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기다림[이준식의 한시 한 수]〈48〉

待酒不至 / 李白(기다리는 술은 오지 않고) 玉壺繫靑絲 옥호계청사 沽酒來何遲 고주래하지 山花向我笑 산화향아소 正好銜杯時 정호함배시 晩酌東窓下 만작동창하 流鶯復在玆 유앵복재자 春風與醉客 춘풍여취객 今日乃相宜 금일내상의 옥병에 검푸른 실 동여매고 술 사러 가더니 어찌 이리 더딘지 산꽃이 나를 향해 웃음 짓는 지금은 술 마시기 딱 좋은 시절 저녁 무렵 술 따르는 동창 아래 꾀꼬리 지저귀며 함께하누나 봄바람마저 취객과 어우러지니 오늘에야 제대로 쿵짝이 맞는구나 기다리는 자에게 술은 언제나 그 걸음이 더디기 마련이지만 이 시의 맛은 느긋한 기다림에 있다. 술심부름을 떠난 아이의 더딘 발걸음에 잠시 역정을 내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흐드러지게 핀 산꽃이 그새 시인을 향해 헤실대니 술 생각이 더 간절해진..

이끼꽃[이준식의 한 시 한수]〈47〉

苔 / 袁枚(이끼) 白日不到處 백일불도처 靑春恰自來 청춘흡자래 苔花如米小 태화여미소 也學牡丹開 야학모란개​ 햇볕이 들지 않은 곳일지라도 푸르름은 때맞춰 저절로 오기 마련 이끼꽃 쌀알만큼 자그마해도 모란처럼 활짝 꽃 피우는 걸 배우네 시인에게 있어 이끼의 개화는 다가올 미래의 꿈이다. 그 러기에 이끼는 모란처럼 풍성한 개화를 바지런히 ‘배우고’ 있다. 하고많은 꽃 가운데 굳이 꽃 중의 제왕이라는 모란을 답습하겠다는 꿈이 그래서 더 야무지다. 눈길 주기가 쉽지 않은 이끼를 향한 자분자분한 목소리에서 무수한 흙수저들의 적막함을, 그러나 다가올 저들의 개화를 다독이는 시인의 웅숭깊은 마음을 읽는다.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더 무성해지는 이끼, 그 누구로부터 일말의 주목인들 받았으랴. 소외와 낙오의 상처를 다반사..

거악에 맞선 칼[이준식의 한시 한 수]〈46〉

折劍頭 / 白居易(부러진 칼끝) 拾得折劍頭 不知折之由 습득절검두 부지절지유 一握靑蛇尾 數寸碧峰頭 일악청사미 수촌벽봉두 疑是斬鯨鯢 不然剋蛟虯 의시참경예 불연극교규 缺落泥土中 委棄無人收 결락니토중 위기무인수 我有鄙介性 好剛不好柔 아유비개성 호강불호유 勿輕直折劍 猶勝曲全鉤 물경직절검 유승곡전구 부러진 칼끝을 주웠는데 부러진 연유는 알지 못하겠다 시퍼런 뱀 꼬리 같고 뾰족한 푸른 산봉우리 같기도 하다 고래를 베다 부러졌나 교룡을 찌르다 부러졌나 부러진 채 진흙 속에 버려져 줍는 이 하나 없다 나 역시 성질이 유별나서 강직한 건 좋아해도 유순한 건 질색 강해서 부러진 칼을 얕보지 말지니 굽은 채 온전한 갈고리보다는 낫다네. 젊은 시절 백거이는 간관(諫官)으로서의 기개가 대단했다. 자주 황제에게 입바른 상소를 올렸..

소동파의 취중 단상(斷想)[이준석의 한시 한수]〈45〉

臨江仙 夜歸臨皐 / 蘇軾(밤에 임고로 돌아오다) 夜飲東坡醒復醉 야음동파성부취 歸來仿佛三更 귀래방불삼경 家童鼻息已雷鳴 가동비식이뢰명 敲門都不應 고문도불응 倚杖聽江聲 의장청강성 長恨此身非我有 장한차신비아유 何時忘卻營營 하시망각영영 夜闌風靜谷紋平 야란풍정곡문평 小舟從此逝 소주종차서 江海寄余生 강해기여생 동파에서 밤늦도록 술 마시며 깨고 또 취했다가 돌아오니 시간은 삼경쯤 된 듯 아이놈 코고는 소리가 우레처럼 요란하다 아무리 문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 지팡이에 기대어 강물 소리 듣는다 이 몸조차 내 소유가 아님을 한탄하노니 언제면 아등바등한 이 삶을 잊고 살거나 밤 깊어 바람 자니 물결마저 잠잠하다 작은 배 타고서 이곳을 떠나 강호에 여생을 맡기고파라 정쟁에 휘말려 조정에서 밀려나 후베이(湖北)성 황저우(黃州)로..

도연명의 인생[이준석의 한시 한 수]〈44〉

雜詩 / 陶潛 人生無根蔕 인생무근체 飄如陌上塵 표여맥상진 分散逐風轉 분산축풍전 此已非常身 차이비상신 落地爲兄弟 낙지위형제 何必骨肉親 하필골육친 得歡當作樂 득환당작락 斗酒聚比鄰 두주취비린 盛年不重來 성년부중래 一日難再晨 일일난재신 及時當勉勵 급시당면려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 인생은 뿌리도 꼭지도 없이 흩날리는 길 위의 먼지 같은 것 흩어져 바람 따라 나뒹굴다 보면 더 이상 본래의 모습은 아니라네 태어나는 순간 모두가 형제인 것을, 굳이 피붙이하고만 친해야 할까 즐거울 땐 한껏 즐기고 한 말 술로 이웃과 어울려 보세 왕성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이 두 번 오진 않지 모름지기 때맞춰 자신을 독려할 것,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으니 한데 인생은 과연 자기 방향을 스스로 움켜잡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

눈과 매화[이준식의 한시 한 수]〈43〉

雪梅 / 盧梅坡(눈과 매화) 梅雪爭春未肯降 매설쟁춘미긍항 騷人閣筆費評章 소인각필비평장 梅須遜雪三分白 매수손설삼분백 雪却輸梅一段香 설각수매일단향 매화와 눈, 봄빛을 겨루며 서로 지지 않으려 하매 시인이 붓을 놓고 우열을 따져본다 흰 빛깔은 매화가 눈에 조금 뒤지고 향기라면 아무래도 눈이 매화를 못 이기지 중재에 나선 시인은 선뜻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가 난감하다. 고심 끝에 무승부로 타협한다. 빛깔 하면 눈이요, 향기라면 매화라 했으니 어느 한쪽도 서운하진 않겠다. 눈과 매화는 그렇게 오순도순 혹은 티격태격하며 봄의 길목에 들어섰다. 저들의 빛깔과 향기에 시인의 화답이 없을 수 없다. 시인은 제2수에서 다시 대타협을 도모한다. 매화만 있고 눈이 없다면 운치가 없고 눈만 있고 시가 없다면 저속하리니 저..

유혹[이준식의 한시 한 수]〈42〉

大堤曲 / 李賀(제방의 노래) 妾家住橫塘 첩가주횡당 紅沙滿桂香 홍사만계향 青雲教綰頭上髻 청운교관두상계 明月與作耳邊璫 명월여작이변당 蓮風起 江畔春 련풍기강반춘 大堤上 留北人 대제상류북인 郎食鯉魚尾 랑식리어미 . 妾食猩猩唇 첩식성성진 莫指襄陽道 막지양양도 綠浦歸帆少 록포귀범소 今日菖蒲花 금일창포화 明朝楓樹老 명조풍수로 저희 집은 횡당에 있는데요 붉은 비단 휘장에 계수 향 가득하답니다 구름처럼 풍성하게 쪽 찐 머리 밝은 달처럼 둥그런 귀고리 연꽃이 바람에 일렁일 때 강변에 넘실대는 봄기운 둑 위에 서서 북방 사내를 붙잡는다 낭군은 잉어꼬리 드셔요 전 오랑우탄 입술을 먹을래요 양양 가는 길 가리키지 마세요 푸르른 포구엔 돌아가는 배 드물답니다 오늘은 창포꽃이 저리 곱지만 내일이면 단풍처럼 지고 말걸요 남방의 포..

투계[이준식의 한시 한 수]〈41〉

神鷄童謠 / 唐代 民謠(투계 신동의 노래) 生兒不用識文字 鬪鷄走馬勝讀書 賈家小兒年十三 富貴榮華代不如 能令金距期勝負 白羅繡衫隨軟輿 父死長安千里外 差夫持道挽喪車 민간에도 투계 열풍이 몰아쳐 부호 중에는 거금을 들여 대량의 쌈닭을 구입하기도 했고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시에 등장하는 열세 살 소년의 이름은 가창(賈昌), 그는 투계 재능 하나로 일약 황제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 다 누렸으니, 고관대작의 자제가 부럽지 않았다. 현종이 태산으로 봉선 (封禪·황제가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내는 의식) 행차에 나섰을 때 가창도 투계 삼백 마리를 데리고 수행했다. 이때 행차에 따라 나섰던 그의 부친 가충(賈忠)이 태산 아래서 죽음을 맞았는데, 황제는 호송 인원을 붙여 장안까지 운구토록 했다. 투계와 경마는 잡기..

어제는 어제일 뿐[이준식의 한시 한 수]〈40〉

昨日歌 / 文嘉(어제의 노래) 昨日復昨日 昨日何其好 昨日之功績 今日何不爲 今日空想昨日事 今日之空變昨日 若知今日空歡喜 昨日何不平常事 多做一些平常事 勝過成功只一日 莫把昨日當今日 昨日只能爲昨日 어제 또 어제 어제가 정말 좋았지 어제 이룬 공적 오늘은 왜 못 이룰까 오늘 만약 어제 일을 공상만 한다면 오늘은 허망하게 어제로 변할 것 오늘 일 없이 즐기느니 차라리 어제처럼 소소한 일이나 하지 소소한 일 많이 하는 게 하루 반짝 성공하는 것보다 나으리 어제를 오늘로 여기지 말라 어제는 그저 어제일 뿐일지니 영웅은 지난날의 용맹을 자랑하지 않는 법. 어제의 영광에 얽매이다 보면 오늘 나태해지거나 불만스럽기 십상이다. 오늘을 직시할 수 없고 내일을 개척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단박에 얻은 어제의 성공은 요행처럼 위험할 ..

연하장[이준식의 한시 한 수]〈39〉

拜年 / 文徵明(새해 인사) 不求見面惟通謁 불구견면유통알 名紙朝來滿敝廬 명지조래만폐려 我亦隨人投數紙 아역수인투수지 世情嫌簡不嫌虛 세정혐간불혐허 만날 생각은 않고 연하장만 달랑 보내오니 아침부터 우리 집엔 화려한 연하장이 수북하다 나 역시 남들처럼 여러 군데 보내긴 하지 세상인심 소략해진 예법은 나무라면서 허울뿐인 예법은 마다하지 않네 ※세상인심 허례허식 싫어할 줄 모르는구나 見面 : 얼굴을 보면서 만나다. 通謁 : 만남을 청하며 종이에 이름을 적어 내는 것을 가리킨다. 名紙 : 사람을 만나기 전에 만나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가리킨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竹片에 이름을 새겼기 때문에 ‘名刺’라고 했다. 단출하고 손쉬운 새해 인사로 분주히 연하장을 주고받던 때가 있었다. 한데 실용과 효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