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140) 바람의 힘

Opinion :시조가 있는 아침 (140) 바람의 힘 중앙일보 입력 2022.09.08 00:40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바람의 힘 홍사성(1951~) 바람이 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더위가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는 일 다 그렇다 기쁨도 슬픔도 - 고마운 아침(책만드는집) 아득하여라, 우리 삶이여! 참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무덥더니, 장마가 오더니, 태풍이 휩쓸고 가더니, 갑자기 더위가 사라졌다. 시치미 뚝 떼고 가을이 왔다. 이 시조의 참맛은 종장에 있다. 마치 우리 사는 일처럼, 기쁨도 슬픔도 가을처럼 그렇게 갑자기 온다. 그러니 너무 서두를 일도, 너무 절망할 일도, 너무 기뻐할 일도 아닌 것이다. 홍사성은 의리의 사나이다. 사형(師兄)인 설악 무산 스님이 입적한 뒤에도 스님의 유지를..

(139)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Opinion :시조가 있는 아침 (139)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중앙일보 입력 2022.09.01 00:26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맹사성(1360∼1438)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소정(小艇)에 그물 실어 흘리 띄여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 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샸다 -병와가곡집 충성의 현대적 의미 조선 세종대에 좌의정을 지낸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 중 가을 편이다. 강과 호수 대자연에 가을이 드니 물고기들도 살이 올랐다. 작은 배를 띄워 흐르는 물속에 그물을 던져두고, 내가 이렇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음도 나라님의 은혜로다. 사람이 어떤 시대를 타고나는가는 참으로 중요하다. 고불의 노년기는 다행히 성군(聖君)의 시대였다. 왕..

(138) 석류 4

(138) 석류 4 중앙일보 입력 2022.08.25 00:40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석류 4 김종목(1938~ ) 잘 익은 가을이 알알이 박혀 있다 바람이 지나는 아슬아슬한 길목에서 순식간 팍-! 터져버린 저 핏빛 수류탄.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상처 많은 여름이 가고 있다 기상이변인가? 거센 열대성 비바람이 할퀸 대지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여름이 가고 있다. 8월도 하순에 이르니 아침 바람부터 달라졌다. 여름이 석류를 익혔다. 익고 또 익어 아슬아슬한 길목에서 어느 순간 ‘팍’ 하고 터져버린다. 마치 핏빛 수류탄 같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성큼 높아진 하늘 아래 알알이 박혀 있는 석류알들은 절기가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사라 하겠다. 우리는 오는 가을에 또 기대를 갖고 맞는다. 일본 아이..

(137)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137)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중앙일보 입력 2022.08.18 00:21 업데이트 2022.08.18 01:15 업데이트 정보 더보기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기정진(1798∼1876) 공명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어서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데 없건마는 흥(興) 다하면 갈까 하노라 -노사집(蘆沙集) 지식인은 난세를 어떻게 사나? 노사 기정진(奇正鎭)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 기대승(奇大升)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 수양에 힘썼다. 68세 때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육조소(六條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위정척사의 이론적 ..

(136) 초승달

(136) 초승달 중앙일보 입력 2022.08.11 00:19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초승달 이기선(1953∼) 전어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렸다 칵! 하고 내뱉으니 창문을 뚫고 날아가 저물녘 하늘에 박혔다 구름에 피가 스민다 -한국현대시조대사전 단시조가 다다르고자 하는 세계 미당 서정주 시인은 초승달을 ‘님의 고운 눈썹’으로 보았는데 이기선 시인은 가시로 보았구나. 그것도 목에 걸려 내뱉으니 창문을 뚫고 날아가 하늘에 박혔다니 다누리호보다 빠른 상상력의 힘이로구나. 장마 갠 저물녘 저 하늘이 왜 저리 붉나 했더니 바로 그 가시에 박혀 흘린 피가 스며서였구나. 이기선 시인은 ‘가시’를 소재로 한 시조 한 편을 더 썼다. ‘어매는 입을 가리고 나직이 칵칵 거렸다/ 알뜰히 살을 발라 내 입에 넣어주고..

(135) 안빈(安貧)을 염(厭)치 말아

(135) 안빈(安貧)을 염(厭)치 말아 중앙일보 입력 2022.08.04 00:1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안빈(安貧)을 염(厭)치 말아 김수장(1690~?) 안빈을 염치 말아 일 없으면 긔 좋은 이 벗 없다 한(恨)치 말라 말 없으면 이 좋은 이 아마도 수분안졸(守分安拙)이 긔 옳은가 하노라 - 『해동가요』 주씨본(周氏本) 잘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가난함을 싫어하지 말아라. 근심이 없으면 그것이 좋으니라. 친구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아라. 구설수가 없으면 이것이 좋으니라. 아마도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여 편안히 살다가 죽는 것. 그것이 옳은가 하노라. 조선의 가곡 문화를 대표하는 노래집 『해동가요(海東歌謠)』를 편찬한 이는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이다. 병조에 소속된 서리 출신으로 알려진 그는 ..

(134) 가을비

(134) 가을비 중앙일보 입력 2022.07.28 00:16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가을비 피천득(1910∼2007) 고요히 잠든 강 위 하염없이 듣는 비의 한 방울 두 방울에 벌레 소리 잦아진다 아마도 이 비는 정녕 낙엽의 눈물인가 -신민 금아(琴兒) 문학의 출발은 시조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 영국 낭만파 시인 셸리(1792∼1822)의 ‘서풍부(Ode to the West Wind)’ 마지막 구절이다. 마찬가지로 여름이 오면 가을 또한 멀지 않다. 삼복염천에 가을 시를 읊음은 시적인 피서법이 되지 않을까. 이 시조는 우리나라에서 수필을 문학 장르이게 한 금아 피천득(皮千得) 선생이 열여섯 살 때 쓴 작품이다. 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벌레 소리로 연결되고, 비가 낙엽의 눈물..

(133) 땀은 듣는대로 듣고

(133) 땀은 듣는대로 듣고 중앙일보 입력 2022.07.21 00:16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땀은 듣는대로 듣고 위백규(1727∼1798) 땀은 듣는대로 듣고 볕은 쬘대로 쬔다 청풍의 옷깃 열고 긴 파람 흘리 불 제 어디서 길가는 손님이 아는 듯이 머무는고 -삼족당가첩(三足堂歌帖) 바른 말 바른 글은 쉽지 않다 무더운 여름도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땀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볕은 쬘 대로 쬔다. 맑은 바람에 옷깃을 열고 휘파람을 길게 흘려 불 때, 어디서 길가는 손님이 아는 듯이 멈추는구나. 이 시조는 땡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건강한 노동을 그리고 있다. 위백규(魏伯珪)는 시골에서 일생을 보냈다. 1765년 생원복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자영농업적인 생활로 ..

(133) 땀은 듣는대로 듣고

(133) 땀은 듣는대로 듣고 중앙일보 입력 2022.07.21 00:1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땀은 듣는대로 듣고 위백규(1727∼1798) 땀은 듣는대로 듣고 볕은 쬘대로 쬔다 청풍의 옷깃 열고 긴 파람 흘리 불 제 어디서 길가는 손님이 아는 듯이 머무는고 -삼족당가첩(三足堂歌帖) 바른 말 바른 글은 쉽지 않다 무더운 여름도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땀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볕은 쬘 대로 쬔다. 맑은 바람에 옷깃을 열고 휘파람을 길게 흘려 불 때, 어디서 길가는 손님이 아는 듯이 멈추는구나. 이 시조는 땡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의 건강한 노동을 그리고 있다. 위백규(魏伯珪)는 시골에서 일생을 보냈다. 1765년 생원복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자영농업적인 생활로 들어갔다...

(132) 방하착(放下著)

(132) 방하착(放下著) 중앙일보 입력 2022.07.14 00:18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방하착(放下著) 김정희(1934∼ ) 무 배추 장다리 밭에 옮겨 앉는 흰 나비 무심코 날아오른다 날갯짓도 가볍게 가진 것 아무것도 없이 빈 몸으로 가볍게. -복사꽃 그늘 아래 (고요아침) 놓아야 보인다 방하착은 불교에서 화두로 주로 쓰인다. 집착을 내려놓아라,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온갖 번뇌와 갈등, 스트레스, 원망, 욕심 등이 얽혀 있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던져버리라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때 엄양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와서 물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조주 스님 말씀하시길 “내려놓거라(放下著).” 다시 엄양이 “한 물건도 가지지 않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