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121) 냇가의 해오라비

(121) 냇가의 해오라비 중앙일보 입력 2022.04.28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냇가의 해오라비 신흠(1566∼1628) 냇가의 해오라비 무스일 서 있는다 무심한 저 고기를 여어 무삼 하려는다 두어라 한 물에 있거니 잊어신들 어떠리 -병와가곡집 국회 인사청문회 이대로 괜찮은가? 냇가의 백로는 무슨 일로 서 있는가? 무심한 저 물고기를 엿보아서 무엇을 하려는가? 같은 물에 있는데 잊어버린들 어떠하겠는가? 이 시조는 신흠(申欽)이 광해군 때 대북파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한 후, 자신의 처지와 대북파의 횡포를 자연물에 비유하여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무심한 고기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고, 그 물고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해오라기는 권력을 잡은 대북파를 ..

(120) 내 사랑은

(120) 내 사랑은 중앙일보 입력 2022.04.21 00:16 지면보기지면 정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내 사랑은 박재삼(1933∼1997) 한빛 황토(黃土)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적셔 주리라. - 시집 『뜨거운 달』 1979. 4 사랑 시의 백미(白眉) 박재삼(朴在森)은 ‘울음이 타는 가을강’과 ‘춘향이 마음’ 같은 탁월한 작품들로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시인이다. 64년의 생애를 사는 동안 자유시 수..

(119)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119)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중앙일보 입력 2022.04.14 00:14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김덕령(1567∼1596)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적보다 무서운 내부의 모함 올들어 웬 산불이 이리 잦은가. 봄철 산에 불이 나니 피지도 못한 꽃들이 다 불붙는구나. 저 산에 일어난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라도 있지만, 내 마음 속에 연기도 없는 불이 나니 끌 물조차 없구나. 김덕령(金德齡)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죽은 무인(武人)이 남긴 연시(戀詩)일까. 그러나 이 시조는 매우 절박한 사연을 담고 있다. ..

(118) 공화란추(空華亂墜)

(118) 공화란추(空華亂墜) 중앙일보 입력 2022.04.07 00:16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공화란추(空華亂墜) 한용운(1879∼1944) 따슨빛 등에 지고 유마경(維摩經) 읽노라니 어지럽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어 꽃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민성(1948.10) 만해(萬海)의 님은 ‘조국(祖國)’ 시집 『님의 침묵』 한 권으로 불멸의 시인이 된 만해 한용운(韓龍雲)은 시조와 한시도 많이 썼다. 봄철 낮, 허공에 어지러이 흩날려 떨어지는 화려한 꽃을 보고 지은 이 시조는 승려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유마경』은 대승(大乘)의 깊은 뜻에 대한 유마거사와 문수(文殊)보살 간의 문답을 기록한 불경인데, 자연의 흐름이 문자의 세계 위에 있음을 암시한다. 만해의 ‘님’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한..

(117)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117)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중앙일보 입력 2022.03.31 00:16 유자효 시인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이존오(1341~1371)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 있어 임의(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어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병와가곡집 햇빛을 가리는 구름 구름이 마음이 없다는 말은 아마도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하늘에 높이 떠서 마음대로 다니면서 구태여 밝은 햇빛을 따라가며 덮지 않느냐? 때는 고려 공민왕. 사랑하던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왕은 정사에 뜻을 잃었다. 나랏일을 승려 신돈(辛旽)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진평후(眞平侯)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국정을 좌우하던 신돈을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오히려 왕의..

(116) 어미

어미 조주환(1946~) 집에 불길이 솟고 사람들이 뛰쳐나오자 거꾸로 한 여인이 화염 속을 뛰어들었다. 이 윽 고 아기를 껴안은 숯덩이가 나왔다. -조주환(曺柱煥) 시조전집 희생의 힘이 세상을 지킨다 지난 9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마리우폴의 산부인과를 폭격했을 때 병원으로 이송된 임신부가 골반이 심하게 골절돼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임신부는 의료진의 고심하는 모습에 태아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차라리 나를 지금 당장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결국 수술이 이뤄졌지만 태아는 호흡을 하지 않았다. 산모 역시 수술 도중에 의식을 잃어 30분이 넘는 심폐소생술에도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소개한 작품은 화재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두들 도망쳐 나오는 집에 여인은 거꾸로..

(115) 샛별 지자 종달이 떴다

(115) 샛별 지자 종달이 떴다 중앙일보 입력 2022.03.17 00:14 유자효 시인 샛별 지자 종달이 떴다 이재(1678~1746) 샛별 지자 종달이 떴다 호미 메고 사립나니 긴 수풀 찬 이슬에 베잠방이 다 젖겄다 두어라 시절이 좋을손 옷이 젖다 관계하랴 -병와가곡집 국민이 나랏일에 속 끓이지 않는 세상 농경시대에는 봄이 오면 농사를 준비했다. 샛별이 지고 종달새가 지저귀면 호미 메고 사립문을 나선다. 긴 수풀에 맺혀 있는 이슬에 베로 만든 가랑이가 짧은 홑바지가 다 젖는다. 아, 시절이 좋다면 옷이 젖는 것이 뭐가 불편할까? 이 시조는 조선 영조 36년에 영주군수를 지낸 이재(李在)의 작품으로 전해온다. 농사에 전념하면서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백성의 염원이 간절하다. 나라님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114) 금매화(金梅花)

(114) 금매화(金梅花) 중앙일보 입력 2022.03.10 02:17 유자효 시인 금매화(金梅花) 이광수(1892-1950) 오늘 오는 비는 진달래 떨우는 비 비마저 흙 묻어 송이송이 지는 그를 금매화 뒤이어 피니 더욱 비감하여라. -문예공론(1929.6) 대통령은 역사와 대화하는 사람 『무정』『흙』 등의 장편소설로 한국 현대소설을 개척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시조를 많이 썼다. 이 작품은 봄비에 지는 진달래꽃을 애달프게 바라보는 마음을 읊고 있다. 떨어져 송이송이 흙비에 묻는 진달래가 다 지면 화사한 금매화가 뒤이어 필 것이다. 그것이 더욱 작자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춘원은 1917년 매일신문에 연재한 ‘오도답파여행기(五道踏破旅行記)’를 위시해서 1935년 ‘시조 4수’에 이르기까지 시조를..

(113)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113)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중앙일보 입력 2022.03.03 00:16 유자효 시인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장만(1566~1629) 풍파에 놀란 사공(沙工)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웨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를 하리라 -청구영언(靑丘永言) 공명정대한 경쟁과 관리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놀란 뱃사공이 배를 팔아 말을 샀다. 그랬더니 꼬불꼬불한 산길을 말을 몰고 오르내리는 것이 물길보다 더 어려웠다. 이후론 배도 말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야겠구나. 장만(張晩)이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7년 전쟁을 겪고 형조판서로 있던 1622년(광해군 14년), 집권 대북파(大北派)의 국정 혼란을 상소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직했다. 인조 2년(1..

(112) 조춘(早春)

(112) 조춘(早春) 중앙일보 입력 2022.02.24 00:16 유자효 시인 조춘(早春) 정인보(1893-1950)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손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개 어이 더딘고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타말고 헤쳐본들 어떠리 -신생(1929.4)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가? 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솔빛은 더 푸르게 보이고, 산골에 남은 눈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겨우내 손 못보던 토담집을 고치는 소리도 들리는 시골 풍경이다. 아직 나비의 자취는 보이지 않지만 봄의 기운은 돋으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