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죽림칠현’ 칭송 들었던 양셴이, 자본주의 정보원 취급받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9〉 다이가 세상을 떠난 후 양셴이(앞줄 오른쪽)는 황먀오즈(가운데)의 서화와 산문을 즐기고, 딩충(앞줄 왼쪽)의 시사만화에 심취했다. 2000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1935년 12월 양셴이(楊憲益·양헌익)는 이집트를 여행했다. 밤에 안내인과 사막으로 갔다. 피라미드를 보자 술 생각이 났다. 술잔에 어른거리는 은빛의 달을 삼키다 보니, 꿈인지 인간 세상인지 황홀했다. 안내인이 은화 한 닢에 앞날을 봐 주겠다는 바람에 두 닢을 냈다. 눈감고 하늘 바라보던 안내인이 입을 열었다. “앞에 바다가 보인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가 초조한 모습으로 너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수많은 사연과 모험이 너와..

원로작가 양셴이 별세, 중화권 ‘중국 통째로 번역’ 추모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8〉 양셴이(뒷줄 오른쪽 다섯째)의 집에는 늘 문화인들이 붐볐다. 뒷줄 왼쪽 첫째가 혁명만화가 딩충(丁聰). 둘째는 명 극작가 우주광(吳祖光). 앞줄 오른쪽 둘째는 마오쩌둥이 볼 책을 골라주던 싼롄(三聯) 총경리 판융(范用). [사진 김명호]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새벽, 베이징 지수이탄(積水潭) 의원의 내과 병동에서 94세의 품위 있는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뉴스였다. 10여분 후 기자들이 병원을 포위하다시피 했다. 이튿날, 중국 홍콩 대만은 물론이고 온 중화권의 매체가 양셴이(楊憲益·양헌익)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 명의 문화 노인이 세상을 등졌다. 양셴이는 서구문화에 정통한 혁명가이며 중국의 마지막 사대부였다.” 중국청년보(中國靑..

대만 5·24 반미운동 역설…미국 물건 넘쳐나고 사상 탄압 광풍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7〉 1978년 12월 27일, 대륙과 수교 5일을 앞두고 대만과 단교 선후책을 협의하기 위해 방문한 미 국무차관의 차량을 둘러 싸고 계란을 던지며 시위하는 대만의 대학생과 군중들. 약 3만명이 청천백일기와 영문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사진 김명호]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5·24 반미운동이 당일로 그친 것이 애석했다. 훗날 지인에게 토로했다. “내가 뒤처리를 할 수 있었다면 군부대를 동원해 군중을 진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부대 이동은 장징궈의 동의가 없으면 어림도 없었다. 장징궈를 거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유일했다. 미 언론, 장징궈가 시위 사주 의심 첫 보도 기자 공산당 몰려 옥살이 양국 군사..

하루 만에 끝난 5·24 반미운동…대만 내각 총사퇴로 일단락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6〉 6·25전쟁 휴전협정 4개월 후, 미국의 전략기지 대만을 방문한 미국 부통령 닉슨과 공항을 떠나는 대만 총통 장제스. 1년 후 미국과 대만은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했다. 1953년 11월 11일 오후, 타이베이 쑹산(松山)공항. [사진 김명호] 5·24 반미운동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원인은 시위대의 성조기 모욕과 미 대사관원 구타, 기밀문건 탈취, 타이베이 경찰국 진입, 반정부 구호 등 다양했다. 미 대사관 측은 군중들이 난입하자 외교부에 전화로 사정했다. “상황이 험악하다. 대사관원 17명은 지하실로 피했다.” 부장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는 치안기관에 협조를 구했다. 헌병사령부와 경비총국은 기다려 보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예궁차오는 긴급회의..

대만인 살해 미군 용의자 무죄, 반정부로 비화한 반미운동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5〉 청년 구국단은 5·24 반미운동에 동원된 장징궈의 친위세력이었다. 기자들에게 구국단 설립 취지를 설명하는 장징궈. 1952년 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국부(國府·국민당 정부)의 대만 천도 반년 후,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했다. 총통 장제..

미국에 제거당할 위기의 장제스, 구세주는 북한 김일성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4〉 1957년 5월 24일 오후. ’미군의 인권 경시를 항의한다“는 팻말을 들고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청궁(成功)고중 학생들. 청궁고중은 장징궈가 설립한 청년구국단의 중심기지였다. 오른쪽 첫째가 훗날 대 작가로 명성을 떨친 천잉쩐(陳映..

중국인 살해한 미군 무죄 판결, 대만 반미감정 뇌관 터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3〉 1957년 5월 24일, 미국대사관을 흉물로 만든 타이베이 시민들. 대사관뿐만 아니라 미 공보관도 때려 부쉈다. [사진 김명호] 1957년 대륙이 3차 국·공합작을 제안하자 대만은 밀사를 파견했다. 배경에 대만의 반미 풍조가 있었다. 1954년 12월 2일,..

저우언라이 “미국은 대만을 하와이처럼 만들 생각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2〉 대륙은 사유제 폐지 후 삼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발동했다. 그 중 대약진운동은 철 생산을 제고하기 위해 사진과 같은 제련법을 개발했다가 철저히 실패했다. [사진 김명호] 1956년 10월 대만의 대표적인 월간지 ‘자유중국(自由中國)’에 ..

장제스 “대륙에 밀사 보내 마오쩌둥의 패를 파악하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1〉 쑹시롄(둘째줄 왼쪽 다섯째)은 황푸군관학교 생도 시절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입당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군 경력도 화려했다. 신중국선포 2개월 후 쓰촨(四川) 성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앞줄 왼쪽 셋째는 2차 세계대전 ..

장징궈 “우리는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나라에 태어났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0〉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선쥔산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대화 녹취도 수락했다. 일국양제의 시험구 홍콩반환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에 도착한 장쩌민. 1997년 6월 30일 오전, 홍콩 카이탁 공항. [사진 김명호] 한동안, 중국의 고위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