁과 혁명 바람이 불면서 중국은 조용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어느 구석에서건 총질이 벌어졌다. 유서 깊은 골목에서 몽둥이가 춤을 추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사람의 비판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나지막하지만 힘 실린 목소리 붓처럼 곧은 자세에 학생들 환호 구애하던 국민당 고관 결혼 소식에 충격 받은 우이팡, 교육에 전념 전란·자연재해 잦은 시대 맞춰 ‘후생’을 교훈 삼아 23년간 재직 엉망이긴 교육기관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에서 유..

장제스 교육주권 선언…35세에 모교 교장 된 우이팡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8〉 우이팡 가족이 남긴 유일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부친, 동생, 모친, 조모, 천수퉁의 형과 찬수퉁. 뒷줄 왼쪽 첫째가 14세 소녀 우이팡. 옆은 언니와 오빠. 1907년 우한(武漢). [사진 김명호] 서구 열강의 중국 진출은 성경이 대포나 돈보다 먼저였다. 선교사들은 도시와 농촌에 학교부터 세웠다. 여성교육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1개 현(縣)에 외국인이 설립한 여자 중학 한두 개는 있었다. 최종 목표는 선교였다. 1911년 가을, 혁명이 발발했다. 신정(新政)이 실시되자 여학교가 늘어났다. 여중 졸업생을 수용할 고등교육기관은 전무했다. 당시 대학은 여학생을 뽑지 않았다. 자연과학·인문학에 두루 출중 “우이팡, 중국 신·구가 융합된 학생 전족한 몸으로 모든 ..

저우언라이 “우이팡은 모든 면에서 쑹메이링을 능가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7〉 ‘지혜의 여신’ 우이팡 진링여자대학 교장 우이팡은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선포식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유엔헌장(聯合國憲章)에 서명하는 우이팡. [사진 김명호] 1985년 11월 1일, 중앙정치국원 시중쉰(習仲勛·습중훈)과 전인대 부위원장 펑충(彭沖·팽충)이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장수(江蘇)성 서기와 성장을 대동하고 난징대학 부속병원을 찾았다. 입원 중인 노년의 우이팡(吳貽芳·오이방)과 생애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병원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중국 여성 교육 선구자 타계하자 대륙 각지, 미국서도 날아와 애도 17세 때 부모·형제 갑자기 잃어 이모부 천수퉁, 친자식처럼 키워 베이징서 영어 교사로 일하다 학교 측 간청으로 진링여대 ..

‘동북군 제갈량’ 지에팡 대표 “한 손은 전쟁, 다른 손은 정전회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6〉 유엔기와 인공기 앞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미국대표 클라크(왼쪽 탁자)와 중·조연합군 수석대표 남일. 미군 3명, 북한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각각 2명씩을 배석시킨 두 사람은 눈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외신기자 100여 명과 일본기자 10명이 운집했지만 한국기자는 최병우가 유일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서 10시 12분 사이, 판문점.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회담은 세계 전쟁사상 기록을 세웠다. 개전에서 협정문서 서명까지 2년 하고도 17일이 더 걸렸다. 748일간, 회담하면서 싸우고, 싸우다가 또 마주했다. 승자와 패자의 만남이 아니다 보니, 회담이란 용어는 적합하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 한국전쟁 덕에 국제사회에 모습을..

문무 겸비한 전장의 사자 덩화 “전쟁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5〉 덩화는 연합군의 재상륙작전을 두려워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회담 중국 측 대표 덩화(鄧華·등화)는 중국지원군 2대 사령관이었다. 덩화 이후에도 양더즈(楊得志·양득지)와 양융(楊勇·양용), 두 명의 사령관이 있었다. 정전 2년 후인 1955년 9월 신중국 첫 번째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초대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원수 계급에 국방부장까지 겸했다. 양더즈는 대 군구(軍區) 사령관만 20년 이상 지내고 덩샤오핑에게 총참모장 자리도 물려받았다. 양융은 베이징군구 사령관과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거쳤다. 미국인 설립 명문 중학에 다니며 법률가 꿈꾸던 부잣집 아들 덩화 공산당 비밀집회 갔다 ..

펑더화이 “지구전과 회담 통해 전쟁 끝내려 38선 견지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4〉 정전회담 중국 측 대표 덩화(왼쪽 첫째)와 지에팡(오른쪽 첫째). 앉은 사람은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한 리커농(李克農). 뒷줄 중앙은 리커농의 고문 차오관화(喬冠華). [사진 김명호] 1951년 5월 17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전쟁 정전담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국가안전위원회(NSC)의 건의를 비준했다. “미국의 적은 소련이다. 참전도 안 한 소련이 뒤에서 조종하는 전쟁에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연합군은 중국지원군 참전 8개월 후인 51년 6월 중순, 38선 부근까지 퇴각했다. 전선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군사력도 겉보기엔 비슷해졌다. 지상군 병력은 북·중 연합군 우세 해·공군 화력은 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건 6·25전쟁 때문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항일전쟁 시절 미국 화교들이 미국인들에게 모금한 돈으로 중공 근거지 옌안에 세운 뤄싼지(로스앤젤레스의 음역) 탁아소는 중공과 미국 우호의 상징이었다. [사진 김명호] 무슨 전쟁이건 득실(得失)은 있기 마련이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6·25전쟁처럼 참전국의 득실을 헤아리기 힘든 전쟁도 드물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 4개국 중 영국은 득실이 비슷했다. 많은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미국의 참전에 동조했다는 소리 듣기엔 충분했다. 미국이 보기엔 이랬다저랬다 할 때가 많았지만, 기본은 미국 편이었다. 중국과도 크게 척질 행동은 안 했다. 국군과 미군의 38선 돌파를 적극 찬성하면서도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자는 주장은 바꾸지 않았다..

미 전투기 조종사 출신 천라드, 중국 공군의 날개 활짝 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2〉 1943년 10월 29일, 중국 항공위원들과 중국 공군기지를 시찰하는 천라드. 앞줄 오른쪽 첫째는 국민당 군 총 참모장 바이충시(白崇禧). 뒷줄 왼쪽 첫째가 천청(陳誠). 대만 천도후 국민당 부총재와 부총통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1931년 9월, 동북(만주)을 점령한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소·만 국경에서 소련 극동변방군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1935년은 100여 차례, 이듬해는 새해 벽두부터 3개월간 22차례 서로 총질을 했다. 1937년 7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항일전쟁을 선포했다. 스탈린은 국·공 합작으로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을 지지했다. 1937년부터 38년까지 1000여 대의 항공기..

공군 지원 맡은 류쩐 “싸우며 배워라, 조선 창공이 대학”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1〉 출격 전 대원들과 함께 선서하는 12전투 비행단 대대장 장지후이. 1952년 가을 랴오닝성 단둥. [사진 김명호] 류쩐(劉震·유진)은 후베이(湖北)성 벽촌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30년 봄, 열다섯 살 때,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난에서 탈피하려면 혁명을 해야 한다며 청년들을 부추겼다. 혁명이 뭐냐고 물으면 명쾌한 답변을 해줬다. “간단하다. 없는 사람들을 위해 원래 있었던 것들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거다.” 붉은 완장 차고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밭에서 땀 흘리던 류쩐도 호미를 집어 던졌다.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듬해 가을, 홍군 모자 쓰고 유격대원이 됐다. 류쩐은 뜀박질을 잘하고 사격술..

6·25 참전 펑더화이 “지상 전쟁은 중요치 않아…승패는 하늘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0〉 중공은 5대 이상을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에게 1급 전투영웅 칭호를 줬다. 왕하이(왼쪽)는 미군 전투기 5대를 격추하고, 4대를 폐물로 만들었다. 특급영웅이었다. 오른쪽은 2급 전투영웅 자오징원(焦景文).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31년이 지난 1984년 7월, 중국 국방부장 장아이핑(張愛萍·장애평)이 인솔하는 군사대표단이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 미군 수뇌부와의 회담 첫날 장아이핑이 왕하이(王海·왕해)를 소개했다. “우리의 공군 부사령관이다.” 육군참모총장 위컴과 나란히 앉아있던 공군참모총장 가브리엘이 놀란 표정 짓더니 황급히 일어났다. 경이로움에 흥분을 감추기 힘든 모습이었다. 왕하이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한국전쟁 때 바로 그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