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한조각 13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61] 비누, 모던 라이프의 상징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65년 도쿠가와 막부는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 요코스카(橫須賀) 조선소 건설에 착수한다. 공사 현장에 자재를 공급하던 쓰쓰미 이소에몬(堤磯右衛門)은 프랑스인들이 더러워진 손을 어떤 물체에 비벼 씻자 순식간에 기름때가 빠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물체의 정체는 비누였다. 비누의 놀라운 기능성과 상품성에 주목한 쓰쓰미는 직접 비누를 제조하여 사업화하기로 결심한다. 프랑스인에게서 대략적인 성분은 파악했지만, 유지(油脂)와 양잿물 배합, 글리세린 제거 등 세부 공정을 설계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과정이었다. 큰 빚을 지며 실험을 거듭한 끝에 1873년 대망(待望)의 비누 제조에 성공한 쓰쓰미는 요코하마에 공장을 차리고 생산에 돌입한다. 비누 보급은 일대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60] 서민의 저력과 위정자의 책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같은 말이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그 의미가 미묘하게 다른 말들이 꽤 된다. 이를테면 '서민(庶民)'이 그렇다. 서민은 옛날 중국에서 작위나 관직이 없는 장삼이사를 칭하던 말이다. 한자 '庶'는 숫자가 많거나 널리 퍼져 있다는 뜻으로, 이것저것 하는 업무를 서무(庶務), 널리 바꾸는 개혁을 서정(庶政) 개혁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서민은 '경제적으로 곤궁한 계층'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반면, 일본에서는 경제적 곤궁보다는 '특별한 신분이나 높은 지위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라는 의미에 방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서민의 눈물' '서민의 애환' 등의 관용구가 흔히 쓰이지만, 일본에서는 '서민 문화' '서민 감각' 등의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서민 문화는 가난한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9] 일본 '위생'의 탄생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에도 말기 일본에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 일쑤였다. 공포의 괴질 앞에서 재래 지식은 무용지물이었다.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한 의사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1838 ~1902)는 1871년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歐美) 일대를 시찰한다. 방문지 의료기관에서 나가요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hygiene'이라는 단어였다. '바른 의료 지식으로 시민의 생명과 생활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접한 그는 이 생소한 단어가 일본의 근대화가 지향해야 할 바를 상징하는 키워드임을 직감한다. 1874년 문부성 의무국장에 취임한 나가요는 'hygiene' 개념의 일본 도입에 골몰한다. 그는 전통 의학에서 사용하는 양생(養生) 대신..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8] 일본 근대화의 원점이 된 종두법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인류의 적 천연두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청정 지대에 유입된 천연두는 끔찍한 치사율과 후유증으로 일본인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일본의 전통 의학으로는 천연두를 치료할 수 없었고, 천연두는 포창신(疱瘡神)이 들러붙은 것으로 여겨져 붉은 천을 내걸고 귀신이 물러가도록 비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유럽은 1798년 제너의 우두법 개발로 천연두를 퇴치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고, 이러한 서양 사정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1774년 서양 해부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 발간 이후 일본 의사들은 서양 의학 수준에 큰 충격을 받고 있던 터였다.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던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는 소..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7] '지피지기'로 위협에 맞선 일본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세기 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라시아 동안(東岸)에 다다른 러시아는 오호츠크해(海)를 남하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맞닥뜨린다. 두 세력의 접촉은 순탄치 않았다. 1804년 통상 요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북태평양 방면 개척단장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일본의 거듭되는 통상 거절에 격분하여 무력 위협 개항을 꾀한다. 1806년 레자노프 휘하의 군함이 사할린 소재 마쓰마에(松前)번 거류지를 습격하는 '로고(露寇)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감이 고조된다. 러·일 간 악연의 시작이었다. 1811년 쿠릴 열도 측량 임무를 수행 중이던 러시아 군함 디아나호의 바실리 골로프닌 함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구나시리섬(國後島)에서 일본 측에 의해 억류되는 사건이..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6] 19세기 말 일본의 정상급 海圖 비결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58년 일본과 수교한 영국은 도쿠가와 막부에 일본 연해 측량 허가를 요청한다. 항행 안전을 위한 근대 해도(海圖·nautical chart)를 구비하지 못한 막부는 고심 끝에 막부 관리의 동승을 조건으로 측량을 허가한다. 조수 간만, 수심 등을 측정해야 하는 해도 제작은 고도의 측량 기술을 요한다. 1861년 영국의 측량에 입회한 막부의 관리들은 해양 시대를 맞아 해도 제작 능력 확보가 국가적 과제임을 깨닫는다. 막부에 이은 메이지 신정부는 해도 제작에 더욱 의욕적이었다. 1870년 영국이 남해안 측량 허가를 요청하자 메이지 정부는 일본 측량선의 동행을 제안한다. 명목은 공동 측량이었으나 사실상 영국에 기술을 이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해양 패권국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5] 1912년에 남극대륙 상륙한 일본인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02년 영국의 로버트 스콧이 남극대륙 서안에 도착하자 인류의 남극점 도달 경쟁이 본격화된다.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스콧과 벌인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1911년 12월 19일 남극점을 밟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었다. 아문센 일행 귀환을 위해 고래만(灣) 근해에서 대기하던 '프람(Fram)'호는 뜻밖에 배 한 척과 조우한다. 일본 남극 탐험선 '가이난마루(開南丸)'였다. 탐험대 리더 격인 시라세 노부(白瀨矗·1861~1946)는 어릴 적 난(蘭)학자 스승에게 전해들은 유럽의 탐험가 스토리에 매료되어 평생 극지(極地) 탐험을 꿈꾸며 극기(克己)를 연마한 별난 인물이었다. 군에 입대하여 항해, 측량, 오지(奧地) 생존술 등을 몸에 익힌 시라세는 19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4] 해외무역 개척한 어용상인의 변신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모리무라 이치타로(森村市太郞·1839 ~1919)는 일본의 근대 무역을 개척한 기업가다. 1858년 일본은 구미 5국과 '안세이(安政) 조약'이란 불평등조약을 체결한다. 개항과 함께 서구 물산이 침투하면서 국내 산업이 피폐해지고 금·은이 유출됐지만 일본은 속수무책이었다. 개항장에서 벌어지는 국부 유출 실태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모리무라는 훗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교우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특히 감명받은 것은 무역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본래 무구상(武具商)의 장손인 그는 서양식 기병용 마구(馬具)를 메이지 정부에 납품하며 가업을 잇고 있었다. 사업은 번창했으나 끊임없는 관(官)의 뇌물 요구와 변덕에 진저리가 난 그는 어용..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3] 日 근대화 이끈 유학자의 열린 사고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1832~ 1891)는 메이지 시대의 계몽 사상가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난 그는 31세에 막부의 유학 교육을 관장하는 자리에 오른 일류 유학자였다. 그의 배움이 무르익을 무렵 막부는 서구의 개항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의 진로를 고심하던 그는 1866년 막부에 청원해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1868년 귀국 후 서구 문명의 실체를 소개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첫 번째 결실이 1871년 영국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의 'Self help'를 번역한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의 출간이었다. '자조(自助)론'으로도 알려진 이 책에서 그가 소개한 영국의 미덕(美德)은 모든 인민이 신분..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2] 100년 전 일본의 바이오 벤처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미국의 장년(長年) 세대는 어릴 적 속이 더부룩하거나 체했을 때 복용하던 '다카-디아스타아제(Taka-Diastase)'라는 소화제를 기억한다. 미국의 가정상비약으로 통하던 이 약의 개발자는 다카미네 조키치(高峰讓吉·1854~ 1922)라는 일본인이다. 디아스타아제라는 소화효소 이름 앞에 붙은 '다카'는 그의 성(姓)에서 따온 것이다. 의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서양 학문을 공부한 다카미네는 1880년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 유학하여 서양의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를 체험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귀국 후에는 관료로 일하면서 일본 특허제도를 정비하여 과학기술 입국의 초석을 다지는 한편, 본업인 연구에도 매진하여 1887년 영국에서 고지(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