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91) 절의가(絶義歌)

(91) 절의가(絶義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절의가(絶義歌) 유응부 (?∼1456) 간밤에 부던 바람 눈 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 병와가곡집 비상식이 판치는 세상 수양대군이 정인지·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김종서·황보인을 비롯한 중신을 학살하고 단종을 폐위시켰다. 키가 크고 얼굴이 엄숙했으며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의 사랑을 받았던 무신 유응부(兪應孚)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보고 읊은 시조다. 간밤에 불던 바람에 눈 서리가 몰아쳐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져 가는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엇하겠느냐는 비분강개의 시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인 종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90) 애기메꽃

(90) 애기메꽃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애기메꽃 홍성란(1958∼) 한때 세상은 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 날 위해 돌돌 감아오르는 줄 알았지 들길에 쪼그려 앉은 분홍 치마 계집애 -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없다 참으로 예쁜 시조다. 들길에 애기메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마치 분홍 치마를 입은 채 쪼그려 앉은 작은 계집애 같다. 세상이 자기를 위해 도는 줄 알았던, 줄기도 자기를 위해 돌돌 감아오르는 줄 알았던……. 그것은 어쩌면 시인의 자화상이며, 우리 모두가 유년의 한때 가졌던 자기애의 세계와도 같다. 아기메꽃은 잎이 삼각형이고 꽃이 작으며 앙증맞다. 6월에서 8월에 연한 붉은 꽃이 피는 쌍떡잎 식물 통화식물목 메꽃과의 덩굴성 여러해살이풀이다. 이뇨를 돕고 고혈압과 월경불순에 효험이 있어..

(89) 국화야 너는 어이

(89) 국화야 너는 어이 중앙일보 입력 2021.09.16 00:18 유자효 시인 국화야 너는 어이 이정보(1693∼1766)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 병와가곡집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추석 매화 난초 대와 함께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인 국화의 절개를 노래하고 있다. 국화는 많은 꽃이 피어나는 봄철을 다 보내고 나뭇잎 지고 하늘은 찬 계절에 홀로 피어난다. 아마도 차가운 서리에도 굴하지 않는 높은 절개는 너뿐인가 한다. 이 시조를 지은 이정보(李鼎輔)는 조선 후기 문신이다.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년 중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 추석을 앞둔 요즈음이 아닐까 한다. 농경시대에는 첫 수확을 조상..

(88) 명상(冥想)의 시(詩)

(88) 명상(冥想)의 시(詩)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명상(冥想)의 시(詩) 정공량 (1955~) 그때 총성처럼 햇살이 내려앉는 지치도록 시린 광휘 숲으로 둘린 정적 먼 가을 적멸의 산책 탑을 쌓는 순간에 -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65 ‘꿈의 순례’ 자력자강의 소중함 가을은 명상의 계절이다. 가을을 소재로 한 명시가 많다. 또한 많은 명시는 가을에 태어났다. 정공량 시인의 가을은 따가운 햇살이 총성처럼 내려앉는다. 그 빛이 얼마나 눈 부시면 지치도록 시릴까? 적멸의 먼 가을 숲에 소망의 탑을 쌓는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계절이 아름다운 만큼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이 더욱 슬프다. 아프가니스탄의 참상과 우연히도 때맞춰 개봉된 영화 ‘모가디슈’가 코로나의 와중에도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 흥..

(87) 까마귀 검다하고

(87) 까마귀 검다하고 중앙일보 입력 2021.09.02 00:18 유자효 시인 까마귀 검다하고 무명씨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白鷺)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병와가곡집 위선을 비웃는 풍자 까마귀가 검다고 해오라기더러 웃지 말아라 한다. 겉이 검다고 속조차 검으리라고 속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겉이 흰 해오라기가 속은 검을 수도 있다는 풍자 시조다. 이 시조는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자인 이직(李稷)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그는 1392년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는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이 되고, 1422년 세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 고려 공양왕 때 예문제학까지 지내고, 나..

(86) 가을연가

(86) 가을연가 중앙일보 입력 2021.08.26 00:18 유자효 시인 가을연가 허형만(1946∼) 오늘도 세상의 숲속은 달빛 한 두름 고요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먼 별까지, 눈물겨운 사랑이여 세상의 깊은 그리움 흘러 흘러 적막입니다.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우주는 대답이 없다 가을이 온다. 여름이 매미 울음소리처럼 들끓었다면, 가을의 소리는 달빛 고요다. 가을은 사랑을 생각하는 계절이다. 그것도 지상에서 가장 먼 별까지 이르는 눈물겨운 사랑이다. 가을의 소리는 적막이다. 세상의 깊은 그리움,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이 와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위세는 그칠 줄을 모르고,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수도 카불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된 공항, 아이만이라도 탈출시키려는 ..

(85) 까마귀 싸우는 골에중앙일보

(85) 까마귀 싸우는 골에 중앙일보 입력 2021.08.19 00:18 유자효 시인 까마귀 싸우는 골에 무명씨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우나니 청강(淸江)에 조히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 가곡원류 왜 흙탕물을 뒤집어 쓰려 할까? 해오라기더러 까마귀가 싸우는 골에 가지 말아라 한다. 성낸 까마귀가 사나운 빛을 드러내면 깨끗한 강물에 고이 씻은 몸이 더럽혀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경북 영천에 가면 이 시조가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지은 것이라 해서 포은의 ‘단심가’, 노계 박인로의 ‘조홍시가’와 함께 영천을 대표하는 시가로 꼽고 있다. 포은이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려 하자 팔순 노모가 간밤에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이 시조를 불러 아들을 만류했다는 얘기가 전..

(84) 무지개

(84) 무지개 중앙일보 입력 2021.08.12 00:20 유자효 시인 무지개 서벌 (1939∼2005) 지극히 조심스레 마음씨 가꾸신 분. 그분, 방금 막 세상 버렸나 봐. 하늘님 당신만 아시고는 색동무덤 써 주신다. -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26 하늘님은 아신다 유난히 무더운 올여름, 아열대성 소나기가 지상을 때리고 가자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저렇게 고운 무지개가 뜨다니, 아마도 어딘가에서 ‘지극히 조심스레/마음씨/가꾸신 분’이 ‘막/세상/버렸나’보다. 그러니 하늘님께서 ‘당신만 아시고는/색동무덤 써 주’시는 게지. 사람은 속여도 하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다 알고 계시니···. 발상이 동화적이고 아름답다. 이 시조를 쓴 서벌 시인은 1965년 공보부 공모 제4회 신인예술상 문학부 시조 ..

(83) 까마귀 눈비 맞아

(83) 까마귀 눈비 맞아 중앙일보 입력 2021.08.05 00:18 유자효 시인 까마귀 눈비 맞아 박팽년 (1417∼1456)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병와가곡집 사육신의 유일한 후손 검은 까마귀가 눈비를 맞으니 희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검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밤이라 하더라도 달빛은 밝다. 그와 마찬가지로 임을 향한 나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변치 않는다.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이 남긴 시조다.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버지 박중림(朴仲林)과 형제 인년(引年), 기년(耆年), 대년(大年), 영년(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아들 헌(憲)과 순(詢)도 죽임을 당하..

(82)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82)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중앙일보 입력 2021.07.29 00:18 업데이트 2021.07.29 01:13 유자효 시인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이지엽 (1958~) 마른 땅 위에 한나절 비가 내리고 트랙터 지나간 뒤 깊게 패인 자국들! 세상의 모오든 길들은 상처가 남긴 살점이다 -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62 아름다움의 뒤에는 고통이 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상처를 남기는가? 가뭄 끝의 단비가 지나간 뒤 트랙터 지나간 자국이 깊게 남았다. 상처가 남긴 살점. 그 길을 우리가 간다.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팀이 계속 승전보를 전해오고 있다.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이 된 것은 그해 가장 잘 쏜 선수를 뽑는 엄격한 선수 선발이 그 비결이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렵다는 한국 양궁 대표선수가 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