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 70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1>이중사고의 중요성

애매모호한 물체를 다양한 시선으로 살펴보는 것은 창의성의 원천이 된다. 동아일보DB ‘근거와 증명’이라는 고정된 틀을 깨고 창의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애매모호함’은 이른바 ‘이중사고(Double Think)’라는 것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 이성과 합리는 기본적으로 ‘정합성(整合性)’을 추구한다.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단일화된 진실을 원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중적인 것, 겹쳐져 있는 것, 섞여 있는 것들은 애매모호함이라는 낙인을 찍기에 아주 좋다. 이 애매모호함을 극대화시킨 것이 바로 ‘이중사고’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이 개념은 독재의 화신인 ‘빅브러더’가 인간의 본성을 말살하고 현실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하지만 ‘창의성’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이중사고는 ..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2>‘열린 자세’를 가져라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이야기한 장자의 사고는 21세기에 유용하다. ‘애매모호함’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계가 애매하고 색깔이 분명하지 않아 유심히 관찰해도 이것이 저것인지, 저것이 이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뜻. 애매모호함의 이러한 특징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잘 나타난다. “어느 날 장주(莊周)는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가 되어 있었지만 문득 깨어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닌 장주였다. 그런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나 자신은 나비인데, 장주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놀라운 사실은 장자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던 서양철학자인 데카르트도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다는 것이다..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3>광기를 통한 진보

1950년대 제작된 흑백영화 ‘돈키호테’. 동아일보DB 광기는 이성의 시대가 요구하는 근거와 증명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애매모호함을 넘어 ‘착란’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까지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광기는 질병으로 분류돼 치료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광기는 주어진 국면의 마지막 틀을 깨고 다음 국면으로 나가게 하는 ‘뒤집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기억에 가장 유쾌하게 남은 광인이 바로 돈키호테이다. 중세의 암흑기가 막바지로 향해가던 17세기에 집필된 이 작품은 ‘광기’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후대의 평가는 이 작품을 단순한 풍자소설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광기의 역사’를 집필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돈키호테를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명했고, 프랑스의 비평가 ..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4>“신세계를 탈출하라”

인간복제 시대를 예상한 모습 광기는 모두가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비상식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염탐하고, 넘겨짚고, 상상해봄으로써 낡은 사고를 전복할 수 있다. 즉, 광기는 사고의 프레임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이제껏 억눌려왔던 광기에 대한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것. 아니 그것을 광기, 혹은 비상식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1932년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고전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20세기에 쓰인 미래소설 중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곳 신세계에서는 실험실에서 배양된 아기들이 태어난다. 모두에게는 적절한 계급이 부여된다.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서..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5>“열정으로 질주하라”

조선 후기 천재 화가 최북 현대인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 중 하나가 인과성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어야 하고, 원인이 있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도 있다는 논리는 영원불변의 진리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물리학이 아닌 인간학의 관점으로 들어오면 이런 인과성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놀라운 업적을 이루는 사람들의 삶에서 이런 인과성은 뚝뚝 끊어지곤 한다. 조선 후기의 화가 최북(崔北·1712∼?)은 평생을 광기로 살았던 천재 화가다. 그의 삶은 ‘금릉집(金陵集)’과 ‘호산외사(壺山外史)’ 등에 기록돼 있다. 하루는 세도가의 사람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세도가가 협박을 하자 최북은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며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했다. 그의 최후 역시 ..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6>“사명에 투자하라”

중국 한나라를 세운 황제 유방 이익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이익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가 형성된다. 따라서 이익이란 복잡한 세상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확실하게 구분하는 잣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그걸 하면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곧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투자의 관점에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은 이익이 아닌 ‘사명’이다. ‘초한지’에 등장하는 궁극의 라이벌, 유방과 항우의 결전은 유방의 승리로 끝이 난다. 승리의 요인을 전투력과 리더십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사명의 유무로 해석하는 게 더 옳다. 진시황의 폭정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방과 항우는 각각 세상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칠 결심을 한다. 둘의 최종..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7>이기심과 이타심

여왕벌 주위에 모인 일벌들 ‘사명에 투자하라’는 말이 자칫 개인의 이익은 희생한 채, 타인 혹은 공공의 미래만을 꿈꾸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들은 사명을 추구하는 이에게 ‘제 앞가림도 못한다’는 식으로 타박한다. 당장 자신의 앞길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앞길을 개척할 수 있겠느냐는 것. 하지만 이는 이익과 사명이 가진 독특한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성질을 알기 위해선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프레임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흔히 이기심은 ‘자신을 위한 마음’, 이타심은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둘은 섞일 수 없는 흑백의 관계로 정의된다. 이를 ‘이익과 사명’에 적용해 본다면 이익은 이기심, 사명은 이타심의 영역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이익과 사명 ..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 ]<18>삶을 풍요롭게 하는 사명

소로가 머물렀던 월든 호숫가. 사명을 뜻하는 영어 ‘미션(Mission)’은 ‘보내다’ ‘파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미토(mitto)’에서 유래됐다. 따라서 사명은 ‘어디론가 보내거나 파견될 때 주어지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인생 전체로 확대해 보면 사명이란 우리의 삶이 존재하는 가운데 추구해야 할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가치, 혹은 지향할 바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써야 하고, 다양한 가치를 지향해야 하며, 또 그것이 마치 본질인 것처럼 강요받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1854년 출간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생태주의적 삶을 위한 명저로 평가받는다.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월든 호숫가로 걸어 들어..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19>변증법적 중용

홍익대 인근에서 열린 서울프린지페스티벌. 프린지는 주변부를 뜻한다. 동아일보DB 현대는 ‘서열화된 사회’라 할 수 있다. 1등과 2등이 나뉘고, 일류와 삼류가 구분되며, 메이저와 마이너로 분류된다. 이렇게 순서를 매기고 서열화하는 것은 도구적 이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열화에 따른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폐해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으로는 주변부로 밀려난 대부분의 사람이 차별받고 억압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콤플렉스’라는 이름의 감정 상태를 느낀다. 콤플렉스는 서열화된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것이기에 이를 느끼는 개인 역시 그 심리 상태를 감추고 회피하며 덮어두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진보는 이런 콤플렉스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변증법적 중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논어에선..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20>‘오리진’을 붕괴시켜라

도덕경을 쓴 노자. 콤플렉스를 복권하고 마이너리티의 힘을 활용해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건 ‘하이브리드(Hybrid)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는 혼종(混種), 혼성(混成), 혼혈(混血)의 의미다. 서로 달라 보이던 것들을 ‘이종교배’함으로써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는 가장 전형적인 창의성 코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가능하기 위해선 ‘순수성’이라는 걸 거부해야 한다. 이는 ‘오리진(origin)’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기원으로 보이는 것, 정통의 길을 걸어온 것, 그래서 모두에게 순수한 원형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는 하이브리드적 방법론을 사용하기 힘들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가진 가장 순수한 오리진은 선과 악, 미와 추, 사랑과 증오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