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한조각 13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1] 겐신·요안이 뿌린 日 노벨상 씨앗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우타가와 겐신(宇田川玄眞·1770~ 1835)은 에도시대 후기 네덜란드로부터 전수된 난방(蘭方)의학을 집대성한 난학의 대가이다. 그는 서양 해부학서를 번역하면서 기존에는 없던 췌(膵·pancreas), 선(腺·gland) 등의 한자를 새로이 조자(造字)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겐신의 양자(養子) 요안(榕菴)은 부친 이상으로 난학에 능통했다. 요안이 1837년부터 10년에 걸쳐 저술한 '세이미카이소우(舍密開宗)'는 일본 최초로 서양 근대화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저작이다. '舍密(세이미)'는 네덜란드어로 화학을 의미하는 '셰미(chemie)'를 음차(音借)한 번역어이다. 기존 지식 체계에 존재하지 않던 신학문의 개념을 소개하는 것은 단순 번역을 넘어 창조 활..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50] 孫文과 미야자키 도텐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1871~ 1922)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사상가이다. 그는 신분 사회를 타파하고 농지를 경작자에게 분배함으로써 인민의 자유와 생존권을 보장하는 '농본적 민본 사회'를 꿈꿨다. 도텐의 사상은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혁명의 의미와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아시아주의로 확장된다. 특히 중국 인민들이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동아시아 민본 혁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상하이·홍콩·톈진 등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손문·강유위·장개석·김옥균 등 개혁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을 위한 민족 간 연대 추구에 생을 바친다. 도텐의 꿈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열매를 맺는다. 도텐..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9] 군국주의와 공산주의의 합작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41년 10월 전직 아사히신문 기자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實)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가 자문을 구하는 정책 보좌 그룹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타 공인 중국 전문가로 내각 촉탁직을 맡아 정부의 대외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던 오자키 검거 소식에 고노에 총리는 아연실색한다. 오자키는 상하이 특파원 시절 소련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포섭된 이후 언론인 신분을 이용해 정·관계 고위 인사에 접근하며 비밀리에 조르게의 첩보 활동에 협력해 왔다. 아내도 그의 정체를 모를 정도였다. 그는 체포된 후 혐의를 인정했고, 1944년 11월 외환(外患)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오자키가 골수 공산주의자임에도 내각 자문역에 위촉될 정도로 의심..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8] 미·일·중, "영원한 敵은 없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중국의 국공합작 사정이 급변한다. 국민당과 공산당 지도부는 겉으로는 협상에 임했으나 양측 모두 상대와의 평화적 공존이 비현실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소소한 충돌이 끊이지 않던 1946년 초여름 국민당군이 전면 공세에 나서자 중국 대륙은 다시 한 번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양측 간에 격심한 전력 차이를 보인 것은 제공권이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항공기 수백 대를 운용하는 국민당군에 비해 공산당군의 항공 전력은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이때 공산당 지도부가 다급하게 손을 벌린 대상은 구(舊)일본군이었다. 공산당 중앙동북국 서기 펑전(彭眞)은 포로로 억류 중인 관동군 제2항공군 항공대대장 하야시 야이치로(林彌一郞)..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7] 인천상륙작전에 쓰인 일본의 지도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50년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제2참모부(G2) 산하에는 캐논기관, 카베기관, 핫토리기관, 야마자키기관 등으로 불리는 정보 협력 소조(小組)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소조들은 GHQ가 일본 점령 및 재건 정책에 긴요하다고 판단한 구일본군 관계자들을 활용하며 운영하는 비밀 조직이었다. 이 중 야마자키기관은 구일본군이 보유한 중국 인민해방군 및 주만(駐滿) 소련군 정보를 영역(英譯)하거나, 그곳에서 귀국하는 일본 잔류민으로부터 현지 동향을 탐문하여 업데이트하는 군사 정보기관이었다. 야마자키기관이라는 이름은 구참모본부 중국반장 출신 팀장인 야마자키(山崎) 중좌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전직 정보장교 그룹 외에 제도(製圖)반, 통역반 등 전문가가 투입..

[신상목의스시 한 조각] [46] 이에야스의 인내심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오다 노부나가의 급사(急死) 이후 권력을 거머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세를 몰아 일본 통일에 박차를 가한다. 능수능란하게 세력을 불리며 서일본과 규슈를 접수한 히데요시는 1590년 봄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 관동(關東)의 강자 호조(北條) 가문 복속에 나선다. 호조 가문은 본거지인 오다와라(小田原)성에서 농성(籠城)했으나 집요한 봉쇄를 견디지 못하고 그해 여름 성문을 열고 만다. 소위 '오다와라 정벌'이라고 하는 이때의 전투로 히데요시는 사실상 일본의 패자(覇者)가 된다. 관동을 접수한 히데요시는 같은 진영으로 참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도로 영지를 옮길 것을 넌지시 제안한다. 드넓은 관동의 지배권을 주겠다는 명분이었으나 내막은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4] 戰後 일본을 다룬 중국의 전략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945년 8월 15일 장제스(蔣介石)는 수도 충칭(重慶)에서 대일(對日) 항전 승리를 선언하는 연설을 한다. 그는 연설 말미에 일본의 침략으로 2000만 명이 희생되어 복수심에 치를 떠는 국민에게 뜻밖의 당부를 전한다. 중국은 일본 군벌을 적으로 삼았을 뿐 인민을 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일본인에게 노예적 굴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중국 국민을 설득한 것이다. 나아가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며, 폭력으로 폭력을 보복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때의 관대한 전후 처리 방침은 훗날 '이덕보원(以德報怨·덕으로 원수를 갚음)' 연설로 널리 알려진다. 1949년 대륙을 장악한 중..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3] 일본의 우치벤케이 외교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일본말에 '우치벤케이(內弁慶)'라는 말이 있다.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 인물인 '무사시보 벤케이(武藏坊弁慶)'는 일본인들에게 용맹함의 대명사로 통한다. 벤케이는 모친의 배 속에서 18개월이나 있다가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 이미 2~3세 아이와 같은 머리털과 치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부친이 괴물로 여겨 죽이려 한 것을 숙모가 거두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벤케이는 훗날 괴력을 지닌 격투의 달인으로 성장하였고, 미나모토(源) 가문의 실력자 요시쓰네(義經)의 충복(忠僕)이 되어 미나모토의 정적(政敵) 다이라(平) 가문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친다. 벤케이는 출생보다 죽음이 더 유명한 인물이다. 벤케이의 주군인 요시쓰네는 이복형 요리토모(頼朝)와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2] 韓·日 도자기 역사가 남긴 교훈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7세기 중반 이삼평을 시조로 하는 조선 뿌리의 일본 도자기 유파인 '아리타야키'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중국 경덕진(景德鎭)에서 유행하던 오채(五彩)자기를 모방한 '가키에몬' 양식 등 화려한 채색 자기가 생산되면서 조선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타에서 첨단 채색 자기가 생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 무역항 나가사키의 존재가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중국의 강남(江南) 상인들이 드나들었고, 이들에 의해 최신 도자기 샘플, 기술, 재료가 일본으로 직통으로 유입되었다. 아리타야키는 조선·중국을 아우르는 국제적 벤치마킹의 산물이다. 때마침 명·청 교체기를 맞아 동중국해 일대에서 복명(復明) 운동을 벌이던 정성공(鄭成功) 일파..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1] 혁신이 거부된 조선 도자기의 운명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임진왜란은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린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전쟁 와중에 조선 도공을 확보한 것이 그만큼 일본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자기(磁器) 생산기술이 없었다. 그때까지 자기를 생산한 나라는 중국, 조선, 베트남 3국뿐이었다. 전쟁 통에 일본에 오게 된 도래(渡來) 도공들이 일본 도자기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삼평(李參平)이 1610년대부터 사가(佐賀)번의 아리타(有田)에서 자기를 굽기 시작하자 일본은 단숨에 도자기 선진국으로 도약한다. 아리타의 도요(陶窯)에서는 청화자기가 생산되었다. 조선의 원천 기술로 고스(吳須)라는 청색 안료(顔料)를 수입해 중국풍의 문양을 넣은 다문화 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