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봄누에처럼 촛불처럼[이준식의 한시 한 수]〈58〉

無題 / 李商隱 相見時難別亦難 상견시난별역난 東風無力百花殘 동풍무력백화잔 春蠶到死絲方盡 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乾 납거성회누시건 曉鏡但愁雲鬢改 효경단수운빈개 夜吟應覺月光寒 야음응각월광한 蓬萊此去無多路 봉래차거무다로 靑鳥殷勤爲探看 청조은근위탐간 만날 때 어렵더니 헤어져서도 괴롭구나 봄바람 잦아들자 온갖 꽃이 다 시든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멈추고 촛불은 재가 돼서야 눈물이 마르지 아침엔 거울 앞에서 변해버린 귀밑머리 탄식 밤엔 시 읊으며 달빛 싸늘타 여기시리. 봉래산 여기서 멀지 않으니 파랑새야 날 위해 정성스레 알아봐 주렴 어렵사리 이루어진 만남 뒤의 이별이라 그 체감은 더 절실했을 것이다. 훈풍의 세례 속에 활짝 만개했다 저무는 봄꽃처럼 우리의 인연도 가뭇없이 멀어져만 가는가. 그렇더라도 그대를..

사모곡[이준식의 한시 한 수]〈57〉

思母 / 與恭(어머니를 그리며) 霜殞蘆花淚濕衣 상운로화루습의 白頭無復倚柴扉 백두무복의시비 去年五月黃梅雨 거년오월황매우 曾典袈裟糴米歸 증전가사적미귀 서리에 스러진 갈대꽃을 보노라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사립문에 기대 선 백발 어머니를 더 이상 뵈올 수 없게 되다니 작년 오월 장맛비가 한창이던 때였지 가사(袈裟)를 전당 잡히고 쌀팔아 집에 돌아왔었는데 서리 맞아 황량한 갈대숲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여읜 한 승려가 눈물을 쏟는다. 작년 5월 춘궁기, 아들은 승복(僧服)마저 전당 잡힌 채 양식을 마련하여 귀가했고 그때 어머니는 장맛비 속에서 사립문에 기대어 아들을 기다렸으리라. 세속의 연(緣)을 끊고 출가하였지만 천륜의 끈은 그렇게나마 잠시 모자 상봉을 맺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스러진 갈대꽃에서 시인이 기억해낸 ..

참새의 소망[이준식의 한시 한 수]〈56〉

野田黃雀行 / 曹植(들판의 참새) 高樹多悲風 海水揚其波 고수다비풍 해수양기파 利劍不在掌 結友何須多 이검부재장 결우하수다 不見籬間雀 見鷂自投羅 불견리간작 현요자투라 羅家得雀喜 少年見雀悲 나가득작희 소년견작비 拔劍捎羅網 黃雀得飛飛 발검소라망 황작득비비 飛飛摩蒼天 來下謝少年 비비마창천 내하사소년 높은 나무엔 소슬한 바람 잦고 바닷물에는 파도가 드높기 마련 예리한 칼 손에 없으면서 굳이 많은 친구를 사귀어야 할까 울타리 속 참새가 매를 보고는 그물에 뛰어드는 걸 보지 못했나 그물 친 자는 참새 잡아 좋아라 해도 소년은 참새 보며 서글퍼하네 칼을 뽑아 그물을 베자 참새는 훨훨 날 수 있었지 창공을 높다랗게 날아가다가 내려와 소년에게 고맙다 하네 曹操의 아들 조식은 비운의 황자였다. 권력 다툼에서 형 曹丕에게 밀린..

봄날은 간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55〉

如夢令 / 李淸照 昨夜雨疏風驟 작야우소풍취 濃睡不消殘酒 농수불소잔주 試問捲簾人 시문권렴인 却道海棠依舊 각도해당의구 知否知否 지부지부 應是綠肥紅瘦 응시록비홍수 어젯밤 듬성듬성 빗발 뿌리고 바람은 드세게 휘몰아쳤지 깊은 잠 이루고도 술기운은 사그라지지 않네 발 걷는 아이에게 넌짓 물었더니 해당화는 여전하다는 뜻밖의 대답 모르는 소리 네가 알기는 해 초록은 더 짙어졌을지라도 붉은 꽃은 져버린 게 분명하리니 눈을 뜨자마자 불현듯 스치는 걱정. 얘야, 그 붉던 해당화는 다 지고 말았겠지? 아이의 대답이 심드렁하다. 그대론데요. 저에게는 바람 불고 꽃 피고 지는 게 그저 밋밋한 일상에 불과할 터, 개화든 낙화든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데 웬 수선인가 싶었을 것이다. 나이라는 짐짝에 짓눌리다 보면 자연의 성쇠나 계절..

꽃 그리는 마음[이준식의 한시 한 수]〈54〉

湖上雜感 / 袁枚(호반의 상념) 桃花吹落杳難尋 도화취락묘난심 人爲來遲惜不禁 인위래지석불금 我道此來遲更好 아도차래지갱호 ​ 想花心此見花深 상화심차견화심 복사꽃 다 떨어져 흔적도 찾기 어려우니 사람들은 뒤늦게 온 걸 못내 아쉬워한다 그래도 난 늦게 온 게 더더욱 좋은 것이 꽃 그리던 마음이 꽃구경보다 더 절절했기 때문이지 중국 고전시의 미덕은 온유돈후(溫柔敦厚)에 있었다. 그것은 따스하고 도타운 진심을 바탕으로 善을 이끌어내는 게 본분이었고 공자 이래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괴이하거나 교만하거나 음란하거나 심지어 익살스러운 경향마저도 멀리하려 했다. 원매는 달랐다. 그는 자유인을 자처하면서 복고풍이나 형식 지상주의를 경계했고 진솔한 내면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시심(詩心)은 따라서 ..

허황된 꿈[이준식의 한시 한 수]〈53〉

於潛僧綠筠軒 / 蘇軾(어잠현 어느 승려의 대나무집) 可使食無肉 가사식무육 不可居無竹 불가거무죽 無肉令人瘦 무육영인수 無竹令人俗 무죽영인속 人瘦尙可肥 인수상가비 士俗不可醫 사속불가의 傍人笑此言 방인소차언 似高還似癡 사고환사치 若對此君仍大嚼 약대차군잉대작 世間那有揚州鶴 세간나유양주학 식사할 때 고기는 없을지언정 사는 곳에 대나무가 없을 순 없지 고기 없으면 사람이 야위긴 해도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저속해지지 사람이 야위면 살찌울 수 있지만 선비가 저속해지면 고칠 수가 없지 옆 사람이 이 말을 비웃으며 하는 말 고상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대나무도 마주하고 고기도 실컷 먹는 세상 어디에 그런 허황된 꿈이 있을쏜가 ※세상에 '揚州의 鶴'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기에 지조를, 속..

모란의 지조[이준식의 한시 한 수]〈52〉

(납일선조행상원·臘日宣詔幸上苑) / 武則天(연말에 상원 행차를 명하다) 明朝遊上苑 명조유상원 火急報春知 화급보춘지 花須連夜發 화수연야발 莫待曜風吹 막대요풍취 내일 아침 정원으로 나들이 갈 참이니 서둘러 봄에게 알리도록 하라 꽃들은 밤새워서라도 다 피어 있으라 새벽바람 불기를 기다리지 말고 花王의 영예를 가진 모란은 부귀영화의 상징이자 지조, 절개의 표상이기도 하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이 지은 이 시에는 전설 같은 후일담이 뒤따른다. 어느 엄동설한, 여황제가 문득 황실 정원의 꽃을 완상(즐겨 구경하다)하고 싶다고 하자 한 신하가 아첨을 떨었다. 내일 아침 모든 꽃이 만발하도록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시지요. 측천은 5언시로 된 이 조서를 발했다. 꽃의 요정들은 이 조서를 보자 화들짝 놀라 밤새 바지런히..

거리 두기[이준식의 한시 한 수]〈51〉

不出門 / 白居易(문 밖을 안 나가다) 不出門來又數旬 불출문래우수순 將何銷日與誰親 장하소일여수친 鶴籠開處見君子 학롱개처견군자 書卷展時逢古人 서권전시봉고인 自靜其心延壽命 자정기심연수명 無求於物長精神 무구어물장정신 能行便是眞修道 능행편시진수도 何必降魔調伏身 하필항마조복신​ 문 밖을 안 나간 지 또 수십 일 무엇으로 소일하며 누구와 벗하나 새장 열어 학을 보니 군자를 만난 듯 책 펼쳐 읽으니 옛 사람을 뵙는 듯 제 마음 차분히 하면 수명이 늘고 물욕을 내지 않으면 정신도 고양되는 법 이렇게 하는 게 진정한 수양 번뇌를 없애려 애써 심신을 조율할 것도 없지 가공할 전염병 탓에 ‘사회적 거리 두기’란 생뚱맞은 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얽히고설킨 교제와 거래가 일상화된 터에 그게 말처럼 쉽진 않다. 갑작스레 동선을..

황제의 노여움을 산 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50〉

歲暮歸南山 / 孟浩然(세모에 남산으로 돌아가다) 北闕休上書 북궐휴상서 南山歸弊廬 남산귀폐려 不才明主棄 부재명주기 多病故人疏 다병고인소 白髮催年老 백발최년노 靑陽逼歲除 청양핍세제 永懷愁不寐 영회수부매 松月夜窗虛 송월야창허 북쪽 궁궐로 상서는 이제 그만 올리고 남산의 낡은 오두막으로 돌아가련다 재주 없어 명군께서 날 버리셨고 병 잦으니 친구조차 소원해졌다 백발은 노년을 재촉하고 봄빛은 세모를 몰아낸다 오랜 근심으로 잠 못 이루는데 솔 아래 달빛만이 창가에 허허롭다 시인은 왜 벼슬을 포기했을까. 군주는 현명한데 자신의 재주가 부족한 데다 병이 잦아 친구들과의 교유마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누굴 원망하랴. 게다가 흰머리가 돋을 만큼 이젠 나이도 들었고, 마침 봄기운이 돌면서 또 한 해가 허망하게 지나려 한다. ..

두보의 情[이준식의 한시 한 수]〈49〉

又呈吳郞 / 杜甫(다시 오랑에게 드린다) 堂前撲棗任西隣 당전박조임서린 無食無兒一婦人 무식무아일부인 不爲困窮寧有此 불위곤궁녕유차 只緣恐懼轉須親 지연공구전수친 卽防遠客雖多事 즉방원객수다사 便揷疏籬却甚眞 사삽소리각심진 已訴徵求貧到骨 이소징구빈도골 正思戎馬淚盈巾 정사융마루영건 서쪽 이웃이 집 앞 대추 따 가도록 내버려둔 건 양식도 자식도 없는 아낙이라서였네 궁핍하지 않았다면 굳이 그랬을까 맘 졸일 걸 생각한다면 더 살갑게 대해줘야지 타지에서 온 그대를 경계하진 않겠지만 울타리까지 쳐둔 건 좀 심하지 않나 세금 바치느라 빈털터리 되었다고 하소연했으니 이 전란에 나조차 눈물이 쏟아진다네 집 뜨락에 대추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가을이면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후일 두보는 이 초가를 먼 친척조카 오랑(吳郞)에게 넘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