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한조각 13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40] 일본에서 꽃핀 조선 도자기의 비결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경남 사천(泗川) 출신의 김존해(金尊楷)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건너)간 도공이다. 규슈의 유력 다이묘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에게 스카우트된 존해는 부젠(豊前·후쿠오카현)에 자리를 잡고 도자기를 굽기 시작한다. 존해가 가마터를 잡은 곳의 지명을 딴 '아가노야키(上野燒)'는 지금도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명성이 드높다. 호소카와는 '리큐칠철(利休七哲·센노 리큐에게서 다도를 익힌 수제자 7명)'의 한 명으로 불리던 다도 명인이었다. 존해가 빚어내는 질소(質素)한 도자기에 흠뻑 빠진 호소카와는 히고(肥後·구마모토현)로 영지를 옮길 때에도 존해를 가신단으로 동반할 정도로 그의 기예(技藝)를 아꼈다. 존해는 특이하게 일본에 두 번 간 사람이다.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9] 화친에 이르는 길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고다이로(五大老)의 좌장으로 국정 주도권을 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곧바로 전후 처리 외교에 나선다. 조선 강화(講和)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쓰시마의 소(宗)씨였다. 국교가 재개된 1607년까지 총 23회에 걸쳐 소씨의 사절이 조선을 찾았을 정도로 소씨는 필사적이었다. 전란 직후 교섭은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명군은 일본군 철군 후에도 2년여를 더 조선에 머무르면서 조선군과 연합군 체제를 유지한 채 일본의 재침(再侵)을 경계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쇼군에 올라 일본 권부에서 히데요시의 잔영이 제거되자 조선도 변화를 모색한다. 1604년 여름 사명당 유정(惟政) 일행이 최초로 일본을 방문한다. 적의 동태를 살핀..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8] 조선을 구한 明의 화약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임진왜란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최초의 본격 화기전(火器戰)이었다. 개전 초기 일본의 '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조선은 종국에는 '포'로 외침(外侵)을 견뎌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압승할 수 있었던 것도 적을 능가하는 조선 수군의 함포 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기전은 화약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화약 없는 화기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한반도에 화약 제조 기술이 도입된 14세기 말 이후 조선은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화약 기술 보유국이었다. 그러나 기술이 있다 하여 뜻대로 화약을 제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약 제조를 위해서는 '초석(硝石)'이 필수이다. 염초(焰硝)라 불리던 초석은 복잡한 화학 공정을 거쳐야만 생산할 수 있다. 조선은 제조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7] 류큐와 조선의 운명 가른 동맹 외교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임진왜란은 1598년에 종료되었지만 일본의 동아시아 질서 흔들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609년 3월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은 오래전부터 벼르던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원정에 나선다. 전쟁은 한 달 만에 시마즈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류큐의 상령(尙寧)왕은 일본으로 송환되어 시마즈가와 도쿠가와 막부에게 신종(臣從)을 서약해야만 했다. 이후 류큐의 입지는 불우한 것이었다. 시마즈가는 류큐를 부용국(附庸國) 취급하며 조공을 강제했다. 다만 류큐의 중국 조공국 지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른바 이중조공국화(化)였다. 류큐는 시마즈가 진공(進貢) 외에도 막부에 사절을 보내 군신의 예를 표해야 했으니 사실상 삼중조공국 신세였다. 류큐는 신주단지처럼 믿던 종..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6] 기다려도 오지 않던 明軍의 속사정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조선의 황윤길, 김성일 통신사 일행이 전쟁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일본을 찾은 1590년. 일본의 침략이 걱정된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명(明)의 또 다른 책봉국인 류큐의 상녕왕(尙寧王)에게도 명을 정복할 것이니 군사와 식량을 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류큐는 히데요시의 강요에 못 이겨 1589년 사절을 보낸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속(臣屬) 취급을 당하던 터였다. 놀란 류큐 왕부(王府)는 이듬해 3월 조공사 편에 히데요시의 망동(妄動)을 상국(上國)에 고한다. 류큐의 보고에는 히데요시가 200만의 군사를 일으켜 명을 칠 것임을 호언하고 있다는 사정과 함께 엉뚱하게도 조선이 일본의 길 안내를 맡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은 뜻밖의 소식에..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5] 임진왜란 전야의 역사적 교훈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590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엇갈리는 보고를 한다. 외침(外侵)을 경계한 황윤길은 옳았고 일본의 허세로 치부한 김성일은 틀렸는가?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한 과정이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을 복속시키겠다는 '당국평정(唐國平定)'을 호언하고 있었다. 류큐와 조선을 먼저 입조(入朝)시키고 저항하면 칠 것이라는 소문이 규슈 일대에 쫙 퍼져 있었다. 소문은 사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귀를 의심케 하는 이 불온한 소문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때 중요한 존재가 쓰시마의 소(宗)씨였다. 그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변경(邊境)인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4] 일본 총리의 3·1절 축전을 꿈꾸며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전후(戰後) 일본 총리를 역임한 언론인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은 1919년 5월 15일 자 동양경제신보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싣는다. "어느 민족인들 타민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 조선 민족은 고유한 언어와 오랜 독립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독립을 회복할 때까지 일본 통치에 계속 저항할 것이며 지식과 자각의 증진에 비례하여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5월 20일 자 요미우리신문에는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기고문을 남긴다. "물질도 영혼도 그들의 자유, 독립을 강탈하였다. 조선인들이여, 일본인들이 그대들을 모욕하고 고통스럽게 하여도 그들 가운데 이와 같은 일문(一文)을 남긴 자가 있음을 알아주오. 일본이 정..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3] 유격대와 선거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유격(遊擊)'이라는 말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빨치산은 '항일유격대'로 알려져 있고, 고된 군사 훈련의 대명사인 '유격 훈련'도 있다. 본래 중국의 무관직 명칭이었던 유격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일본의 영향이다. 1863년 조슈(長州)번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가 신분제를 깨고 평민이 참가하는 기병대(奇兵隊)를 창설하자, 이에 고무되어 우후죽순처럼 조직된 의용대를 조슈번 제대(諸隊)라고 한다. 이 중 활약이 컸던 기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의 부대가 유격대를 자칭하였고, 이후 막부군 및 신정부군도 유격대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때의 유격대는 기존 정규군 편제에서 벗어나는 별동부대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야구의 short-s..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2] '私情' 버린 '일본 경찰의 아버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1834~ 79)는 '일본 경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1864년 정국 주도권 탈환을 위해 조슈번이 교토를 습격한 '금문(禁門)의 난' 당시 사쓰마번의 말단 무사였던 그는 적장 기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를 저격하는 공훈을 세운다. 이때 가와지를 눈여겨본 인물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사이고에게 발탁된 가와지는 보신(戊辰)전쟁, 아이즈(會津)전쟁 등에서 잇달아 전공을 세우며 번의 요직에 중용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사이고의 후광으로 신정부 고위직에 진출한다. 1871년 사법성(司法省) 시찰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한 가와지는 경찰이 근대 사법의 기초임을 깨닫고 귀국 후 경찰제도 도입에 헌신한다. 1874년 경..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2] '私情' 버린 '일본 경찰의 아버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1834~ 79)는 '일본 경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1864년 정국 주도권 탈환을 위해 조슈번이 교토를 습격한 '금문(禁門)의 난' 당시 사쓰마번의 말단 무사였던 그는 적장 기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를 저격하는 공훈을 세운다. 이때 가와지를 눈여겨본 인물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사이고에게 발탁된 가와지는 보신(戊辰)전쟁, 아이즈(會津)전쟁 등에서 잇달아 전공을 세우며 번의 요직에 중용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사이고의 후광으로 신정부 고위직에 진출한다. 1871년 사법성(司法省) 시찰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한 가와지는 경찰이 근대 사법의 기초임을 깨닫고 귀국 후 경찰제도 도입에 헌신한다. 1874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