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101) 벽상(壁上)에 걸린 칼이

(101) 벽상(壁上)에 걸린 칼이 중앙일보 입력 2021.12.09 00:16 유자효 시인 벽상(壁上)에 걸린 칼이 김진태 (생몰연대 미상) 벽상에 걸린 칼이 보믜가 낫다 말가 공(功)없이 늙어가니 속절없이 만지노라 어즈버 병자(丙子)국치(國恥)를 씻어볼까 하노라 - 청구가요(靑邱歌謠) 평화의 전제 조건은 국방력 벽 위에 걸어둔 칼에 녹(보믜)이 슬었단 말인가. 아무런 공을 쌓은 바 없이 늙어만가니 칼만 속절없이 만진다. 아, 이 칼로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어보고 싶구나.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은 인조가 남한산성에 45일간 청나라 군대에 포위돼 항전하다가 결국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 전후 소현세자를 비롯한 수십만 명이 청에 끌려가 인질과 노..

(100) 강산도 일어서서-통일의 그날이 오면

(100) 강산도 일어서서-통일의 그날이 오면 중앙일보 입력 2021.12.02 00:16 유자효 시인 강산도 일어서서 -통일의 그날이 오면 김월한 (1934~ ) 강산도 일어서서 마주보며 손을 잡고 피맺힌 울음 토해 강강술래 춤을 춘다 바람도 아린 상채길 어루만져 노는 그날. - ‘성남문학’ 2016년 40집 도적처럼 찾아올지 모르는 통일 그렇다. 정녕 ‘그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인은 ‘강산도 일어서서/마주보며 손을 잡고’ ‘바람도/아린 상채길/어루만져’주리라 한다. 한국인이라면 통일을 바라지 않는 이가 누가 있으랴. 그러나 그 통일은 평화적 통일이어야 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통일이 돼야 한다. 핵무기를 계속 개발하고 있는 북한을 보며 그 성사가 점차 요원해져 가는 것을 느낀다. 통..

(99)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99)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중앙일보 입력 2021.11.25 00:21 유자효 시인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정도전 (1342-1398)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흘러들어 반 천 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이야 고국(故國) 흥망을 물어 무삼하리오 - 『청구영언』 홍민본(洪民本) 나라를 세우고 역적이 되다 개성의 선인교 다리 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송악산 기슭 자하동에 흐르니, 500년 고려 역사가 물소리뿐이구나. 아, 옛 나라가 흥하고 망한 것을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조선을 설계한 일등 개국공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남긴 시조다. 그는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재상의 나라’를 꿈꿨다. 현대의 영국식 입헌 군주제를..

(98) 보냈던 가을편지

(98) 보냈던 가을편지 중앙일보 입력 2021.11.18 00:18 유자효 시인 보냈던 가을편지 김준(1938~ ) 혼자서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파트 값이 뛰어 이리저리 옮기느라 보냈던 가을편지가 전해질까 걱정이다. - 시조문학사 간행 『그래도 행복했네』(2021) 도시의 유랑민들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매맷값이 뛰니 전셋값도 뛰고, 월세가 늘어 그나마 전세 구하기도 어렵다. 부동산 문제를 이 정권은 결국 해결하지 못하나 보다. 시인도 뛰는 아파트값에 이리저리 옮겨 다녔나 보다. 혼자서 사모하는 사람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냈던/가을 편지가/전해질까 걱정’한다. 도시의 유랑민의 애달픈 사랑이다. 석우(石牛) 김준(金埈) 시인은 월하(月河) 이태극 선생이 창간..

(97) 10년을 경영하여

(97) 10년을 경영하여 중앙일보 입력 2021.11.11 00:16 유자효 시인 10년을 경영하여 김장생(1548~1631) 10년을 경영하여 초가 한 간(間)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淸風)이요 반 간은 명월(明月)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 병와가곡집 비워야 보인다 조선 선비의 멋과 기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 한 간을 지어냈으니 그 청렴함은 배운 이의 자랑이었다. 초가의 반 간은 맑은 바람으로 채웠고, 나머지 반 간은 밝은 달로 채웠다. 그리고 강산은 집안에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겠다 하니, 강산이 선비의 병풍이 됐다. 지도자들의 이런 청렴 정신과 풍류가 조선 왕조 500년을 이어온 힘이었다. 이 시조를 지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늦은 나이에..

(96) 밤에 본 한반도

(96) 밤에 본 한반도 중앙일보 입력 2021.11.04 00:16 유자효 시인 밤에 본 한반도 -구충회 (1943-) 허리가 잘린 거야 심장도 멎은 거지 한쪽은 대낮인데 또 한쪽은 캄캄하다 어쩌나, 피가 돌지 않아 그 지경 그 꼴인걸 -조은 간행 ‘노을빛 수채화’(2017) 감사하고 지켜야 할 평화와 번영 밤중에 한반도를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남쪽은 환하고 북쪽은 캄캄하다. 그 구분이 아주 선명하다. 실제로 1991년에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재하러 북한에 갔을 때, 평양의 밤은 조용하고 가로등 조명이 어두웠다. 코로나 방역으로 국경을 완전히 걸어 잠근 요즘은 그 어려움이 더하다고 한다. 남북 분단 75년, 어찌하여 이렇게 차이가 벌어졌는가. 그 세월 동안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통치였다...

(95) 벼슬이 귀하다 한들

(95) 벼슬이 귀하다 한들 중앙일보 입력 2021.10.28 00:05 유자효 시인 벼슬이 귀하다 한들 -신정하(1681∼1716) 벼슬이 귀하다 한들 이내 몸에 비길소냐 나귀를 바삐 몰아 고향으로 돌아오니 어디서 급한 비 한줄기에 출진(出塵) 행장(行裝) 씻기고 -병와가곡집 벼슬길은 벼랑길이다 그렇다. 아무리 벼슬이 귀하다 한들 내 몸에 비길 수 있겠는가? 서둘러 환로(宦路)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니 때마침 내린 소나기 한줄기에 내 행장의 먼지가 다 씻기는구나. 신정하(申靖夏)는 숙종 때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신완(申琓)이며, 어머니는 황해도 관찰사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다. 1715년, 조선의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사간원의 간관(諫官)을 할 때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에 대한 소송사건이 있..

(94) 고백하노니

(94) 고백하노니 중앙일보 입력 2021.10.21 00:16 유자효 시인 고백하노니 -성춘복 (1936-) 너와 나 나뉘어서 멀리를 바라본들 다음의 둘보다야 더 잘게 쪼개어져 우리 둘 지쳐간 이승 강물로 합치려나. -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시인의 따뜻한 우정 이야기 부부란 한 곳을 바라보고 함께 가는 사람이다. 이 동행은 이승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강물로 합쳐질 운명의 동행이 부부라고 하겠다. 성춘복 시인은 1959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이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며 문단의 중심을 지켜온 분이다. 1971년 천상병 시인이 실종됐을 때, 선생은 동료 문인들과 함께 『새』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천 시인이 부디 살아 있기를 바라는 기원의 시집이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어 ..

(93) 말로써 말이 많으니

(93) 말로써 말이 많으니 중앙일보 입력 2021.10.14 00:16 유자효 시인 말로써 말이 많으니 -무명씨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 청구영언(靑丘永言) 진본(珍本) “민주주의란 나무는 말을 먹고 자란다” 옛시조에는 삶의 지혜가 되는 노래가 많이 있다. 이 작품도 널리 불렸으나 안타깝게도 작자를 모른다. 어쩌면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구전되며 시조로 정착됐을 수도 있다. 인간 세상의 시비는 대체로 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자신의 허물은 잘 보이지 않고 남의 허물은 크게 보인다. 또 듣지 않는다고 남의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그러나 내가 남의 말을 하면 그 말이 ..

(92) 늦저녁

(92) 늦저녁 중앙일보 입력 2021.10.07 00:23 유자효 시인 늦저녁 -정수자(1957∼) 저기 혼자 밥 먹는 이 등에서 문득 주르르륵 모래 흘러내려 어둠 먹먹해져 지나던 소슬한 바람 귀 젖는다 명사(鳴沙)······ -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우리는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늦저녁에 인사동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 많던 외국인이며 노점 상인을 찾을 길 없다. 철시(撤市)였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계에 이르고 있다. 혼자 밥 먹는 이의 쓸쓸한 모습. 등에서 문득 주르르륵 모래가 흐른다. 먹먹한 어둠. 소슬한 바람에 귀가 젖으니 모래 울음 탓이다. 코로나19 이전에, 삶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영업자들. 마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현실에서 보는 듯 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견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