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92> 夫婦之道

- 지아비 부(大-1) 지어미 부(女-8) 갈 지(丿-3) 도리 도(辵-9) 맹자의 모친이 한 말은 이런 뜻이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 것은 내가 이 베를 중간에 잘라버린 것과 같다. 군자란 배워서 이름을 세우고, 물어서 지식을 넓혀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만히 있어도 편안하고 또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해악을 멀리할 수 있다. 이제 학문을 그만둔다면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날 수 없고 재앙이나 환란을 피할 수도 없다. 베를 짜서 먹고 살면서 도중에 그만두고 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베 짜는 일을 그만둔다면, 어떻게 남편과 자식을 입히고 오래도록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여자가 생업을 그만두고 남자가 덕 닦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도둑이 되지 않으면 남의 종노릇이나 하게 될 것이다.”..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91> 斷織

- 끊을 단(斤-14)베를 짤 직(糸-12) 서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모는 자식에게 영향을 끼치고 자식은 부모를 닮아간다. 부모가 애써 가르치려 한 것보다도 부모가 평소에 늘 그리고 무의식중에 말하고 보여주었던 언행이 더 크게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 먼저 그 부모가 바른 생각을 지니고 언행을 삼가면서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그 자신은 소인답게 굴면서 자식에게 군자나 대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은 요행수를 바라는 일이다. 맹자의 모친이 아들을 가르친 방식이나 태도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둘 있다. 전한 시대의 학자인 劉向(유향, 기원전 77∼기원후 6)이 편찬한 ‘列女傳(열녀전)’에 나온다.(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열녀’는 “정절을 지킨 여..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90> 孟母三遷

- 성 맹(子-5)어미 모(母-0)석 삼(一-2)옮길 천(辵-12) 지난 189회 ‘한비자’에 나온 글의 뜻은 이렇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자식에게 자애롭고, 생명을 중시하는 자는 자신의 몸에 자애롭고, 공적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자신의 일에 자애롭다. 자애로운 어미는 어린 자식이 행복해지도록 힘쓰는데, 어린 자식이 행복해지도록 힘쓸 때면 재앙을 제거하는 일에 힘쓰고, 재앙을 제거하는 일에 힘쓰면 사려가 깊어지고, 사려가 깊어지면 사리를 터득하고, 사리를 터득하면 반드시 공을 이루고, 반드시 공을 이루면 행동할 때 망설이지 않으니, 망설이지 않는 것을 ‘용기’라 한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든 벗끼리 갖는 사랑이든 사랑이면 다 좋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눈이 멀게 된다면,..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9> 其行之也不疑

- 그 기(八-6) 행할 행(行-0) 갈 지(丿-3) 어조사 야(乙-2) 아닐 불(一-3) 망설일 의(疋-9) 또 조괄은 평소에 병법에 대해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도 당연한 듯이 여겼으며, 그 책무를 전혀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자부하는 마음이 크고 책무를 중하게 여기지 않은 조괄이었으니 오래도록 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의 조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장수가 교체된 경우이니, 그렇다면 이왕에 쓰고 있던 전략이나 전술, 편제 따위는 가벼이 여겼을 것도 당연하다. 실제로 염파를 대신하자마자 한 일이 군령을 바꾸고 관리들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사실 군령이나 관리는 함부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갑작스런 변경이나 교체는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며, 새로 익숙해지는 데에도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8> 危微之幾

아슬아슬할 위(卩-4)어슴푸레할 미(彳-10)갈 지(丿-3)낌새 기(幺-9) ‘순자’ ‘해폐’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昔者舜之治天下也, 不以事詔而萬物成. 處一危之, 其榮滿側; 養一之微, 榮矣而未知. 故道經曰, ‘人心之危, 道心之微.’ 危微之幾, 唯明君子而後能知之”(석자순지치천하야, 불이사조이만물성. 처일위지, 기영만측; 양일지미, 영의이미지. 고도경왈, ‘인심지위, 도심지미.’ 위미지기, 유명군자이후능지지) “옛날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일마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온갖 것들이 잘 되었다. 아슬아슬한 마음을 한결같이 잡도리했으므로 곳곳에서 빛이 났고, 어슴푸레한 마음을 한결같이 잘 길렀으므로 빛이 나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도경’에서 “사람의 마음은 아슬아슬하고, 도를 따르는 마음은 어슴푸레하..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7> 精於道

자세히 알 정(米-8)어조사 어(方-4)길 도(辵-9) 조사의 아내는 아들 조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조괄의 평소 생활은 거의 反中庸(반중용)이었다. 그랬으므로 굳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평소 행동거지를 통해 장군으로서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알았다. 그것은 한 가지 일에 정통하면 사물의 원리나 이치를 꿰뚫게 되어서 다른 일들까지도 잘 살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견이나 통찰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마음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사고와 공명정대한 마음이 앞서야만 한다. ‘순자’ ‘解蔽(해폐)’에 나온다. “農精於田而不可以爲田師, 賈精於市而不可以爲賈師, 工精於器而不可以爲器師. 有人也, 不能此三技而可使治三官, 曰, 精於道者也,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6> 長平大戰

길 장(長-0)고를 평(干-2)큰 대(大-0)싸울 전(戈-12) 進退兩難(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린 조괄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직접 싸우러 나갔지만, 진나라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조괄은 죽었다. 결국 군사 수십만 명이 진나라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이들을 모두 땅에 묻어 죽였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長平大戰(장평대전)’이다. 이 싸움으로 조나라의 군사 45만 명이 죽었다. 조나라는 초나라와 위나라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나, 천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에 진나라는 이 대전의 승리로 천하 통일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예나 이제나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식이 잘 되면 그 부모 또한 호의호식하며 영예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강해서이지만,..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5> 母親의 挽留

어미 모(毋-1)겨레 친(見-9)당길 만(手-7)머무를 류(田-5) 조나라는 廉頗(염파)를 장군으로 삼아 진나라를 치도록 했다. 염파는 진나라 군대가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맞서지 않고 지키기만 했다. 이때 진나라에서 첩자를 이용해 이런 말을 퍼뜨렸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일은 오직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 이에 조나라 왕이 염파 대신 조괄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인상여가 조괄은 병법을 책으로만 읽었을 뿐 사태의 변화에 대처할 줄 모른다며 말렸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다. 조괄이 떠나려 하자, 그 모친이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제 아들을 장군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이 불러서 “무엇 때문이오?” 하고 물었다. 조괄의 모친이 대답했다. “예전에..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4> 趙括

새 정부가 ‘부자 증세’를 추진하려 하자, 야당에서는 곧바로 우려 또는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야당 쪽의 의중이야 당연히 반대가 목적인 듯하지만, 그들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증세의 동기나 본질이 무엇이냐를 놓친 듯하다. 증세의 본질은 바로 조세의 형평성과 공정성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조사가 한 말은 깊게 새겨야 한다.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누리려 한다면, 마땅히 자신이 사는 사회와 나라가 튼튼해야 한다. 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지구촌 곳곳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국지전을 보라. 내란과 전쟁, 소요와 불안이 가득한 나라에서 과연 부자라 해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누구도 안정을 누릴 수 없다. 안정을 누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고작 감옥 같은 삼엄한 울타리 안에..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83> 趙奢

성 조(走-7)넉넉할 사(大-9)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과 아비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똑같을 수 없고,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식을 아끼는 마음에서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어미가 역사에도 자주 등장하고 지금도 여전히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전국시대 趙(조)나라는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로, 武靈王(무령왕, 기원전 325∼299 재위) 때 기마병을 도입하면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무령왕이 아들 惠文王(혜문왕, 기원전 298∼266년 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主父(주부)라 자칭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혜문왕과 공자 章(장)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나 무령왕이 유폐되어 굶어죽는 분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동쪽으로 진출하려고 늘 조나라를 압박하던 秦(진)나라에는 절호의 기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