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한조각 13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1] 하나오카의 세계 최초 전신마취 수술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04년 병색이 완연한 초로의 여인이 와카야마(和歌山)현에 있는 의사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靑洲)를 찾는다. 여인은 젖가슴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의사마다 고개를 젓더라는 절망을 호소하는 여인을 진찰한 하나오카는 여인의 병이 유방암임을 알아차린다. 당시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하나오카가 죽을 수도 있는 어려운 치료임을 알리지만, 여인은 치료를 간청한다. 여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치료란 유방을 절제하여 암을 도려내고 상처를 봉합하는 외과수술이었다. 워낙 말기 상태라 여인은 4개월 후 사망했으나 수술 자체는 성공이었다. 사실 이 수술은 의학사(史)에 남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이기 때문이다. 1846년 하버드대의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0] 敵國 영국에 유학간 15명의 日 소년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65년 3월, 사쓰마번의 작은 포구 하시마(羽島)에서 15명의 앳된 소년들이 증기선에 오른다. 번주의 명으로 비밀리에 영국 유학을 떠나는 소년들이었다. 배에 오른 소년들은 촌마게(사무라이 상투)를 풀어 단발(斷髮)하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1862년 8월, 일본은 '나마무기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다. 요코하마 개항지 인근의 나마무기(生麥)를 지나던 사쓰마 다이묘(大名) 행렬에 영국인들이 말을 타고 끼어들어 행렬이 흐트러지자 사무라이가 이들을 베어 버린 사건이다. 영국 정부가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사쓰마는 외국인들이 일본 법도인 하마평복(下馬平伏·말에서 내려 몸을 낮춤)의 예(禮)를 어긴 데 대한 정당한 조치였음을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9] '知彼知己' 위한 밀항 시도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한다는 조슈(長州) 출신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의 대표자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유신(維新) 지사를 키워낸 사상가로 평가되지만, 주변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논란의 인물이다. 입장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사정은 잠시 접어두고,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일화가 하나 있다. '미국 군함 밀항 기도 사건'이다. 1853년 에도에 머물던 쇼인은 페리 제독의 내항 소식을 듣고 기항지인 우라가(浦賀)로 달려간다. 서양 증기선 군함의 위용을 목도한 그는 엉뚱하게도 해외 밀항을 결심한다. 쇄국하의 일본에서 밀항은 중죄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듬해 1월 페리 함대가 재차 내일(來..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8] 일본 영토가 된 태평양의 절해고도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태평양 한복판 북위 27도 동경 142도 지점에 '보닌섬(Bonin Island)'으로 알려진 무인도가 있었다. 1827년 영국 군함 블라섬호가 이곳을 찾아 영유권 표지를 남긴다. 무주지 선점의 의미였다. 1830년대 영국의 후원으로 백인들이 입식(入植)하자, 이곳은 특이하게 백인들이 원주민인 땅이 된다. 영국은 중국 진출 교두보로 이곳에 눈독을 들였으나, 1840년 홍콩 조차(租借)에 성공하자 관심이 뜸해진다. 그 틈을 미국이 파고든다. 페리 제독은 1853년 섬을 방문해 저탄소(貯炭所) 부지를 구입한다. 페리는 일본과의 교섭이 실패할 경우 보닌섬을 기항지로 확보할 심산이었다. 영국이 미국의 부지 구입을 항의하자, 미국은 "섬 영유권은 상금(尙今) 미..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7] 日 외교 각성시킨 露의 쓰시마 점령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861년 구력(舊曆) 2월 3일, 증기선 한 척이 쓰시마번(對馬藩) 앞바다에 출몰한다. 러시아 군함 '포사드니크호(號)'였다. 번주인 소 요시요리(宗義和)가 상륙 허가를 거절하자, 러시아 해군은 선체 수리를 이유로 무단 상륙을 강행하고 막사 등 주둔지를 설영(設營)하기 시작한다. 수상한 행동의 연속이었다. 선체 수리는 핑계였다. 포사드니크호의 임무는 쓰시마에 부동항 기지 확보였다. 거듭되는 퇴거 명령을 무시하고 버티던 러시아군은 이윽고 본색을 드러내 해협 요충지인 이모자키(芋崎) 조차(租借)를 요구한다. 러시아군의 횡포로 불상사가 속출하고 번이 우왕좌왕하자 막부의 신경이 곤두선다. 외교 담당 각료인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가 러시아 영사에게 항의하고..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6] 에도막부 몰락 부른 '책상머리 정책'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에도막부의 1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1773~1841)는 40명의 측실과 53명의 자손을 두고 방탕한 생활로 국고를 탕진한 '속물 쇼군'으로 유명하다. 1841년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12대 쇼군 이에요시(家慶)가 폐정 개혁에 나선다. 소위 '덴포(天保)의 개혁'이다. 개혁의 실권을 쥔 로주(老中·막부의 국정 총괄자)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는 당시 사회문제가 되던 급격한 인플레이션 해소를 급선무로 인식했다. 그는 '가부나카마(株仲間)'를 물가 앙등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서민 생활 안정을 명목으로 가부나카마 해산령을 내린다. 가부나카마란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공인(公認) 상인조합으로, 현대로 치면 일종의 기업 카르텔이다. 문제는 이 조치가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5] 16세기 유럽 땅을 밟은 日 소년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문헌상 일본인이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것은 1553년이다. 사비에르에게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사쓰마 출신의 '베르나르도'가 1553년 리스본으로 건너가 수도사가 되었다는 예수회의 기록이 있다. 이보다 본격적인 유럽 방문은 '덴쇼(天正) 견구(遣歐) 소년 사절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1582년 2월, 4명의 소년이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 무역선에 몸을 싣는다. 예수회 신부 발리냐노가 기획하고 규슈의 크리스천 다이묘(大名)들이 후원하는 선교 답례 사절단이었다. 인도와 아프리카를 돌아 2년 반의 여정 끝에 1584년 8월 리스본에 도착한 소년들은 11월 마드리드에서 스페인·포르투갈 왕국의 펠리페 2세를, 이듬해 3월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국..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4] 오사카성 함락의 교훈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615년 여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秀頼)를 제압하고 대망(待望)의 일본 통일을 완성한다. 양측이 결전에 들어간 것은 1614년 겨울이다. 도요토미군이 오사카성에서 농성(籠城)에 들어가자, 도쿠가와군은 요새 같은 성 방어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2대 쇼군인 삼남 히데타다(秀忠)가 무리하게 총공격을 감행하려 하자 노회(老獪)한 이에야스가 나선다. 이에야스는 '피해를 최소화하며 이기는' 복안을 구상한다. 그해 여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입수한 컬버린포 4문과 세이커포 1문 등 신형 대포가 비장의 카드였다. 영국제 대포는 포르투갈인들이 들고온 불랑기(佛郞機)포보다 사거리와 파괴력이 월등하였다. 유럽에서는 컬버린포로 무장한 영국 해군이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3] 明治시대 불어에서 탄생한 '白兵戰'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한국의 역대 최대 관객 수 영화는 17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명량'이다. 절대적 전력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탁월한 리더십과 '사즉생(死則生)'의 결의로 왜군을 격파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영웅담에 한국의 관객들이 크게 호응한 결과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왜군의 세키부네(関船)와 조선의 판옥선이 서로 충돌한 후 병사들 간에 벌어지는 치열한 육박전이다. 이순신 장군이 칼을 뽑아들며 "백병전이다"를 외치자,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돌격!"을 부르짖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관객의 감정선을 최고조로 치닫게 하는 이 장면은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당파(撞破) 전술'은 (충돌 근..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2] 통계 열풍으로 시작된 日 근대화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10월 18일은 일본 정부가 지정한 '통계의 날'이다. 이날엔 1870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통계로 일컬어지는 '부현물산표(府縣物産表)에 관한 포고'가 발표됐다. 당시 조사에서 일본의 생산이 농산물 61%, 공산물 30%, 원자재 9%로 구성되어 있음이 파악됐다. 일목요연한 수치를 눈앞에 둔 근대화 설계자들은 농업 국가 일본의 공업 국가 전환에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음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때까지는 용어가 혼란스러웠다. 나라 형세를 정리한 표라는 의미에서 정표(政表), 표기(表紀) 등을 혼용했고, 'statistics'를 번역한 말도 국세학(國勢學), 국무학(國務學), 지국학(知國學) 등 학자마다 제각각이었다. 1871년 대장성에 통계사(統計司)가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