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131) 매아미 맵다하고

(131) 매아미 맵다하고 중앙일보 입력 2022.07.07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매아미 맵다하고 이정신(생몰연대 미상) 매아미 맵다하고 쓰르라미 쓰다하네 산채(山菜)를 맵다더냐 박주(薄酒)를 쓰다더냐 우리는 초야(草野)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 『청구영언』 육당본(六堂本) 숨어 사는 즐거움 매미는 맵다고 울고 쓰르라미는 쓰다고 운다. 산나물이 맵다는 거냐? 술이 쓰다는 거냐? 우리는 시골에 묻혀 있으니 맵고 쓴 줄을 모르는데·······. 이 시조는 ‘매미’에서 ‘맵다’는 감각을, ‘쓰르라미’에서 ‘쓰다’는 감각을 가져왔다. 어감을 살린 절묘한 대구(對句)라고 하겠다. 그리고 산채·박주를 연결해 맵고 쓴맛의 의미를 확장했다. 결론은 세상의 시비를 떠난 은둔거사의 안..

(130) 돌

(130) 돌 중앙일보 입력 2022.06.30 00:1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돌 임종찬(1945∼) 산은 그 아픔을 진달래로 피 흘리고 강은 그 노래를 몸 흔들어 보이건만 너와 난 아픔도 노래도 굳어 돌이 되었네 -한국시조큰사전 제자리 찾아야 할 남북 관계 저 산에 진달래가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어 있음은 분명 자신의 아픔을 피 흘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물이 저렇게 물결치며 흐르는 것은 자신의 노래를 보이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너와 나는 아픔도, 노래도 굳어서 돌이 되고 말았다. 한국인에게 잔인한 달 6월이 가고 있다. 휴전 70년이 가까워오건만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서해에서 북한군의 총격에 숨져간 어업지도 공무원 이대준씨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남쪽으로 귀순한..

(129) 눈물이 진주(眞珠)라면

(129) 눈물이 진주(眞珠)라면 중앙일보 입력 2022.06.23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눈물이 진주(眞珠)라면 김삼현(생몰 연대 미상) 눈물이 진주라면 흐르지 않게 싸두었다가 십 년 후 오신 님을 구슬 성(城)에 앉히련만 흔적이 이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가곡원류(歌曲源流) 증보본(增補本) 사랑의 정서는 시대의 차이가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서정시다. 만일 흘리는 나의 눈물이 진주라면 흐르지 않게 싸서 두리. 님 떠나신 후 10년 동안 흘리는 눈물을 모으면 구슬 성이 되지 않겠는가? 그 아름다운 성에 기다리던 고운 님을 모셔 앉히련만 눈물은 흘리면 이내 흔적 없이 말라 버린다. 그것이 오직 서러울 뿐이다. 옛사람의 정서는 이토록 간절하였다. 이 시조를 지은 것으로 전해지..

(128) 편견

(128) 편견 중앙일보 입력 2022.06.16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편견 유안진 (1941∼ ) 오를 수 없는 산(山) 하나쯤은 있어줘야 살맛이지 그 산을 품고 사는 가슴이어야 사랑이지 사랑도 그 산에다가 강(江) 울음 바쳐야 절창(絶唱)이지.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시조로 즐기는 재치 그렇다. 우리 생애에 오를 수 없는 산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그 산을 품고 사는 게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 산에 바치는 강 같은 울음이 절창이 되리. 이같은 절절한 고백을 바치고 시인은 제목을 슬쩍 ‘편견’이라고 붙이며 외면을 한다.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다운 재치라고 하겠다. 유안진(柳岸津) 시인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학과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서..

(127)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127)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중앙일보 입력 2022.06.09 00:1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장검(長劍)을 빼어 들고 남이(1441∼1468) 장검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大明) 천지(天地)에 성진(腥塵)이 잠겨세라 언제나 남북 풍진(風塵)을 헤쳐볼꼬 하노라 -청구영언(靑丘永言) 진본(珍本) 영웅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대 남이(南怡)는 태종의 외손자이자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사위이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6세에 병조판서가 된 천재형 인물이다. 이 시조는 이시애의 난(1467)과 건주의(만주 길림성)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지었다. 환하고 넓은 세상에 전운이 자욱하니 북쪽 여진과 남쪽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고자 하는 기백과 포부를 노래하고 있다. 그가 지은 한시 한 수가 ..

(126) 다시 유월에

(126) 다시 유월에 중앙일보 입력 2022.06.02 01:0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다시 유월에 한춘섭(1941~) 빗장 뼈 아픈 가시 들 찔레도 다시 피어 이토록 아름다운 산하를 지켰는데 기억은 고여야 하리 별빛 자락 여는 여기 소멸은 송진이 되라 단단한 옹이도 되라 푸름이 사무치면 숯이라도 되어지라 재 날려 매운 눈자위 타오르는 그리움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우크라이나에서 보는 72년 전 한국 72년이 지나도 동족상잔의 참혹함을 잊을 길 없는 6·25. 우리는 그 현실을 우크라이나의, 이름도 아름다운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발견하고 전율한다. 러시아가 점령한 마리우폴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덤이라니……. 전쟁이란 이렇듯 참혹한 것이라 북녘에서 들리는 미사일 발사의 굉음이 우리를 선잠에서 깨우고 있다...

(125) 웃을대로 웃어라

(125) 웃을대로 웃어라 중앙일보 입력 2022.05.26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웃을대로 웃어라 효종(1619∼1659)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긔 무엇이 우습관데 만산(滿山) 홍록(紅綠)이 휘두르며 웃는고야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날이리 웃을대로 웃어라 -병와가곡집 전쟁과 시의 응전력 ‘맑은 강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그 무엇이 우습다고/ 산에 가득한 꽃과 풀들이 휘두르면서 웃는구나/ 두어라, 봄바람이 이제 며칠이나 남았으리 웃고 싶은 대로 웃어라.’ 5월을 보내며,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시조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병자국치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淸)에 볼모로 잡혀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당시에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가 청나라에 끌려가는 것은 하늘..

(124) 해발 삼만 구천 피트 2

(124) 해발 삼만 구천 피트 2 중앙일보 입력 2022.05.19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해발 삼만 구천 피트 2 김호길(1943∼) 한 생애 험난한 항로 멀고 먼 각고의 길을 나와 동승한 그대 운명을 같이 지고 만리도 시름에 젖는 어둔 밤의 여로여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31 ‘절정의 꽃’ 조종사 시인이 보는 세상 프랑스에 조종사 작가 생텍쥐페리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조종사 시인 김호길이 있다. 그는 육군항공 파일럿으로 근무하다가 월남전 때는 전투헬기 UH-1D 파일럿으로 참전했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국제선 파일럿으로 보잉 707과 보잉 747 점보기를 조종했다. 대한항공 사직 후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 라파스 근교에 국제영농을 전문으로 하는 현지법인을..

(123) 물 아래 그림자 지니

(123) 물 아래 그림자 지니 중앙일보 입력 2022.05.12 00:1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무명씨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섰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손으로 흰 구름 가리키고 말 아니코 간다 -『청구영언(靑丘永言)』 진본(珍本) 그리운 탈속(脫俗)의 경지 작가를 알 수 없는 이 시조는 문맥을 초월한 즉흥적 직관적 세계와 만나게 한다. 즉 다리 위에 중이 가니까 물 아래 그림자가 지는 게 아니라, 물 아래에 그림자가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 어법이지만 자연을 앞세우고 인간을 뒤로 세운 것이다. 저 스님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어보아도 말 아니하고 손으로 흰 구름을 가리키니 그야말로 탈속의 경지라고 하겠다. ..

(122) 타인능해

(122) 타인능해 중앙일보 입력 2022.05.05 00:14 업데이트 2022.05.05 00:39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타인능해 유응교(1943∼) 고향 집 운조루의 행랑채 들어서면 쌀독에 쓰여 있는 네 글자 타인능해! 누구나 쌀을 가져가 밥을 짓게 했대요 -거북이 삼형제 “누구나 열 수 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에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된 운조루(雲鳥樓)란 고택이 있다.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조선 영조 52년(1776)에 세운 99칸 대규모 저택인데, 이 댁의 행랑채에는 쌀이 세 가마 들어가는 원통형 나무 뒤주가 있다. 아랫부분에 쌀을 꺼내는 마개가 있고 그 위에 ‘누구나 열 수 있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 있다. 운조루 주인이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