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인제 가는 길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인제 가는 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인제 가는 길 이 쪽 저 쪽 남김없이 불에 타고 도끼로 찍어내고 봄빛이 화사할 산꼭대기 반도 넘게 휑하니 비어있네. 나이든 농부는 밭을 가느라 쉬지 않고 소를 모는 소리는 흰 구름 속에 가득하네. 麟蹄道中 火燒刀斫遍西東(화소도작편서동) 春色山頭一半空(춘색산두일반공) 年老田翁耕不輟(연로전옹경불철) 叱牛聲在碧雲中(질우성재벽운중) 중옹(中翁) 이광찬(李匡贊·1702~ 1766)이 봄이 한창 무르녹을 무렵 동해안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다. 큰 산이 이어진 인제 산길은 신록이 우거진 멋스러운 풍경을 나그네에게 선물하는 곳이건만 그것도 수십 년 전 낡은 이야기가 됐다. 길 양쪽 눈길이 가 닿는 곳마다 산꼭대기까지 휑하다. 화전민이 농사를 짓는다며 불을..

[가슴으로 읽는 한시] 늦게 일어나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늦게 일어나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늦게 일어나서 새 지저귀는 소리 빗물처럼 쏟아져 일어나 보니 창문이 제일 환하네. 여리던 나물은 봄 지나서 부드럽고 둥근 연잎은 수면과 나란하네. 밥상엔 새벽 시장서 나눠 온 고기가 올랐고 거처하는 방에선 높은 성곽이 마주 보이네. 얼굴과 머리 씻고선 역사책 읽기가 제격이라 빈 마루를 깨끗하게 청소하였네. 晏起遣興 鳥聲落如雨(조성낙여우) 人起戶先明(인기호선명) 細菜經春軟(세채경춘연) 圓荷與水平(원하여수평) 盤殽分早市(반효분조시) 居處面高城(거처면고성) 洗沐宜看史(세목의간사) 空堂灑掃淸(공당쇄소청) 삼명(三溟) 강준흠(姜浚欽·1768~1833)이 일기를 쓰듯이 생활을 읊었다. 빗물이 쏟아지듯이 울어대는 새들의 지저귐에 늦잠을 깼다. 창문이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약이란 이름의 아이

[가슴으로 읽는 한시] 약이란 이름의 아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약이란 이름의 아이 약아(藥兒)가 젖은 아직 못 떼었어도 제 배고프고 부른 줄은 잘도 알지. 엄마 따라 옹알옹알 말 배우더니 "별 하나 나 하나, 별 셋 나 셋." 안고 어르기를 멈출 수 없건마는 세 살이라 참새처럼 뛰쳐나가네. 한 번 웃음에도 번뇌 시름 잊게 하니 내 병을 고치는 약 같은 아이지. 藥兒 藥兒未斷乳(약아미단유) 饑飽稍能諳(기포초능암) 學母牙牙語(학모아아어) 星三我亦三(성삼아역삼) 抱弄烏可已(포롱오가이) 三歲能雀躍(삼세능작약) 一笑忘煩憂(일소망번우) 是謂吾之藥(시위오지약) 조선 후기 역관(譯官) 천뢰(天籟) 이정직(李廷稷·1781~1816)의 시다. 그의 맏아들이 역시 역관으로 유명한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

[가슴으로 읽는 한시] 꽃을 보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꽃을 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꽃을 보다 세상 사람 꽃의 빛깔을 볼 때 나는 홀로 꽃의 기운을 본다. 그 기운 천지에 가득 찰 때면 나도 또한 한 송이 꽃이 된다. 看花 世人看花色(세인간화색) 吾獨看花氣(오독간화기) 此氣滿天地(차기만천지) 吾亦一花卉(오역일화훼) 순조의 외조부 금석(錦石) 박준원(朴準源·1739~1807)이 지었다. 봄이 한창이라 세상이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어디를 보든 찬란한 색채를 뽐내며 꽃이 피어 있다. 색채의 향연에 몸도 마음도 들떠 꽃구경에 나선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매혹시키는 찬란한 색채의 뒤를 보고 있다. 꽃을 피워내는 기운이다. 꽃의 기운이 천지를 가득 채우는 시절이 되면 꽃만이 꽃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꽃..

[가슴으로 읽는 한시] 열두 고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열두 고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열두 고개 한 고개는 높고 한 고개는 낮고 앞에는 깊은 개울 뒤에는 얕은 개울. 한 고개는 짧고 한 고개는 길고 바위는 울퉁불퉁 소나무는 울울창창. 한 고개는 구불구불 한 고개는 쭉쭉 뻗고 말은 고꾸라지고 종은 헐떡헐떡 여섯 고개 넘고 나니 또 여섯 고개 아침에 곤양 떠나 사천 오니 해가 지네. 세상의 길과 길은 평탄한 때 한번 없나니 내 가던 길 이젠 쉬고 길 나서지 말자꾸나. 十二峙謠 一嶺高一嶺低(일령고일령저) 前深溪後淺溪(전심계후천계) 一嶺短一嶺長(일령단일령장) 石磊磊松蒼蒼(석뇌뢰송창창) 一嶺曲一嶺直(일령곡일령직) 駟馬蹶僕脅息(사마궐복협식) 六嶺度了又六嶺(육령도료우육령) 朝發昆明泗夕景(조발곤명사석경) 世間道途無時平(세간도도무시평) 吾行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화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낙화 산은 절을 감싸 안고 돌길은 구불구불 올라가네. 구름이 감춰놓은 호젓한 골짜기를 들어서자 스님의 푸념 소리 들려오네. "봄이라 일도 많네! 아침마다 절 문 앞에서 낙화를 쓸어야 하네." 題僧軸 山擁招提石逕斜(산옹초제석경사) 洞天幽杳閟雲霞(동천유묘비운하) 居僧說我春多事(거승설아춘다사) 門巷朝朝掃落花(문항조조소낙화) 휴와(休窩) 임유후(任有後·1601~ 1673)가 젊은 시절 산사에 올라가 지었다. 번잡하고 바쁜 일상을 벗어나 산사를 찾아 산행을 즐길 때가 되었다. 산이 절을 감싸고, 구름이 계곡을 숨겨놓아 뭔가 모르게 속인의 발길을 막는다. 가파른 돌길을 걸어 절 문에 들어서자 스님의 푸념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봄이 되니까 정말 바쁘네. 웬..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국통사를 읽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국통사를 읽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국통사를 읽고 아픔이 가시자 새삼 느낀 것은 아픔이 훨씬 더 깊다는 것이다. 광노(狂奴)는 옛 버릇 못버리고 아직도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금 눈앞에는 엄동설한 풍경이 이렇게 가득하니 어느 때나 날이 풀려 푸른 하늘 보려나. 讀痛史 痛定方知痛更深(통정방지통경심) 狂奴故態尙悲吟(광노고태상비음) 滿目窮陰今似此(만목궁음금사차) 陽生何日見天心(양생하일견천심) 구한말의 항일 우국지사 이건승(李建昇·1858∼1924)이 1915년 친구이자 우국지사인 박은식(朴殷植·1859∼1925) 선생이 쓴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읽고 썼다. 선생은 망국의 아픔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정신을 차려보자 망국의 통한이 더 뼈저리게 찾아왔다고 했다. 나라가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화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낙화 분신이 억만 천만 바쁘게 흩어져도 의구하다 옛 가지는 억세게도 버텨 섰네. 틀림없이 봄의 신이 수레 돌려 떠나고자 미리부터 온 대지에 향을 뿌려 놓았구나. 바람 불고 비가 내려 꽃의 운명 결판나니 나는 제비 우는 꾀꼬리 적막 신세 꼴이로다. 절대(絶代)의 가인이라 애도문을 써야 하니 고운 창자 시인 중에 누굴 골라 맡길 텐가? 暮春賦落花 分身散去億千忙(분신산거억천망) 依舊枝株影木强(의구지주영목강) 定識東皇將返駕(정식동황장반가) 先敎大地盡鋪香(선교대지진포향) 風風雨雨關終始(풍풍우우관종시) 燕燕鸎鸎遞踽凉(연연앵앵체우량) 絶代佳人宜作誄(절대가인의작뢰) 有誰才子錦爲腸(유수재자금위장) 화려했던 꽃의 향연도 끝날 무렵 우념재(雨念齋) 이봉환(李鳳煥·?~..

[가슴으로 읽는 한시] 딱따구리

[가슴으로 읽는 한시] 딱따구리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딱따구리 산 늙은이 한밤중에 지게문 열고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투덜거리네. "얄미워라, 저 놈의 딱따구리! 누가 마실 온 줄 알았네 그려." 峽行雜絶 山翁夜推戶(산옹야추호) 四望立一回(사망입일회) 生憎啄木鳥(생증탁목조) 錯認縣人來(착인현인래) 19세기 전기의 시인 대산(對山) 강진(姜溍·1807~1858)이 서울을 떠나 강원도 일대를 여행할 때 썼다. 산골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몇 편의 시로 묘사했는데 그중 하나다. 매우 짧은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간 풍경이다. 한밤중 노인이 방문을 열고 마당에 나와 사방을 휘 둘러보고서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그가 마당을 나온 이유는 딱따구리 때문이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를 듣고서 이웃 마을에 ..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볍게 짓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볍게 짓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가볍게 짓다 맑은 개울 가까이 두고 집을 정하니 방문 열면 작은 연못 마주 보인다. 창이 훤해 푸른 산이 자리에 들고 처마 짧아 빗발이 책상에 튄다. 기분이 내킬 때면 천지가 광활해도 하는 일 없어서 세월은 길어라. 시 쓰고 술 마시는 버릇만 남아 늙어가며 미친 짓이 한결 더 심해진다. 漫題 卜地依淸澗(복지의청간) 開軒對小塘(개헌대소당) 窓虛山入座(창허산입좌) 簷短雨侵牀(첨단우침상) 得意乾坤闊(득의건곤활) 無營日月長(무영일월장) 唯餘詩酒習(유여시주습) 老去益顚狂(노거익전광) 선조 연간의 시인 권필(權韠·1569~1612)의 시다. 평생을 얽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살다보니 속된 것들과 자주 부딪치고 생계가 넉넉하지 못하다. 개울가에 집을 장만..